충청북도/충주시 69

충주...(전)유학사지(장성리사지) 석불좌상. 삼층석탑

대소원면 장성리 유학사지(장성리 사지)로 전하는 절터에서 옮겨온 불상입니다. 옛 답사기와 현재 안내문에는 유학사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문화재청의 2014년 사지조사보고서에는 유학사(遊鶴寺)가 문헌기록에서 확인되지 않은 까닭으로 장성리사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2008년 석불좌상 불두가 결실되었으며, 항마촉지 수인의 석가여래로 추정됩니다 긴 상반신 통견의 법의, 사선의 승각기, 매듭을 표현하였으며, 대의자락이 무릎 사이로 흘러내렸습니다 왼팔의 가사 끈(?)은 희미합니다. 고려 초기를 지난 고려중, 후기의 석불로 전합니다. 군의? 띠 매듭 광배 홈 측면 삼층석탑 지대석, 상층기단 중석, 상륜부가 결실되었습니다. 2008년 기단부 하층 기단 중석에는 우주와 탱주 1주가 모각되었습니다. 상층기단 중석은 ..

충주...봉황리사지 석탑부재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장 우리가 익히 하는 봉황리 마애불상군이 있는 사지에서 발견되어 옮겨왔습니다 2008년 사진 아래 옥개석이 없습니다. 즉, 훼손된 옥개석 일부를 그 이후에 후보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석탑 부재 옥개석과 탑신석이 각각 2 매입니다. 옥개석에 비해 탑신석이 좁아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옥개석 낙수면 물매가 급하고 전각의 반전이 큽니다. 현장 안내문에는 층급받침은 각층 4개(한국의 사지에는 아래 층급 받침은 5단)로 기록되어 있으며, 굄은 아래층에만 조출되었습니다 아래, 위층 탑신석 각면을 우주와 상하를 구획하여 사방불을 봉안하였습니다. 이런 예도 흔치 않지만. 옥개석 전각의 반전, 굄 유무와 탑신석의 암질로 판단하면 다른 석탑 부재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 상층 탑신석 상부에는 사리공이..

충주...용관동사지 삼층석탑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장 충주시 용관동사지에서 옮겨 온 석탑입니다. 2008년 용관동사지 삼층석탑. 4매로 결구된 기단 중석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습니다 기단 갑석, 탑신석, 상륜부는 망실되고 옥개석 3매만 남아 있습니다. 맨 위 옥개석에 찰주공이 있어 본래부터 삼층석탑임을 보여줍니다. 고려시대에 조성한 석탑으로 추정됩니다 옥개석 낙수면 물매는 급하고 하단에 턱(?)을 두었습니다. 물끊기 용도일까요?. 모서리에는 풍탁공이 있습니다 전층 4단의 옥개 받침 각형 층급받침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찰주공 석탑 기단석 앞의 부재 부연이 있는 상층기단 갑석 느낌입니다. 옥개석 낙수면의 턱은 어떤 용도인지. 다른 석탑에도 사례가 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2022.07.09

충주...충주 고구려 비

전시관 안으로 옮겼습니다 2005년 첫 인연(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카메라 없이 눈으로만 즐겼던 시절) 충북 충주시 가금면 입석마을의 이름 모를 촌로는 마을의 입석을 향해 평생 빌고 빌었다. 할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할머니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당나라, 몽고의 침입, 임진왜란 시 탄금대 전투에 동원된 자식의 무사귀환, 객지로 돈 벌러 간 자식의 안녕을 기원하며 살을 에이는 한겨울 추위에도 새벽 정한수 받아 놓고 아들 점지해달라며 그렇게 입석에게 빌고 빌었다. 1500년이나 된 남한 유일의 고구려비? 할머니들에게는 그냥 마을 지켜주는 장승이요, 역신을 막아주는 고을맥이며, 무병장수와 다산, 풍요를 보장해주는 미륵불이었다. 고구려가 중원의 주인공이 되고, 신라가 지배하고, 고려, 조선이 이땅의 왕권을 펼치던 말..

충주...봉황리 마애불상군

봉황리 마애불상군 2008년 이후 다시 들렸습니다 현재의 자연환경으로는 이해 불가지만 불상을 새겼을 당시에는 많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위치였을 것이다. 강물이 내려다 보이는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은 많은 사람과 희로애락을 함께 공유하며 그들의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매김하였음에 분명하다. "마애불상 중 비교적 초기의 예로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연결하는 중간지점이라는 특수한 지정학적 배경과 함께, 역사적·정치적 상황에 따라 조성되었다고 여겨져 신라시대 불상조각의 흐름은 물론 고구려 불상의 경향까지도 함께 보여주는 매우 귀한 불상으로 그 학술적 가치가 높다" 멀리 바라보이는 약간 떨어진 두 개의 바위에 9분의 불상, 보살상이 묘사되어 있다. 도로에서 둑을 따라 가는 길은 좁아 승용차만 접근이 가능하며 마애..

충주...원평리 석조여래입상, 원평리 삼층석탑

원평리 아래는 오류도 있지만 2008년 글입니다 이상하게도 문화재 이정표가 없어 헤매다 만났다. 마을 이름도 미륵댕이로 예전에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신라 법흥왕 때 창건한 ‘선조사(宣朝寺)’라는 유명한 사찰이 있었던 곳이라 전해온다. 현재는 미륵불과 석탑을 모시는 작은 사찰이 있다. "복련(覆蓮)의 연꽃대좌(臺座) 위에 8각형(八角形)의 갓을 얹고 서 있는 이 거대한 석불입상(石佛立像)은 고려시대(高麗時代)의 경기(京畿), 충청(忠淸) 일대(一帶)에 유행하던 석불입상의 형식을 잘 따르고 있다. 이 불상은 조각수법(彫刻手法)이 특히 뛰어나서 그 당시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생각된다. 큼직한 육계(肉계),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뚜렷한 풍만한 얼굴, 양감(量感) 넘치는 어깨와 떡 버틴 하체(下體), 그..

충주...숭선사지 당간지주, 석탑 부재

숭선사지 당간지주 역시 2008년 이후 첫걸음입니다 "숭선사 터는 숭선 마을 뒤쪽 수리산 아래의 분지에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으며 절터의 동쪽으로는 절의 수원으로 이용되었을 내(川)가 흐르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절에 승려들이 많아 한 때 식사 준비를 위해 씻는 쌀뜨물이 약 8km 떨어진 주덕까지 뻗쳤다고 하는데 절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이곳은 일찍부터 알려진 절터로 1980년대 초 숭선 마을에서 ‘숭선사’라고 적힌 기와가 발견되어 주목받기 시작하여 1995년 예성동호회(현 예성 문화연구회)에서 지표조사를 하였으며, 1998년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및 충청대학 박물관에서 3차(2000~2003)에 걸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출토된 유물로는 '숭선사(崇善寺)'라고 쓰인 기와, 금동보살..

충주...지당리 석조여래입상

지당리 석불입상 역시 2008년 이후 처음으로 뵙습니다. 지당리 석불입상 조선시대에 조성된 석불로 전합니다 큰길가에서는 바로 방향을 잡았지만 마을에는 안내표시판이 보이지 않아 집집마다 사람을 불러보았으나 텅빈 집이다.무작정 산쪽으로 향하다 경운기를 탄 주민에게 여쭈었더니 마을 앞 과수원 근처에 있다고 했다. 참으로 묘한 분위기의 절인지 굿당인지 민가인지 헷갈리는 가옥(?)에 위치해 있었다. 개인 소유의 가옥에 불상이 위치했더라도 전면을 개방 또는 건축물을 제거하는 방안이 수립되었으면 좋겠다.안내문에 의하면 불당.산제당.미륵당 이 있어 이마을을 삼당마을로 부른다고 했다. 소발, 민초들에게 자식을 점지해주신 상흔이 가득한 눈과 코는 마멸이 심하지만 풍만한 얼굴에 볼이 볼록하고 입술은 두툼하다. 수인은 손바닥..

충주...오갑사지 석조여래좌상

오갑사지 석조여래좌상 2008년 글입니다 길이 끝났다. 강원도 산골 답사 시에도 가끔 접하는 막다른 길 뒤로 산이 손짓한다. 충주시 앙성면 모림리 동막 마을, 불현듯 6.25 전쟁 발발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피아의 군사들을 만나 전쟁 속에서 피어나는 휴머니즘을 그린 영화 동막골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런 느낌의 산골 마을이지만 낯선 이방객 출현을 경계하듯 한적한 분위기를 깨고 개소리가 온 마을을 휘감고 있다. 악다구니를 부리는 놈들에게 크게 소리 한번 질렀더니 무리들이 순식간에 꼬리를 내린다. 요즘 보기 드문 시골 개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동막마을 개인주택 창고 앞에 위치한 불상은, 하대석에 복련, 팔각 간주석에는 우주가 보이고 상대에는 앙련을 새겼다. 결가부좌한 석불좌상으로 얼굴 일부, 머리..

충주...강천리 석조여래입상

2008년 이후 첫 만남입니다. 그때는 좁은 길을 따라 밭을 가로질러 뵈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축대를 쌓았고 차량 진입이 가능했습니다. 2008년 글, 사진입니다 강천리 석불입상 강천리에 도착했지만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거름을 내고 있던 중년의 농부에게 물었더니 대답 대신 어디서 왔느냐? 목적은 무엇이냐고 경계의 빛이 역력한 표정과 말투로 심문하듯 꼬치꼬치 묻는다. 도리 없이 솔직하고 정중하게 답했더니 마을 뒷산을 가리키며 찾기 힘들 거라고 한다. 아울러 본래는 2기가 있었지만 갑술(?)년 홍수 때 1기는 떠내려 갔다고 한다. 주변 환경이 좋지 않았고 잡초가 우거져 힘들게 만났다. 2기가 계셨다면 사찰에 모신 불상이 아니라 당신앙, 풍수 비보 목적, 또는 민간에서 미륵으로 모신 민불이라는 생각도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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