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고흥군 24

고흥...관리 오층석탑

법성사(도양읍 관리 1152-6) 뒤편에 위치.폐교된 도양초교 정문에 있었는데 환경이 변해 당황스러웠습니다.옛글에는 초층 몸돌, 1~2층 옥개석만 본래부재로 판단했었는데, 지금은 구분이 모호합니다.안목이 없는 탓도 있겠지만, 기술의 발전도 한몫했겠지. 2009년 글https://12977705.tistory.com/8723847기단부예전 모습인지, 그때는 풀숲에 가리어져 있었습니다.탑신부후보물을 찾을 수 있는지요?탑신석 우주옥개석 4단 층급, 1단 탑신 받침. 낙수면 물매 급하고, 상처마선 미미하게 반전본래 부재로 추정되는초층 탑신석, 1~2층 옥개석2009년 본래 자리인지, 옮겼는지 알 수 없지만 주변정리가 되어 답사 환경이 좋아졌습니다.어쩌면 우리 비지정 문화유산 관리의 모범답안일지도 모르겠습니다.2..

고흥...신호리 석당간

춘흥에 겨워 어떤 표현도 사족일 것 같아 옛글로 대신합니다. 신호리 당간(2009년)https://12977705.tistory.com/8722991탑동. 탑성동민초들은 그렇게 부르며, 백제 때 "한자사(寒子寺)" 또는 "한사(寒寺)"터로 구전된다고 합니다.방형 기단석에 석주를 끼운 상태입니다.방형 같지만 부등변 팔각석주입니다.석불의 보개 같습니다.석당인지솟대인지비보 목적의 돛대인지...... 나는 왜?나로도 우주센터가 연상되는지.2025.03.28

고흥...상림리 삼층석탑

상림리 삼층석탑. 풍양면 상림리 577번지 야산에 있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풍양면사무소로 옮겨왔으며, 저도 2009년 풍양면사무소에서 뵈었습니다. 지금은 도원면 고흥분청문화박물관 홀 중앙으로 이건 되어 있었습니다. 상림리 삼층석탑(2009년)https://12977705.tistory.com/8722993현재는 세척하여 유의하지 않으면 본래부재와 후보물이 쉽게 구분되지 않습니다.2009년 사진을 확인하면 확연히 구분됩니다.기단갑석. 옥개석 3기가 본래부재 같습니다.(2009년 사진)기단갑석하부 부연 생략. 중석에 명문이 남아 있습니다.명문천희오년 신유십일월(天禧五年 辛酉十一月)동심동원위성수천장국태민안법륜상전(同心同原爲聖壽天長國泰民安法輪常轉) 석탑(石塔) 동량(棟梁) 천희 [天禧] 5년은 고려 현종12년..

고흥...천등산 금탑사 부도

언제 들렸던가?기억마저 까마득합니다.독경 중임에도 불구하고 극락전 촬영을 허락하였던 비구니 스님이 스쳐 갈 뿐. 오늘은부도를 찾기 위해 들렸습니다. 2009년 글https://12977705.tistory.com/8722990   나한전 조선 후기 종형 부도동박새와 동백꽃은 알 테지요. 경외에 흩어져 있던 부도를 모셔 놓았습니다. 부도 1백파당(栢坡堂)노출된 면에는 당호가 보이지 않으나, 문화재청 한국의 사찰문화재에는 백파당(栢坡堂) 부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뒤집어 보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부도 3의 오류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합니다. 백파당(栢坡堂) 1778년 조성된 금탑사 극락전의 삼세괘불도에 화기에 등장하는 스님입니다.즉, 18세기 후반 이후 부도입니다. (출처.문화재청. 한국의 사찰문화재) ..

고흥...감목관 정청, 조중대 철비

흥양목장 관아터에 2기 감목관 철비가 있습니다. 도양읍 관리 1348 흥양목장 "흥양목장은 1436년(세종 18)에 설치되어 성종 때에는 1천필이 넘는 말을 관리하던 곳으로 감목관 1명, 군관 6명, 목인 27명, 지인 6명, 사령 12명 목자 472명 등이 있었을 정도로 큰 목장이었다. 목장은 말을 키우는 것 이외에 전시가 되면 둔전이 설치되어 군량미를 생산 조달하던 곳으로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보면 체찰사 이원익이 도양둔전의 작황을 보고 감격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현재 흥양목장의 관아터는 찾아 볼 수 없고, 관중회관 앞 감목관 선정비․불망비 2기만 남아 전한다. "(위키 백과) 현장 안내문 감목관 정 공 청 애민선정비 監牧官 鄭 公 聽 愛民善政碑 정청 鄭聽 "승정원일기등을 확인해 보면 ..

고흥...현감 도거원 철비

철비는 고흥향교 비림에 위치 문닫힌 향교는 멀치감치에서 까치발로... 홍살문.하마비 삼강문 외삼문 고흥향교 "1441년(세종 23)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하여 고흥현 서문(西門) 밖에 창건되었다. 정유재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다가 1695년 유생 강익무(姜翊武)·치무(致武) 형제가 향교의 재건을 상소하고 신규(申樛)·송만징(宋萬澄) 등이 발의하여 1700년 교궁(校宮)을 중건하였다. 이어 1817년 현감 유민검(柳民儉)이 양사재(養士齋)를 설립하고, 이듬해 현감 신의학(愼宜學)이 동재(東齋)·서재(西齋)와 명륜당의 지붕을 보수하였으며, 1828년 현감 조존승(趙存昇)과 이광문(李光文)·송석흠(宋碩欽) 등의 노력으로 대성전이 중수되었다. 1910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