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616

곡성...당동리 석조여래좌상. (전)화장사지 석조여래좌상

제가 당동리를 처음 찾았을 때 마을 사람들이 반갑게 맞아주며 안내해주던 일이 엊그제 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일부 전공자, 연구자를 제외하고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답사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인지하는 사지가 되었습니다.오늘은 이 마을에 사지에서 반출된 석탑부재가 있다고하여 들렸으나 끝내 탐문에 실패했습니다. 2021년 글로 대신하며 사진 몇 장 첨부합니다.https://12977705.tistory.com/8727602당동리 석불좌상 화장사지 석불좌상당동리를 끝으로광양 고흥 장흥 완도 해남 진도 강진 무안 나주 화순 곡성으로 이어지는 봄날의 남도 순례를 마칩니다. 2025.03.30

화순...쌍렬문 정려. 충노 목산지비

쌍렬문. 야사리 산 37-1두 명의 열녀 정려를 모셨습니다.하대붕의 처인 동복 오씨 부인의 정려. 이득춘의 진양 하씨 부인의 정려 오씨부인 정려는 학당 마을에 있었고, 진양 하씨 부인의 정려는 전도 마을에 있었다고 합니다. "학당 마을과 전도 마을은 1984년 동복 수원지 확장 당시 수몰 지역에 포함되어 마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정확한 정려의 연도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감사 황신이 장계를 올려서 정려가 내려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리고 정려각의 최초 위치가 전도 마을과 학당 마을에 있었던 것은 당시 야사 마을과 인접하고 있는 각각의 마을에 오씨 부인과 하씨 부인이 거주하였기 때문이다. 두 정려각이 쌍렬문이 된 것은 하대표(河大豹)[1550~1622]의 4대 손인..

화순...야사리 은행나무. 느티나무

야사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이서면 야사리 182-1번지 야사 마을야사 마을의 지명을 취하여 이름이 붙었다. 야사(野沙) 마을의 뜻은 ‘들모실’[들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한자화한 것이다. 야사 마을은 처음에는 평사(平沙)라 했고 이후 금사(錦沙)·사촌(沙村)·사천(沙川)이라 표기하다가 야사(野沙)로 정착되었다. 야사리는 무등산에서 발원한 영산천을 따라 자연 촌락이 형성되었고 1500년(연산군 6) 경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전한다국가유산청 사진나이가 약 500살(지정당시) 정도로 추정되며 나무 높이 20.0m, 가슴높이 둘레 11.0m로 야사리 마을의 집 뜰 한 구석에 있다. 가지 사이에는 혹 또는 짧고 뭉뚝한 방망이처럼 생긴 유주가 아래를 향해 달려있다.유주조선 성종(재위 1469∼1494) 때 ..

화순...열녀 문화유씨 비. 노비 순동 공로비

우리나라 노비의 비석과 관련 자료를 찾아 이곳에 왔습니다.화순읍 다지리 206-2번지의병장 해주 최공 서생효자통정대부행흥덕현감최공기종유적비 의병장 최서생과 부인 문화유씨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흥덕현감 최기종열부(烈婦) 류씨부인(柳氏夫人) 효자 열역재(悅易齋) 류덕용(柳德容)의 딸로 그는 류덕용(柳德容)의 정훈유습(庭訓儒習)을 받아 모든 행동이 어린 시절부터 범인과는 다른 바가 있었다. 말과 행동을 신중히 하면서 윗사람을 접하는 태도가 항상 예의 법도로 하였고 온화한 표정을 잃지 않았으며 생활이 어려운 사람을 보면 남모르게 보살펴 아낄 줄 아는 부덕(婦德)이 몸에 배어 있었다.그가 성장한 후에는 닦은 인품에 걸맞게 화순의 명문(名門) 해주최씨(海州崔氏) 집안으로 출가하게 되었다. 최서생(崔瑞生)역시 당시 ..

화순...불암사 석탑부재

불암사화순군 춘양면 우봉음지길 35-208조선 시대 용암사(聳巖寺)라는 절터에 자리하고 있다. 용암사는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능주 동쪽 금오산에 있는 사찰로 기록되어 있으나, 1897년에 작성된 『호남 읍지(湖南邑誌)』에는 폐사되었다고 기록되어 조선 후기에 운영된 사찰임을 확인할 수 있다. 1993년에 편찬된 『화순 군사(和順郡史)』에서는 877년(신라 헌강왕 3) 도선 국사(道詵國師)가 용암사를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건 설화에 의하면 “도선 국사가 이곳을 지나다 바위가 여덟 폭의 병풍처럼 둘러싸고 앞산에는 관음성상(觀音聖像)이 상주(常住)하는 듯한 절터인데 법당 오른쪽 후면에 바위가 없는 것을 애석해하자 하룻밤 사이에 땅속에서 큰 바위가 솟아 올라왔다. 그래서 사찰 이름을 용암사라 하였다”라..

화순...충효사.충노 근춘비

충효사(忠孝祠). 화순군 향토문화유산도암면 벽동길 9-13박지수朴枝樹(1552~?)와 아들 박천주朴天柱(1578~?)를 배향하는 사당입니다. 1598년 건립되었고 1868년 대원군 시절 훼철되었으며, 1924년에 우선 단으로 제향해 오다가 1955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현장 안내문의 박지수 생몰년은 1562~1593년으로 설명)뒤쪽이 충효사. 앞이 숭의당문이 닫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충효사에는 있었던 국가지정 보물인 "총마계회도(驄馬契會圖)"는 국립나주박물관에 있습니다. 총마계회도(驄馬契會圖). 사진 출처/국가유산청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sngl=Y&ccbaCpno=1123617..

나주...국립나주박물관 옹관.나한상.서문 안 석등

국립나주박물관그 근처를 아주 여러 번 오고 갔지만 들리지 않았습니다.묘제에 관심이 없고 석조문화유산도 서울 국박에서 만났던 서성문 앞 석등 밖에 업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그러다가 우연하게 불회사 나한상이 전시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 호남 답사 동선에 포함시켜 인연 지었습니다.옹관(甕棺)반남고분군https://12977705.tistory.com/8728726불회사 나한상. 고려말~조선초 불회사 원진국사 탑(부도). 2018년https://12977705.tistory.com/8726096 불회사(2009년)https://12977705.tistory.com/8722950나주 서문 안 석등. 국보나주 서문안 석등고려시대 흥룡사興龍寺에 있었던 석등으로. 후에 나주읍성 서문 안으로 옮겼으며, 일제강점기..

나주...반남 고분군

무안에서 나주로 향하는 길고분군이 스쳐갔지만 석조 유물에 비해 크게 관심이 없어, 정확히는 안목이 일천한 탓에 들리지 않았습니다.답사지인 나주박물관에 도착하였지만 개관 전이어서 앞쪽에 자리한 반남 고분군을 처음으로 둘러보았습니다.짧은 상식으로는 영산강 유역. 대형옹관묘. 전방후원분 등등이 떠오를 뿐입니다.반남고분군삼국시대의 고분군. 2011년 대한민국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반남 고분군에는 대형옹관고분 수십 기가 분포하고 있다. 대형옹관고분이란 지상에 분구를 쌓고 분구 속에 시신을 안치한 커다란 옹(甕: 항아리)을 매장하는 방식이다. 이 고분양식은 고구려의 적석총, 백제의 석실분, 신라의 적석목곽분, 가야의 석곽묘 등과 구별되는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독특한 고분양식이다. 대형옹관고분은 A.D 3세기부..

무안...남악사 석불대좌. 석조보살좌상

남악사블로그. 카페에 포스팅이 없어 첫 순례로 생각했었는데 눈에 익숙합니다.그렇다면 약사사. 미륵사. 벅수 등을 답사했을 때 인연 지었을 텐데 옛글에는 약사사가 남학사 옛터에 건립되었으며 남악사 비로자나불 대좌는 미륵사에 있었다는 내용이 보입니다.당시에 어떤 자료를 근거로 표현했는지는 표기하지 않았습니다. 약사사(2013년)https://12977705.tistory.com/8723881 마륵사(2013년)https://12977705.tistory.com/8723879비로자나불옛 미륵사 답사기에는 남악사 비로자나불을 미륵사에서 발굴된 불상으로 표기하였으나 근자에 봉안된 불상으로 추정됩니다.석불대좌근처에 있는 미륵사에서 옮겨왔다고 전합니다.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이 온건(?)하게 전합니다.비로자나불 대좌..

강진...월남사지 석탑부재

퍽 낯섭니다.그렇다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도 않고.답사객이라면 여러 차례 인연 지었을 월남사지 삼층석탑https://12977705.tistory.com/8727061 몇 년 전 삼층석탑 외에도 월남리 마을에 석탑부재가 있었다는 자료를 확인하고 마을을 방문했었으나 인연 짓지 못했습니다.오늘은 먼저 다녀온 송봉주 박사로 부터 정확한 위치를 알고 쉽게 찾았습니다.2012년 사진이때 월남사에서 석탐부재를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옥개석 2기민가 주인은 월남사지에서 옮겨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2012년 내가 보았던 그 석탑부재인지는 불분명합니다.민가에는 석탑부재 외에도 치석 한 석조 유물이 다수 있었으며, 월남사지에서 반출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옥개석(1)방형 찰주공으로 미루어 맨 위층 옥개석으로 추정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