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충주시

충주...숭선사지 당간지주, 석탑 부재

임병기(선과) 2022. 8. 10.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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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선사지 당간지주

역시 2008년 이후 첫걸음입니다

 

"숭선사 터는 숭선 마을 뒤쪽 수리산 아래의 분지에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으며 절터의 동쪽으로는 절의 수원으로 이용되었을 내(川)가 흐르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절에 승려들이 많아 한 때 식사 준비를 위해 씻는 쌀뜨물이 약 8km 떨어진 주덕까지 뻗쳤다고 하는데 절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이곳은 일찍부터 알려진 절터로 1980년대 초 숭선 마을에서 ‘숭선사’라고 적힌 기와가 발견되어 주목받기 시작하여 1995년 예성동호회(현 예성 문화연구회)에서 지표조사를 하였으며, 1998년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및 충청대학 박물관에서 3차(2000~2003)에 걸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출토된 유물로는 '숭선사(崇善寺)'라고 쓰인 기와, 금동보살두, 동탁, 모정(기와고정못), 분청사기장군, 청자완, 백자완, 귀면와, 치미, 용두, 와당 등으로 이들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의 것으로 사지(寺址)와 유물이 일치된다.  1차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상과 철지금동장와정은 표면에 두터운 흙과 부식물이 덮여 있어 정확한 형태와 재질을 파악할 수 없는 상태였으나 2001년 9월부터 2003년 7월에 걸쳐 실시된 보존처리가 완료되어 원형이 복원되었다.  절터의 제일 밑 점토층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상은 보살두 1점과 2개체 분의 동체부 파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금동불두는 높이 8㎝로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으며 원만한 얼굴에 살며시 내려 감은 눈,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간 눈꼬리, 오뚝한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이 아름답다. 동체부는 어깨에 천의(天衣)를 표현하였고 합장인(合掌印)을 하고 있다.  

 

철지금동장와정(鐵地金銅裝瓦釘)은 기와를 고정하는데 쓰이는 못으로 길이 23. 2㎝와 25. 4㎝의 두 부분으로 절단된 채 출토되었다. 기와에 꽂히는 아래 부분이 철제인 반면 위의 연봉 장식은 철제 바탕 위에 얇은 금동판을 덧씌우는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철지금동장와정은 아직 출토된 예가 없어 당시 금속공예 기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사원 배치는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양식으로 남문지, 탑지, 금당지, 영당지, 회랑지, 동문지 등의 건물지가 확인되며, 건물의 세부적인 유구는 건물 기단부의 화강암 석축 기단, 주초석, 적심석, 석축배수로, 전돌 포장, 답도, 탑의 적심, 우물, 온돌 등이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어 건축사 사료로서 매우 큰 가치를 지닌다.  

 

고려 광종은 재위 2년에 아버지인 太祖를 위하여 개성의 남쪽에 대봉은사(大奉恩寺)를 세워 태조 원당(太祖願堂)으로 하였으며, 또한, 동쪽 교외에 불일사(佛日寺)를 세워서 어머니인 선비유씨(先?劉氏)의 원당으로 삼았다. 그런데 개경의 불일사가 있는데도 3년 뒤인 954년(광종 5)에 다시 모후(母后 : 神明順成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충주에 숭선사를 창건하였다.  이처럼 충주지역에 숭선사를 창건하게 된 이유는 중부내륙지방의 대표적인 호족세력이 유긍달(劉兢達)로 대표되는 충주유씨(忠州劉氏)이며, 어머니 또한 충주유씨 가문이었던 것이 주된 원인이라 생각된다.

 

충주 유씨는 고려 초에는 외척세력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고, 정종과 광종의 왕위 계승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들은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 있는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를 통하여 볼 때 왕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불교계에서의 역할도 매우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광종과 충주 유씨와의 관련성 속에서 어머니의 고향인 충주에 어머니를 위한 원찰(願刹)로서 숭선사를 창건하면서 영당을 조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에서 살펴본 숭선사의 창건 배경과 파악된 건물지 규모 등을 종합해 볼 때 이 건물은 신명순성태후의 영당으로 고려 광종 5년(954년)에 조성되었고 1182년(고려 명종 12)과 1579년(조선 선조 12)에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으며 18세기까지는 사찰의 경영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출토되는 萬曆年間 己卯年銘 기와 대부분은 불에 탄 흔적이 남아 있음을 보아 임진왜란 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숭선사가 위치한 지역은 왜군의 북상로에 위치하고 있고, 신립장군이 배수의 진을 치고 격전을 벌였던 탄금대가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숭선사는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확인된 고려시대 창건 사찰이라는 점에서 역사성과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큰 유적지로서 사적 제445호로 지정되었다."

출처/충주 전통 문화회

 

숭선사지 당간지주는 한쪽 지주와 기단부만 남아 있다. 한쪽은 일제강점기에 쪽바리들이 마을 앞 다리 교각으로 사용되었다가 신덕 저수지를 축조하면서 매몰되었다고 한다.
 

당간지주 간대석

 

석탑 부재

 

 

당간지주를 바라보듯 씁쓸한 풍경이다.

가을에는 못 올 것 같다.

그 처연함에...

(2008.08.08)

 

다시

2022년...

당간지주

짝을 잃고 아니 강탈당하여 저수지 제방에 묻혀있습니다.

 

방형 간구

땅속에 묻혔던 하부는 거칠게 치석 하였습니다

 

외부

상부 모서리를 모죽임하여 둥글게 치석 하였습니다

중앙에는 돋을대를 낮게 조각하였습니다

 

간대

예전에는 오픈되어있었습니다.

 

고려초 숭선사 창건 당시에 세웠던 당간지주입니다

 

우리나라의 당간지주

https://cafe.daum.net/moonhawje/MebK/231

 

한국의 사지에 실린 창건 이야기를 가져옵니다

"숭선사는 954년에 광종이 창건하였다. 『高麗史』와 『高 麗史節要』에는 광종 5년 봄, ‘왕이 숭선사를 창건하여 돌아가신 어머니 명복을 빌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광종이 母后 忠州 劉氏(神明順聖王太后) 願堂으로 건립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숭선사 창건에 앞서 광종은 951년 에 태조를 위해 개경 궁성 남쪽에 大奉恩寺를 창건하고, 동쪽 성 밖에 어머니를 위해 佛日寺를 창건하여 원당으로 삼았다.

 

따라서 불과 몇 년 만에 어머니를 위한 원당 사 찰을 다시 건립한 것은 효심이나 신앙심과는 별개로 또다른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광종이 왕권강화 정책을 펼치기 위해 충주 유씨 세력을 규합하기 위한 목 적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 당시 충주 유씨 세력과 왕실, 그리고 불교계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충주에 숭선사를 창건할 수 있었다는 논의가 이루어진 바 있다.

 

특히 충주 인근에 위치한 「興寧寺澄曉大師塔碑」와 「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 음기에 신명순성왕태후 아버 지인 柳兢達이나 태조 최측근이었던 劉權說이 명기된 것으로 볼 때 당시 왕실 후원을 받은 충주 유씨 세력이 불교 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 부재

 

석탑 기단 갑석

예전에는 당간지주 근처에 있었습니다

숭선사지

 

중문지

신부재로 쌓은 위치

탑지

부재를 활용한 우측 축대 윗편 회랑지 안쪽입니다

 

금당지

 

석탑 면석과 장대석

기단중석으로 탱주 2주가 모각되었습니다

 

돌확

 

석탑재

 

강당지

금당지, 회랑지

석탑지

 

천년만년 향유하려 했던 꿈

찰나이었지요.

 

그럼

5 년은...

 

2022.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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