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산성 행궁 늦은 시간 문이 닫혀 아쉬움을 달래야 했습니다. 금림조합비(禁林組合碑) 일제는 전쟁 물자를 확보하고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 산림을 남벌했고, 남한산성 성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산성마을 주민 303명이 국유림을 불하받은 후 벌채를 막기 위해 금림조합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1927년부터 광복 때까지 소나무를 보호해 왔다고 한다. "1929년 3월 23일 동아일보에 ‘남한산금림조합기념’이란 기사에는 “산성리 유지 30명으로 남한산 금림조합을 조직하야 조합원 일동이 매회 월 이백원씩을 집합(集合)하여 빈민구제 사업으로 남한산성에서 산림보호를 목적하야 산감(山監) 50명을 극빈자로 뽑아 매일 산감 6인씩을 교대로 남한산을 매일 오륙 차례 순찰케 하였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어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