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산성 행궁
늦은 시간 문이 닫혀 아쉬움을 달래야 했습니다.
금림조합비(禁林組合碑)
일제는 전쟁 물자를 확보하고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 산림을 남벌했고, 남한산성 성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산성마을 주민 303명이 국유림을 불하받은 후 벌채를 막기 위해 금림조합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1927년부터 광복 때까지 소나무를 보호해 왔다고 한다.
"1929년 3월 23일 동아일보에 ‘남한산금림조합기념’이란 기사에는 “산성리 유지 30명으로 남한산 금림조합을 조직하야 조합원 일동이 매회 월 이백원씩을 집합(集合)하여 빈민구제 사업으로 남한산성에서 산림보호를 목적하야 산감(山監) 50명을 극빈자로 뽑아 매일 산감 6인씩을 교대로 남한산을 매일 오륙 차례 순찰케 하였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어 당시 금림조합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경인일보. 2015년 11월 17일)
금림조합장 이영래의 영세불망비
山城里 禁林組合長 李公永來 永世不忘碑
損金愛護 樹木叢生
蒼蒼薈蔚 百世芳名
甲戌 正月 日
都監督 李舜永 外 役員 三十七人 立
갑술 정월 일
도감독 이순영 외 37인 립
OOOO은 일본 년호를 훼손한 것 같습니다
1934년 도감독(都監督) 이순영 외 37인이 세웠습니다.
금림조합장 석동균 영세불망비
山城里 禁林 組合長 石公東均 永世不忘碑
刱設組合 損材禁林
一城賴德 永忠公襟
OOOO 甲戌 正月 日
都監督 李舜永 外 役員 三十七人 立
갑술 정월 일
도감독 이순영 외 37인 립
OOOO은 일본 년호를 훼손한 것 같습니다
1934년 도감독(都監督) 이순영 외 37인이 세웠습니다.
우리나라의 금표
https://cafe.daum.net/moonhawje/MebK/239
금립조합비는
일제시기 남한산성의 삼림을 보호하기 위해 조합을 창설하여 남벌에 공을 세운을 지킨 두 조합장의 영세불망비입니다.
비를 세운 이후에는 금표비(禁標碑) 기능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2023.02.03
'경기도 > 광주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주...골동품 칠룡 (0) | 2023.02.20 |
---|---|
광주...관음사 삼층석탑. 승탑 (0) | 2023.02.19 |
광주...성종 옹주(공신옹주, 휘숙옹주) 태실.태비 (0) | 2020.07.29 |
광주...연산군 아들 돈수 태비 (0) | 2020.07.28 |
광주...용불암 마애 마야부인상 (0) | 2020.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