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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옥천군33

[스크랩] 옥천...청마리 탑신제당, 솟대 같은 동이면인데 석탄리에서 청마리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누구나 한 번 쯤 들렸을 경부고속도 금강휴게소 밑을 지나 굽이굽이 금강과 어깨동무하며 달려야 한다. 한참 후 비포장 도로에서 길을 물으니 청마리를 지나쳐 왔다. 고향가는 길. 초행길이지만 아주 눈에 익은 한국인의 정서와 어울리는.. 2008. 6. 6.
[스크랩] 옥천...동이면 선돌, 고인돌 석탄리에 도착했다고 네비게이션도 서비스 종료. 하지만 입석과 고인돌 소재지는 오리무중이다. 마침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이 나오시길래 여쭈었더니 고인돌은 정확한 위치를 가르켜 주셨으며, 선돌은 동행해주셨다. 우리네 인심이요. 정이다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석탄리 마을 앞에 서 있는 선돌.. 2008. 6. 6.
[스크랩] 옥천...척화비 다시 찾은지 10년도 더 지난 듯하지만, 동행했던 장인 어른의 한 마디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임서방!. 이거 볼라고 여기까지 왔냐?" 옥천읍 삼양네거리에 위치한 척화비는 직사각형으로 마멸이 심하다. 가장 큰 이유가 전쟁중 적으로 오인한 피아간의 교전으로 인한 상흔이라고 한다. 여느 비처럼 .. 2008. 6. 6.
[스크랩] 옥천...죽향 초교 옛교사, 죽향리사지 탑 시인 정지용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여사의 모교로도 유명한 죽향초등학교는 1909년 10월 1일, 사립창명학교로 설립되었다. 당시 일제 통감부는 1908년 공포한 사립학교령을 토대로 많은 사립학교들을 공립보통학교로 흡수통합을 실시하였는데, 사립창명학교 역시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 2008. 6. 6.
[스크랩] 옥천...춘추 민속관 지난 영동 답사와 마찬가지로 옥천 역시 문화재 이정표는 제로다. 충북도청에 강하게 어필하고 싶었다. 옥주사마소를 찾다 우연히 들린 지용생가 근처 춘추 민속관에서 기대치 않은 즐거움을 누렸다. 여러 곳에서 수집한 석물, 불상, 생활 용품이 전시되어 있고 솟대도 보인다. 누군가 무덤 앞을 지켰.. 2008. 6. 6.
[스크랩] 옥천...옥천 향교, 옥주 사마소 옥천 구읍. 구읍에는 지용 생가, 육영수 생가, 향교, 옥주 사마소, 비림이 현존하고 있다. 옥천에 철도역사가 설치되기 전에는 구읍은 옥천 생활경제의 중심지였다. 일찍부터 선진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구읍은 철도경유지였으나 이곳사람들의 절대적인 반대로 옥천역은 현재의 위치에 설치되고 상.. 2008. 6. 6.
[스크랩] 옥천...육영수 생가 육영수.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1925. 11. 29 충북 옥천~1974. 8. 15 서울. 옥천 생가터 아버지 육종관(陸鍾寬)과 어머니 이경령(李慶齡) 사이의 1남 3녀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42년 서울 배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옥천중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1950년 10월 12일 당시 박정희 중령과 결혼했다. 1963.. 2008. 6. 6.
[스크랩] 옥천...정지용 생가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 2008. 6. 6.
[스크랩] 옥천...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이 해금되기 전 대학생이 된 우리아이들 어렸을 때 다녀 왔던 곳 10년은 된 듯... 지용생가는 단장이 되었더라. 문학관도 생기고 그때 파란눈의 이방인이 지용을 술술 언급할 때 무척 부끄러웠었다. 하지만 아직도 부끄럽다 지용 선생이 안계셨더라면 청록파 시인은 탄생했을까? 시문학 동인인 .. 2008.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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