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강화군 35

강화...흥왕리사지(2) 석탑부재

흥왕사지기존 국가유산청 발간 한국의 사지에는 흥왕사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동일기관의 2023년 학술조사보고사는 흥왕사지를 흥왕리사지(1)로, 오늘 방문한 사지는 흥왕리사지(2)로 기록하여 혼란스럽습니다. 이 글에서는 오늘 답사한 사지는 흥왕리사지(2)로 2016년 답사한 사지는 흥왕사지로 표기하겠습니다. 흥왕사지(2016년).https://12977705.tistory.com/8725213흥왕사지 석탑부재 흥왕리사지(2)는 흥왕사지를 거쳐서 가야 합니다.  흥왕리사지(2)금년초 우리 카페 최석훈 님이 포스팅한 절터입니다. 국가유산청 홈페이지의 강화 마니산 학술조사보고서 자료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답사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도 거의 처녀지나 다름없는 사지입니다. 그 절터를 찜통더위를 뚫고 샘물처..

강화...사기리 탱자나무

사기리(沙器里) 탱자나무 화도면 사기리 135-10번지1962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으니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문화유산청 홈페이지에는 기록을 살펴보면400년 수령, 원나라의 고려 침공 때 성 주위에 심었던 나무, 탱자나무의 북방 한계선에 자라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탱자나무는 주로 영·호남지방에 분포하며 일본·중국에서도 자란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나무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열매와 껍질은 약재로 사용되며 줄기에 가시가 나 있어 과수원 울타리용으로 적합하다.강화 사기리 탱자나무의 나이는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3.56m, 뿌리 부분 둘레 2.2m이다. 가지의 굵기로 미루어 볼 때 매우 컸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 대부분 가지가 죽고 동쪽 가지만 살아 있다.강화도는..

강화...고려산 백련사

백련사기억의 오류?왜 답사했었다고 생각했을까요?아니왜 그렇게 수 차례 강화 답사를 하면서도 동선에 포함시키지 않았을까요?아마도고려시대에 조성되어 보물로 지정된 후 도난된 철조여래좌상 외에는 특별한 옛님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그런 연유로 백련사와 흥왕리 사지(2), 강화역사박물관 일제강점기 석불과 더불어 이번 강화도 답사의 주목적의 하나이었습니다.철조여래좌상(출처. 문화재청)극락전1905년에 세운 절집에서는 흔치 않은 ㄱ字 건물입니다.원래는 관음전이었으나 1986년 극락전으로 현판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백련사 창건설화"고구려 장수왕 4년(416)에 천축스님이 고려산 꼭대기에서 오련지五蓮池를 발견하고 다섯 송이의 연꽃을 날려  연꽃이 떨어진 장소에 절을 세웠는데, 하얀 연꽃이 떨어진 곳에는 ..

강화...강화역사박물관 강화 동종 外

일제강점기의 88 불상은 탐문에 실패하고전시실의 강화동종,선두포축언시말비,고려 청자, 불교문화유산 몇몇 점을 둘러보았습니다.청련사 원통암 감로탱(모본)문화유산청 등재 원통암 감로탱(진본). 1906년금동여래입상. 통일신라강화읍 대산리 출토금동삼존불. 고려강화 관청리 출토선각불상경(線刻佛像鏡). 고려강화 용정리 출토전면 윤왕좌 수월관음보살좌상. 명문. 鄭氏年二十三共眞후면 아미타여래(관람객은 볼 수 없다)강화 동종강화산성 남문에 걸려있었던 종문화재청 자료에는 1711년 사인비구가 주조한 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현장 설명문은 모호합니다현장 설명문1688년 강화유수 윤지완 처음 주조1711년 강화유수 민진원이 옛 종을 녹여 새로 주조 옛종. 사인 비구 새로 조성 종. 조신 설명문에 따르면 사인비구는 ..

강화...강화역사박물관 석조여래불두, 석조연화대좌

야외전시장여러 자료에 실려있는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신사국 88 불상을 찾지 못하고 실내 전시물 답사 후 들어가면서 먼발치에서 보았던 야외 석조물을 살펴보았습니다.귀부비신이 망실되었으며, 방형으로 새겨진 귀갑문이 이체롭습니다.석조석조여래불두. 석조연화대좌2015년 하점면 장정리에서 신고된 연화대좌 2기와 2022년 같은 곳에서 추가 신고된 불두입니다.안내문에는 고려시대 절터로 추청 되는 사지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연화대좌(1)상대석과 하대석이 한돌입니다.각각 단판단엽의 연화문과 간엽을 새겼으며 상부에도 복연을 조식하였으며 다소 투박한 상태입니다..안내문 설명처럼 고려시대에 조성된 대좌이면 후기로 추정됩니다.입상의 불보살의 대좌로 불신을 끼웠던 촉공만 남아 있습니다연화대좌(2)연화대..

강화...전쟁기념관 하마비. 금표

전쟁기념관 비림정문 들어서서 우측에 있습니다.개인적으로는 세 차례, 최근에는 2021년에 답사한 것 같습니다.하마비강화 향교에 있었던 하마비 수령이하개하마(守令以下皆下馬)정 3품 이하는 말에서 내려 출입하라는 문구입니다.계묘 하립(癸卯 夏立)계묘년을 현장 안내문에는 1,783년으로 특정하였습니다.설립 연도를 새긴 하마비는 흔치 않습니다.금표(禁標)명문금표(禁標)방목축자장일백(放牧畜者杖一百)기회자장팔십(棄灰者杖八十) 고려궁지 부근에는 가축을 방목하지 말고, 재를 버리지 말라는 경고문입니다.계축 사월 일립(癸丑四月日立)현장 안내문에는 계축년을 1,733년으로 설명합니다우리나라 금표비https://cafe.daum.net/moonhawje/MebK/239 2024.08.07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

2004년 문화재청 주관, 답사 이후 첫걸음입니다. 뒤죽박죽인 그때 글이 남아 있습니다. "가을이 농익어 가건만 떠나지 못함의 아쉬움에 병이 깊어질 무렵 답사후기 당선 부상으로 강화도로 답사 간다는 문화재청에서 날아온 낭보에 거의 보름밤을 불면에 시달린 것은 우리 문화를 좋아하면서도 한양의 궁궐을 비롯 경기북부를 답사해보지 못한 나의 컴프렉스를 만회할 절호의 기회에 대한 설렘 때문이었을 것이다.처녀지에 대한 기대는 첫날밤 마누라 가슴을 더듬던 기억 만큼이나 흥분과 감흥으로 가득 차서 오매불망 잠 못 이루며 천재일우의 오늘을 손꼽아 기다렸기에 새벽 5시부터 대구에서 출발한 여정이 오후 2시가 되어서야 강화대교 건너 강화초입에 도착했어도 피로는 고사하고, 점심 식사 때 맛본 게장과 강화특산 순무 깍두기 맛에..

강화...남창포대. 덕진돈대.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비

2004년 문화재청 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에 입선하여 강화도를  답사사하였을 때 들렸던 기억이 있습니다.당시에는 사진을 찍지 않을 때지만 글이 남아 있습니다. " 내게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일기에도 피곤하기는커녕 열정이 넘쳐나건만 일행들 특히 문화재청에서 온 직원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강화도는 한말에 서구 열강들이 한양으로 침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지리적 위치기에 어쩌면 군사적 요충지 었다.강화 해안선을 따라 구축되어 있는 군사시설인 진, 보, 돈대가 수도 없이 많아 보여 한말에 축성했을 것이라 지레짐작을 했는데 가이드에 의하면 임란, 병란 후 숙종 재위 시 외세의 침입과 이궁목적으로 축성되었으며 경기도 광주, 개경과 함께 강화도에는 오늘날 2급에 해당하는 관원이 파견되어 있었다 한다..

강화...능내리 석실분

능내리석실분 가릉 뒤편에 위치한 고려 항몽 시기의 지배 계급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인천광역시 기념물 28호입니다. 석실은 남북으로 장방형이며, 봉분에는 호석(추정 12각형), 난간 둘레석, 석수 2기가 있습니다. 석실 앞에는 제사터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됩니다. 또한, "석실 네 방향에서 진단구로 판단되는 도기 항아리가 출토되었으며, 석실에서는 청자 편, 각종 금은제장식 파편, 유리그릇 편, 구슬류, 상부 통보(祥符通寶, 송(宋) 진종(眞宗) 1008∼1016 제작) 1점, 은제 못, 금박 장식 관재 등 소량이지만 다양하게 출토되었다"라고 합니다. (다음 백과) 제사터 난간 어미 기둥과 동자주에 화문을 새겼습니다 동자주의 화문 어미 기둥의 법수 석수(1) 무덤 수호신으로 2기만 유존합니다. 석수(2) 능..

강화...가릉

가릉(嘉陵) 고려 원종(재위 1259∼1274)의 왕비 순경 왕후의 무덤으로 강화도에는 천도 시기에 조성한 석릉(碩陵), 곤릉(坤陵), 홍릉(洪陵)이 남아 있습니다. 순경 왕후(1,222~1237) 본관은 경주(慶州)로, 고려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장익공(莊翼公) 김약선(金若先)의 딸이다. 고려 무신정권기 집권자 중 한 명인 최우(崔瑀)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원종이 태자가 되기 이전 입궐하여 경목현비(敬穆賢妃)로 책봉되었다. 1235년(고종 22)에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가 되었으며, 1236년(고종 23) 충렬왕(忠烈王)을 낳고, 1244년(고종 31) 훙서하였다. 원종이 왕위에 올라 1262년(원종 3)에 추봉(追封)하여 정순왕후(靜順王后)로 삼았고, 아들 충렬왕이 즉위하여 1274년(충렬왕 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