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문화재청 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에 입선하여 강화도를 답사사하였을 때 들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사진을 찍지 않을 때지만 글이 남아 있습니다.
" 내게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일기에도 피곤하기는커녕 열정이 넘쳐나건만 일행들 특히 문화재청에서 온 직원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강화도는 한말에 서구 열강들이 한양으로 침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지리적 위치기에 어쩌면 군사적 요충지 었다.
강화 해안선을 따라 구축되어 있는 군사시설인 진, 보, 돈대가 수도 없이 많아 보여 한말에 축성했을 것이라 지레짐작을 했는데 가이드에 의하면 임란, 병란 후 숙종 재위 시 외세의 침입과 이궁목적으로 축성되었으며 경기도 광주, 개경과 함께 강화도에는 오늘날 2급에 해당하는 관원이 파견되어 있었다 한다.
문화재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일망무제로 펼쳐진 갯벌을 볼 수 있는 가장 전망 좋은 본오리 돈대로 향하면서 이런 길은 마음 맞는 사람과 더구나 마누라가 아닌 아줌마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니 나란 인간은 덜 떨어진 것인지, 인간적인 것인지, 언감생심 만추의 로맨스를 꿈꾸는 것인지 모르겠다.
돈대란 군사시설에서도 가장 앞선 곳에 설치된 오늘날의 초소로서 지형에 따라 원형, 방형으로 축조되나 본오리 돈대는 반월형이며, 보통 4문의 포, 10여 명이 상주하였으며, 전시에는 30여 명이 주둔하였다는 학예사의 설명도 눈앞에 전개된 갯벌의 장관 때문인지 부슬비에 실려 여리게만 들려온다.
가을비가 장맛비만큼이나 세차게 내려 대부분의 일행은 하차할 생각도 하지 않건만 학구열(?)에 불타는 몇몇 사람들은 덕진진과 남장포대로 향하면서 학예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진은 오늘날 대대병력이 주둔하였던 군사시설이라니 그만큼 요충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군이 갑곶돈대로 침입하여 정족산성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양헌수 장군이 여기를 통해서 정족산성으로 잠입 프랑스군을 궤멸시켰을 뿐 아니라 우리 역사상 최초로 신미양요 때 미군과 일전을 치른 곳이라 한다.
덕진진에는 전국에 산재한 척화비와는 다른 대원군 시절에 세운 경고비가 바다를 향해 그 시절을 머금고 서있다.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즉 어떠한 경우에도 타국의 배는 이 해협을 통과할 수 없다는 문구가 그 시절의 우리가 처한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는 듯하다.
날씨 탓에 빠르게 어둠이 산아래로 내려오고 있지만 학예사는 광성보와, 초지진, 손돌목 돈대, 용두돈대를 꼭 보아야 한다며 분주히 발길을 재촉한다. 광성보는 신미양요 때 중화기로 무장한 미군에게 일천한 무기로 맞선 조선군사가 장렬히 전사한 터로 어재연 장군의 형제의 쌍충비각과 52명의 무명용사를 화장하여 7개의 묘를 안장한 곳이라는 늦게 합류한 문화유산 해설사의 맛난 설명이 이어지며 미군이 승리 후 환호하는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 곳에서는 해설사의 톤이 높아진다.
"광성보 전투는 미군 해병 전사에 "전쟁에서는 이겨도 전투, 정신력에서는 참패한 전투"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니 조선 군사의 애국심을 미루어 짐작할 수 도 있건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나를 잠시 미궁으로 몰아넣는다.
용두돈대 역시 박정희 대통령의 성역화 사업으로 눈부시게 단장되어 있고 자랑스러운 필체가 예외 없이 새겨져 있는 곳에서 손돌의 전설과, 저 해협 건너 그의 묘 등에 관한 숨겨진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지만 나도 이제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2004.11.05
오늘은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공조루(拱潮樓)
덕진진의 문루입니다.
덕진진
"강화 덕진진은 고려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이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방비하기 위해 내성, 외성, 돈대, 진보 등의 12 진보를 만들었는데 그중의 하나이다. 현종 7년(1666)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해군주둔지(수영)에 속해 있던 덕진진을 덕포로 옮겼으며, 숙종 5년(1679)에 용두돈대와 덕진돈대를 거느리고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관할함으로써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져 있었고, 강화 12진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군대에 의하여 점령당하였다. 이때 건물에 몸을 숨겨서 적과 싸울 수 있도록 쌓았던 낮은 담은 모두 파괴되었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지금 덕진진에는 문루인 공조루(拱潮樓), 남장포대, 덕진돈대, 대원군이 세운 해문방수비(海門防守碑)가 있다. 해문방수비에는 ‘바다의 문을 막고 지켜서, 다른 나라의 배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의미의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가 새겨져 있다".(다음 백과)
남장포대(男障砲臺)
강화는 남·서·북 삼면에 아무런 방비시설이 없어 소홀한 감이 있었으나 1679년(숙종 5)에 유수(留守) 윤이제(尹以濟)가 돈대를 쌓아 방비하였다. 이 남장포대는 강화 9개 포대 중의 하나로, 1871년(숙종 5)에 축조되었으며 덕진진(德津鎭)의 관할하에 있었다.
자연적인 지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해상에서는 적에게 보이지 않는 반월형의 천연요새를 이루어 마치 중국의 손자병법을 재현한 전략을 연상하게 한다. 포좌(砲座) 15문이 설치되었다가 파괴된 것을 1977년에 다시 복원하면서 조선시대 홍이포(紅夷砲)를 만들어 설치하였다.(다음 백과)
덕진돈대
덕진진 소속의 2개 포대 중의 하나로 광성보와 초지진 중앙에 위치하여 강화수로의 가장 중요한 요새지이다. 신미양요(1871년)당시 미국 함대와 48시간 동안 포격전을 전개한 곳이다. 이때 파괴된 것을 1977년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돈대 내부
강화수로와 대원군 경고비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즉 어떠한 경우에도 타국의 배는 이 해협을 통과할 수 없다는 문구가 그 시절의 우리가 처한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덕진진을 찾은 가장 큰 이유가 이 비석 사진을 찍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이 비석을 대원군 척화비로 분류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척화비
https://cafe.daum.net/moonhawje/MebK/57
어제 같은데
20년 만에 찾은 덕진진
경고비만 기억에 남아 있고 돈대와 포대는 아련합니다.
대원군 척화비
유일하게 사진이 없었지만 그 이후 몇 차례 강화도 답사하면서도 놓쳐버렸습니다.
이제야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24.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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