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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고양시

고양...연산군 시대 금표비

by 임병기(선과) 2020.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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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시대 금표 비(燕山君 時代 禁標 碑)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

 

 

오늘 답사의 마무리

햇볕이 따스하게 느껴집니다.

 

 

금표비는

1,995년 근처 금천군 묘역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금천군(錦川君)은 성종의 서자인 경명군(景明君)의 손자입니다.

 

 

연산군 시대 금표비로 추정하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내용 때문이지만, 실제로 금표비가 발견된 것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9월 2일 무인 2번째기사 1506년 명 정덕(正德) 1년

연산의 죄상에 대한 사신의 논찬

"(전략) 도성(都城) 사방 1백 리 이내에는 금표(禁標)를 세워서 사냥하는 장소를 만들고, 금표 안에 들어오는 자는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로 논죄했다. 항상 단기(單騎)로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고 치달리고 왕래하였으며 따로 응사군(鷹師軍) 1만여 명을 설치하여 사냥할 때는 항상 따라다니게 하였다(후략)

 

***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 :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3권 이율(吏律) 공식(公式) 기훼제서인신(棄毁制書印信)조에, ‘무릇 왕의 교지 및 왕이 사신에게 내리는 역마 발급의 어인(御印) 찍힌 문서와 사신에게 내리는 승선급첩(乘船給牒) 또는 각 관사(官司)의 인장 및 야순패면 (夜巡牌面)을 고의로 내버리거나 파손한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는 형률.

 

 

금표 내 범입자 논 기훼 제서율 처참(禁標 內 犯入者 論 棄毁 制書律 處斬)

의역하면

왕명(국명)을 어기고 금표 구역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참형에 처하겠다는 섬뜩한 경고입니다.

 

 

금표

연산군의 사냥 구역으로 추정됩니다.

 

 

조선왕조 실록에는 연산군 재위 시에 금표와 관련된 기사가 많이 실려있습니다

 

연산군일기 55권, 연산 10년 8월 7일 갑자. 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금표에 들어왔다 하여 영서역 역자 우질동 등을 의금부에 가두다

-.금표에 대한 원망은 위를 능멸한다고 보아, 삼족을 멸하는 특별법을 만들게 하다

-.금표로 인하여 모든 제단이 폐지된 고로, 제사 의식이 문란하게 되다

 

 

금표비는 중종반정 후 땅에 묻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9월 2일 무인 5번째 기사 1506년 명 정덕(正德) 1년

홍 숙의·박숭질을 복권하고 폐주의 동서 금표를 폐하다

 

"홍 숙의(洪淑儀)의 직첩을 도로 주어 자수궁(慈壽宮)에 들게 하고 【숙의는 성종의 후궁으로, 폐주가 직첩을 빼앗고 궁에서 내쫓았던 이.】 박숭질(朴崇質)의 벼슬을 복직시키고, 동서 금표(東西禁標)) 를 혁파할 것을 명하였는데, 모두 대신의 말을 좇은 것이다. 

 

대신 등이 아뢰기를,

"명일 벼슬아치를 보내어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내고 고하소서."

하니, ‘그리하라.’ 전교하였다."

 

 

연산군 금표비

중종반정 이후 백성들이 매장되었던 비석이 발견된 것은 연산군의 폭정의 단서를 보여주는 비석입니다.

근처에는 최영 장군의 묘역을 비롯 조선시대 무덤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 답사 동선 수립 시에 참고 바랍니다.

 

20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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