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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울진군

울진...홍우순 철비.심해 철비

by 임병기(선과) 2019.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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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신라비전시관.죽변면 봉평리 521번지

 

 

향우측 비림

울진지역에 산포해있던 비석을 모아 세웠습니다.

 

 

철비

향좌측 비림에 있습니다.

 

2기 모두 월송대에서 이건하였습니다.

 

 

 

관찰사 홍 공 우순 청덕애휼 영세불망비 觀察使 洪 公 佑順 淸德愛恤 永世不忘碑

임자 십일월 일 진민등 립 壬子 十一月 日 津民等 立

1852년 11월. 나룻터의 백성 등이 세움

월송대에서 이건


홍우순(洪祐順 : 1791~1862년)

"본관은 풍산이고, 자는 이백(耳伯)이며, 호는 성산(城山)이다. 26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35세에 전시에 급제하였다. 시강원설서, 사헌부장령, 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후에 춘천부사, 강원도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거쳐 의정부좌참판, 판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기로소에 들어 숭정의 품계를 하사받았다."(다음)


비석 건립당시에는 울진이 강원도 이었으므로 ,임기중에 불망비를 조성하였습니다.

묘는 인천에서 조성하였으나 현재는 경기도 일산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선세휼수 船稅恤受

선박 세금을 줄여 주었다는 내용인 듯 합니다.


홍우순의 신도비에는 강원관찰사 재임기간 관련 내용이 짧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신해년(철종 2, 1851년) 가을에 강원도관찰사를 제수받아 다스릴 때에 청렴하고 공의로써 엄정하게 하여 한결같이 공평하게 하였다. 때에 귀척의 아들이 고을 수령의 관하에 있으면서 그 세력을 믿고 향리를 은닉하였는데, 감히 부군에게 아뢰지는 못하고 수령을 비방하였으므로 그 수령은 관직에서 면하여지고 전리로 돌아갔다. 이러한 일이 인근 여러 군현들에 전해졌는데, 마치 부군에게 변이 있을 것처럼 잘못 전하여졌다. 부군께서 이러한 기미를 살펴서 무리들을 진압하고 백성들에게 그 잘못된 바를 바로잡아 보이니 3년간 선정을 베푸시고 돌아오실 때에 수레 앞에 사람들이 앞다투어 나와 머물러 주실 것을 청하였다. 그 다스림을 잊지 못하여 불망비를 세우고 서너 차례나 그 일을 조정에 아뢰었다."(출처/다음)


그런데

철비 앞 설명문에는 재임기간을 1850년 2월~1853년 3월 까지로 기록하고 있으나, 신도비에는 1851년 신해년(大臣筵奏進嘉善授左右尹同春秋副摠管兵曹叅判同 經筵辛亥秋拜江原道觀察使爲治廉公嚴明鋤奸懲墨一路淸平時有貴戚)에 강원관찰사를 제수 받았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즉, 안내문 설명 오류로 생각됩니다.

 

 

 

현령 심 공 해 유애선정비 縣令 沈 公 瑎 遺愛善政碑

옹정 임인 이월 일 립 雍正 壬寅 二月 日 立 .1722년 2월 세움.

동치 경오 십일월 일 개립 同治 庚午 十一月 日 改立.1870년 11월 다시 세움.

월송대에서 이건


재임:1722년 3월~1724년 8월

 

현령 縣令

"지방을 군현단위로 편성한 것은 중국 진(秦)나라 때이다. 군 아래 현을 두고, 현의 수령으로는 현의 인구가 1만 명 이상이면 현령을 두고 그 이하이면 현장을 두었다. 이것이 한대의 군현제, 당송대 이후의 주현제로 계승되어 중국 지방제도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로써 현은 지방행정의 하급단위로 고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식 군현제를 도입한 신라시대부터 현령을 두었다. 이때는 중국식으로 큰 현과 작은 현으로 나누어 각각 현령과 소수를 두었다. 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현은 293개였는데, 당시 기록된 전국 현령의 정원은 201명이며 소수는 85명이었다. 현령에 임명하는 관등은 선저지에서 사찬 사이였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도 군현제도가 정비되어 각 현에 현령이 파견되었는데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 현령의 수를 알 수 없다.


예종대 이후에는 현령 아래 감무라는 지방관이 설치되어 현령이 파견되지 않는 곳에 파견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1431년(세종 13) 외관의 품계를 재정리할 때 현령을 종5품으로 하고 감무의 후진인 현감을 종6품으로 상향조정되었으며, 이른 한말까지 지속되었다."

(다음백과사전)

 

 

거후지사 去後之思

부이미질 父而彌切

떠난 후에 아버지 처럼 더욱 간절히 생각납니다.

 

 

비수

두천리 십이령 들머리의 정한조.권재수 철비도 이 철비를 모본으로 한 것 같습니다.


 

 

2019.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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