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상북도/울진군

울진...불영사 양성당선사 혜능 부도

by 임병기(선과) 2019. 10. 23.
728x90
728x90

 

 

 

불영사

오늘은 양성당 대사 부도,부도비를 찾아 왔습니다.

2010년 글로 대신 합니다.

 

 

삼층석탑

 

 

지대석.하층기단

 

 

상층기단

 

 

탑신부

 

 

상륜부

 

 

 

배례석

 

 

 

 

불영지

 

 

부도전

 

 

 

양성당 대사 부도.부도비

 

 

양성당선사 혜능 養性堂禪師惠能(1621~1696)

"양 () (), () () () . () () () . . 12 () () , () () () () .

 

, () (), () · () · () · () . , . () () () . 속세 나이 75, 64 . 3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탑신 상부에는 복련을 조식하고 연화보주를 올렸습니다.

 

 

기단부 복련

 

 

탑신 하부 앙련

방형 지대석과 복련이 표현된 기단부

 

 

부도비문에 의하면

1696년 입적 후 사리 3과를 수습하여 봉안하였습니다.

 

 

養性堂禪師惠能浮屠碑銘」
養性堂大師法諱惠能字仲悅俗姓南其先自麗代寓居仙槎後裔仍籍焉自師高曾祖連五代登虎榜母田氏籍幸」
州亦望族也母夢天仙而娠及誕名夢仙盖以此也師幼而質直不妄言語與昆季處嬉戱同樂而常有出世」
之意父母異之年十二遂從應哲長老受戒八閱歲淹通內外典就天照大師而質之又禮叅於虎丘堂澄」
悟無礙性仁厚沉毅喜檀施嚴誡律平生喜遊名山憩頭流入金剛若五臺雉岳大小太白足跡殆遍焉」
盖欲尋師講道而超然有汗漫寥廓之意矣一日忽見征鴈而歎曰求道無方人不反本何異於弱喪忘」
歸遂故棲 住天竺頣養精神顔其堂曰養性其所爲歌詩皆從念佛三昧中流出一絶云講罷蓮經」
日已昏松風蘿月掩紫門幽居自得幽居趣一境淸閑夢不煩讀之怳然坐我於曼陀優鉢羅間」
也丙子十二月十七日趺坐寂然而化壽七十五臘六十四茶毘之日瑞氣罩空數日乃滅遂得金光」
舍利三粒建浮屠于寺東數十步許其首弟天玉將立石紀其蹟因洪于海萬宗求銘於余于海之」
於大師若文公之於太顚備諳事實爲余言甚詳余聞而嘉之遂爲之銘曰」
釋有妙旨觀性最要師能蚤悟覰破幽眇剩得眞詮克闡三乘於我大師在後足徵」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崔錫鼎撰」
乾隆三年二月日竪」
越明年 戊午 二月 十八日 立碑」
法弟子眞鋻 山中 天眼 普仁 秀還 法熙 三綱 淨崙 處律 書記 漏眼 元俊 靈眼」
廣云 曾孫 受弟子 天玉佐 處宗 智益 幸擇 致明 智淑 斗萬 次弟子 淸右佐 廣正 孫在信」

 

해석문

불영사양성당선사혜능부도비(佛影寺養宬堂禪師惠能浮屠碑)

양성당대사의 법명은 혜능(惠能)이고 자(字)는 중열(仲悅)이다. 속성(俗姓)은 남씨(南氏)로서 선조는 고려시대 때부터 선사군(仙槎郡)에 우거하였는데 후손이 그대로 적을 두게 되었다. 대사의 고조와 증조로부터 시작하여 연달아 5대에 걸쳐 무과에 합격하였다. 어머니 전씨(田氏)는 행주(幸州)에 적을 둔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다. 어머니가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의 꿈을 꾸고 대사를 임신하였다. 태어나자 이름을 몽선(夢仙)이라고 지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대사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솔직하고 함부로 말을 하지 않았으며, 형제들과 있을 때는 장난을 치면서 즐거워했으나 항상 세상을 벗어나려는 뜻을 갖고 있어서 부모님은 기이하게 생각했다. 12살이 되자 마침내 응철(應哲) 장로를 따라가 수계(受戒)한 지 8년 뒤에는 불교의 경전과 다른 경전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천조(天照)대사에게 가서 질정(質正)하고 또 호구당(虎丘堂)에게 참례(參禮)하여 무애(無礙 : 걸림이 없음)를 명징하게 깨달았다.


성품은 인자하고 너그러우며 침착하고 굳세었으며, 보시를 좋아하고 계율을 엄히 지켰다. 평생 명산 유람을 좋아하여 두류산(頭流山)에서 휴식을 취하고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오대산(五臺山) · 치악산(雉岳山) · 대소산(大小山) · 태백산(太白山) 같은 산에 족적이 두루 미쳤다. 대체로 스승을 찾거나 도를 강의하기 위해서였으며, 초연히 한적하고 고요히 텅 비우려는 뜻이 있었다. 하루는 갑자기 멀리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구도에 정해진 것이 없으나 사람이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약상(弱喪)이 돌아갈 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윽고 예전 보금자리로 돌아가 천축사(天笁寺)에서 주석하면서 정신을 길렀는데, 거처하던 당(堂)에 양성(養性)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그가 부른 노래와 시는 모두 염불삼매 중에 나온 것으로서 한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연화경 강의 끝내니 날은 이미 어두워
솔바람과 울타리에 걸린 달 사립문을 덮었네.
그윽한 거처에 그윽한 거처의 취미 얻었으니
주변이 맑고 한적하니 꿈이 번거롭지 않네.

읽고 나니 황홀하여 만다라(曼陀羅 : 불화(佛畵))와 우발라(優鉢羅 : 청색의 꽃) 사이에 앉아있는 듯하였다. 병자년(丙子年) 12월 17일 가부좌를 한 채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세속 나이로 75세, 법랍은 64세였다. 다비식을 하던 날 상서로운 기운이 서렸다가 며칠 뒤에 사라졌다. 마침내 금빛으로 빛나는 사리 3개를 얻어 절의 동쪽 수십 보 되는 곳에 부도를 세웠다. 수제자 천옥(天玉)이 장차 비를 세워 행적을 기리고자 하여 우해 홍만종(于海洪萬宗)을 통해 내게 명(銘)을 구했다. 우해와 대사의 관계는 문공(文公)과 태전(太顚 : 문왕 때의 신하) 사이와 같았는데, 사실을 모두 외어 내게 자세히 말해주었다. 내가 듣고 훌륭하게 생각하며 명을 지었다.

불교에 오묘한 뜻 있으니
본성을 보는 것 요체라네.
대사는 일찍이 깨달아 / 師能蚤悟
심오한 도리 깨우치고
경전의 이치까지 얻어
상승의 경지 드러냈으니
우리 대사에게서
후세 사람들 고증하리라.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최석정(崔錫鼎) 지음.
건륭 3년(영조 14, 1738년) 2월 일 세움.

이듬해 무오년(영조 14, 1738년) 2월 18일 비를 세움.
제자 : 진감(眞鑒),
산중(山中) : 천안(天眼) · 보인(普仁) · 수환(秀還) · 법희(法熙)
삼강(三綱) 정곤(淨崙) · 처율(處律)
서기(書記) : 누안(漏眼) · 원준(元俊) · 영안(靈眼)
증손 : 광운(廣云)
애제자 : 천옥(天玉), 좌(佐) : 처종(處宗) · 지익(智益) · 행택(幸擇) · 치명(致明) · 지숙(智俶) · 두만(斗萬)
차제자 : 청암(請岩), 좌(佐) : 광정(廣正)
손(孫) : 재신(在信)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기단석

 

 

비수

 

 

 

 

부도비문에 의하면 조성에 관한 잼;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부도비는 1738년에 세웠으며 입적한 그 이전의  병자년은 1696년 입니다.

즉, 부도를 모신 후 42년이 지나 부도비를 세웠으며, 비문을 지은 영의정 최석정의 생몰(1646~1715) 년대를 감안하면 비문도 부도비 조성 최소 23년전에 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내력이 몹시 궁금합니다.

 

2019.10.06

아래는

2010년 글

 

 

사람의 기억이라는게 이해할 수가 없다. 다른사람에 비해 돈안되는(?)기억은 출중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왔는데 1982년 친구들과 여행목적으로 들렸었고 1989년 즈음에도 방문했지만 진입동선 조차 낯이 설다. 포항에서 옛님들과 저녁 만남 약속도 있건만 차량은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운 날씨 숨이 가파오고 마음은 급하다. 이런 길은 여유를 가지고 콧노래 흥얼거리며 세월을 잡아야 제맛이지만 그건 한가한 사치로운 바람일 뿐이다. 그런 내마음이 통했는지 반가운(?) 빗줄기가 송림사이를 오락가락 내린다. 무지개도 보일려나?

 

 

극락교? 왜기억에 없을까? 불영계곡의 추억만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간다. 이제는 50줄 중반에 들어선 친구놈들도 아련하고...

 

근남면 행곡리에서 서면 하원리까지 15km 에 이르며 기암괴석과 깊은 계곡, 푸른 물은 가히 절경이다. 1979년 12월 11일 명승 제6호로 지정되었으며 여름철에는 계곡 피서지로, 봄·가을은 드라이브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고, 겨울철에는 설경을 구경할 수 있어 사시사철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한 계곡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계곡의 중간지점에 2개소(불영정, 선유정) 있으며, 불영사계곡은 여름철(7∼8월) 한시적으로 비지정 관광지로 지정.운영(수수료 징수)하고 있다. 의상대, 창옥벽, 조계등, 부처바위, 중바위, 거북돌, 소라산 등 온갖 전설이 얽혀 있는 절경지가 많다.보기 드문 꼬리진달래와 백리향을 비롯해 560여 종류의 식물이 이 지역에서 서식하고 있다. 또한 학술조사를 통해 조류 11종, 어류 42종, 포유류 17종, 나비 30종, 거미류 94종이 살고 있음이 밝혀졌다.

 

 

여느사찰처럼 창건 설화에 독룡 이야기가 전해온다. 전설이 함축하는 의미는 우리님들도 이제는 이해하리라 믿는다.

 

불영사는 651년(신라 진덕왕 5) 의상 대사(625∼702)가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이다. 의상 대사가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해안을 따라 단하동(丹霞洞) 해운봉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서역의 천축산을 옮겨온 듯한 지세가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맑은 물위에 부처님 다섯 분의 모습이 떠올라 인연 깊은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부근 폭포에 독룡(毒龍)이 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사는 처음 독룡에게 설법하고 이 땅을 보시할 것을 청했으나 용이 따르지 않자 법력으로 쫓아내었다. 용은 분하여 산을 뚫고 돌을 부수며 떠났는데 대사가 못을 메워 사찰을 창건하였다.

 

의상 대사는 이어서 남쪽에 청련전(靑蓮殿)을 짓고 무영탑(無影塔)을 세워 비보(裨補)한 뒤 산 이름을 천축산, 절 이름을 불영사라 하였다. 처음 연못에 비친 부처님 모습의 바위는 불영암(佛影巖), 용이 산을 뚫었다는 자리는 용혈(龍穴), 용이 도사리고 있던 곳을 오룡소(五龍沼)라고 하며, 불영사를 휘감아 도는 광천(光川) 계곡은 구룡(九龍) 계곡으로도 불린다. 지금 사찰 경내에 있는 연못이 바로 의상 대사가 부처님 그림자를 보았다는 불영지(佛影池)다.

 

그런데 불영사를 창건한 의상 대사는 그 뒤 오랫동안 천하를 두루 다니다가 오랜만에 다시 불영사로 돌아왔다. 그 때 절 입구의 마을에서 한 늙은이를 만났는데, 그는 몹시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부처님이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하였다. 마을 사람들도 이를 보았는데, 그 이후로 불영사를 불귀사(佛歸寺)로 부르게 되었다.

 

 

전설속의 불영지. 이층루각도 범종루가 아니라 전설에 걸맞게 법영루(法影樓)이다.

 

 

현판은 몽양서원에 배향된 조선 정조 시대의 선비인 황림(篁林) 윤사진(尹思進)의 글씨이다. 윤사진의 본관은 파평(), 호는 황림()이다. 일찍부터 학식이 출중하였으나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정조 때 울진현령 이병정()의 천거로 승정원에 오른 그의 행장과 저서를 보고 정조가 크게 감탄하여 예각에서 간행하도록 명하고 그를 영동교양관()에 임명하였다. 1793년(정종 17) 몽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정관치설()》, 《통서연의()》, 《용학집해()》, 《하학도설()》, 《천인일리학설()》등의 많은 저서를 남겼다.

 

대웅보전은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에 정측면 각 3칸씩의 규모로  내부에 봉안된 후불탱의 조성시기인 1735년(영조 11)과 동시대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후기의 전각으로 자료적 가치가 높아 1994년 보물 제1201호로 지정되었다. 대웅보전에서 건축 양식상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건물에 색을 칠한 단청 부분이다.

 

현재 바깥쪽은 다시 칠하여 본래의 모습을 잃었지만 안쪽은 천장의 청판(廳板), 포벽 사이의 여백에 별화(別畵)를 금단청(錦丹靑) 계열로 그려내었다. 이 단청들은 형태가 잘 남아 있고, 그 기법에 있어서도 수준이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건축 양식뿐만 아니라 격조 높은 불화와 단청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고식 기단

 

기단부 아래 양쪽에 거북이 상이 조각되어 있어 마치 대웅보전을 받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이는 화재에 약한 목조 건축의 단점을 생각하여 화기(火氣)를 막기 위한 비보책이다. 또다른 설도 있다. 대웅보전이 앉은 형국이 바다와 같기 때문에 동해 용왕의 화신인 거북을 받쳐두지 않으면 물에 가라앉는다는 것이며,  스님들 이야기로는, 대웅보전을 사바의 고해를 건너가는 반야용선으로 보고 바다 생물인 돌거북 조성했다고 한다.

 

 

석가여래좌상과 문수, 보현보살상. 대웅보전 후불탱인 영산회상도는 화기에 의해 1735년(영조 11)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격조 있는 양식, 양호한 보존 상태 등으로 18세기 초 조선시대 불화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되어 1997년 보물 제1272호로 지정되었다.

 

도상을 보면, 화면 중앙의 석가여래는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는 편단우견의 옷을 걸쳤으며, 손가락을 땅으로 향하게 하여 마귀를 물리치는 의미를 지닌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석가여래 주변으로 10대 보살, 사천왕상, 10대 제자 등이 배열되어 있다. 영산회상도에서는 대체로 8대 보살이 그려지는데, 이 그림에서 10대 보살을 표현한 점과 석가여래 아래에 배치된 보살이 유난히 큰 점이 특징이다.

 

석가여래의 옷이 붉은색이고 뒤쪽의 광배가 이중으로 붉은 테를 두른 점 등은 조선 후기의 불화 양식보다 약간 앞선 특징이다. 이러한 점은 하동 쌍계사 팔상전 영산회상도, 대구 파계사 원통전 영산회상도와도 양식적 특징에서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아울러 이 그림은 채색의 사용법이 유창하고 아름다우며 묘사법이 정밀하여 그림의 가치를 더욱 높인다.

 

 

 이 원패는 포항 오어사의 철현(哲玄), 양산 통도사의 영현(靈現), 탁진(卓眞) 스님 등이 함께 순유(巡遊)하다가 불영사에 들렀는데, 주변의 절경에 취해 이곳에서 한 여름을 보내게 되었다. 이 때 불영사에는 혜능(惠能) 스님이 주지로 있었는데 이 세 분의 스님과 뜻이 맞아 불패(佛牌), 전패(殿牌) 각 3위씩을 조성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우순풍조국태민안(雨順風調國泰民安)'

 

원패는 1678년(숙종 4)에 제작한 것으로 채색되어 있는데, 앞면에 '우순풍조국태민안(雨順風調國泰民安)'의 원문(願文)이, 뒷면에 1678년에 지은 '발원문서(發願文序)'가 적혀 있다. 이 발원문서에 따르면 본래 원패 3위를 제작했던 것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은 1위만 전한다.

 

 

대웅보전 앞에 서 있는 삼층석탑으로,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과 상륜부가 있는 구조를 하고 있다. 1979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었다. 상층과 하층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하나씩을 새겼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탑신석의 각 면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옥개석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올라갔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가 놓여 있다. 아담하지만 전체적으로 고른 균형을 이루고 있는 석탑으로, 기단의 조각 수법과 옥개석의 모습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현재 높이 321㎝이다.

 

불영사 불연...출처/문화재청

 

불연은 가마의 일종으로 왕실에서 사용하는 ‘연’이나 ‘덩’과 비슷한 것으로, 절에서 시련의식(侍輦儀式)에 사용하는 불교의식구(佛敎儀式具)이다. 시련은 가마를 문밖까지 메고 나가 신앙의 대상인 불·보살이나 재(齋)를 받을 대상인 영가 등을 가마에 모시고 여러 가지 위의(威儀)를 갖추어 법회장소(도량)까지 행렬을 지어 오는 불교의식으로 이때 불연이 사용된다. 시련의식에 사용되는 것으로는 불·보살을 의식도량에 모셔 와서 돌려보내는데 필요한 불연과 행렬에 필요한 나팔, 각종 번 및 기치류가 있다.

 

이렇게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의식구는 불교적 신앙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구상성(具象性)을 지니는 불교 공예품이라 할 수 있다. 불연은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불교의식과 함께 그 제작이 보편화되었다. 현재 불영사에는 2채의 불연이 있는데, 매년 석가탄신일때 아기부처를 모시고 경내를 도는 시련의식을 행하고 있으며, 이때 이 불연을 사용하고 있다.

 

 


불영사 불연...출처/문화재청

불연 1의 받침대 하부에는 조련기가, 불연 2의 받침대 하부에는 시주질이 묵서되어 있는데, 이 명문들에 의해 불연의 제작시기와 제작동기, 공역에 참가한 시주자와 승려들을 확인할 수 있다. 불연 1의 크기는 높이 125 × 난간폭 86 × 길이 311cm이며, 불연 2는 높이 125 × 난간폭 80 × 길이 303cm이다. 형태는 전체적으로 나간을 두른 집모양으로 받침대, 몸체, 지붕으로 분리되게 조립하였다. 받침대는 누각의 난간과 같은 형태이며, 앞뒤에 두개씩의 손잡이를 만들었고 난간 모서리에는 용머리를 각각 장식하였다. 몸체는 창이 있는 벽체를 돌렸으며, 벽체에는 화려하게 여러 가지 꽃을 조각하였다. 지붕은 녹색비단으로 처리하였으며, 상부에는 연봉을 세워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이 불연들은 그 바닥에 쓰인 명문에 의하면, 1668년(조선 현종 9)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불영사 학종스님이 당시 경상도 양산·울산, 강원도 울진 등 여러 곳에서 시주를 받아 1670년(조선 현종 11)에 완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불영사 불연은 제작연대가 있어서 유물양식의 편년을 설정할 수 있고 시주질(施主秩)을 통하여 불영사의 알려지지 않은 승려의 계보 등을 알 수 있어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특히 조각수법이 정교하며 현재까지 알려진 불연 가운데 연대가 알려진 것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산신도

 

명부전(冥府殿)은 맞배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규모로 근래에 지은 전각이다. '명부전' 편액에는 편수(片手) 화산 재근(華山在根) 편수 석옹 철유(石翁哲侑)라 쓴 묵서가 적혀 있다. 화산 재근 스님은 석옹 철유 스님과 함께 1876년(고종 13) 문경 대승사의 지장보살탱, 신중탱 조성에 참여하였으며, 석옹 철유 스님은 그 밖에 1887년 서울 경국사 감로왕도 및 화장사 신중도, 의정부시 망월사 괘불, 1888년 문경 김룡사 칠성탱, 독성탱, 1901년 순천 선암사 약사여래회탱 및 해남 대둔사 영산회상탱, 나한탱, 독성탱, 1908년 서울 삼성암 산신탱 조성에도 참여하였던 금어 스님이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좌상과 좌우 협시로 도명존자, 무독귀왕, 그리고 후불탱이 불단 위에 봉안된 것을 비롯하여, 시왕상 10위, 시왕탱 6폭, 판관, 녹사, 시자, 장군상 각 2위씩이 있다

 

 

의상전(義湘殿)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의 규모로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이다. 안에는 의상 대사의 상과 진영을 비롯하여 여러 고승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의상 대사상은 응진전 후불탱 화기를 보면 1906년 ‘조사전(祖師殿)에 의상 조사상을 개분(改粉) 입채(入彩)하여 조성하였다.’는 내용이 있어 조성년대를 알 수 있다.

 

 

의상. 종봉(鍾峯)·원효· 청허(淸虛) 및 당호가 없는 진영 등 모두 다섯 폭이 봉안되어 있다.

 

인현왕후

 

의상전의 왕비의 영정은 누구일까? 먼저 불영사에 구전 되어오는 전설속으로 들어가 보자. "숙종대왕이 총애하는 궁희(장희빈을 칭함)로 왕비(인현왕후)가 폐출되어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꿈에 한 스님이 현몽하기를 "저는 불영사에서 왔는 바 내일 상스러운 일이 있을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였다. 과연 다음날 궁희가 꾸민 사건으로 발각되어 죄를 받고, 인현왕후께서는 환궁하게 된 까닭에, 불영사에 사방 10리 정도의 산을 하사하고 네 곳에 표지를 하여 부처님의 은덕에 사례하였다고 한다(불영사 사적비, 1933)."

 

그렇다. 인현왕후의 영정사진이다. 그런데 몇해전 의상전 수리중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의상전으로 알려져 온 건축물이 "인현왕후원당"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달빛에 물든 이야기가 햇볕에 드러난 것이다. 더구나 상량문에 의해  의상전(실제로는 인현왕후 원당)에 관하여, 1810년(순조 10)에 중창하였다는 것으로 봐,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막연히 추정했을 뿐, 정확한 창건시기를 알 수 없었는대, 이번에 발견된 상량문에서 인현왕후(1667~1701)의 성은에 보답하는 뜻으로 사후인 1867년(고종 4)에 창건되었다는 정확한 시기까지 밝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응진전(應眞殿)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인 조선시대 후기의 전각이다. 1984년 수리를 하였는데, 이 때 상량문이 발견되어 17세기 무렵에 영산전으로 지은 건물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안에는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난·가섭과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1984년 수리 공사 때 발견한 기록으로 임진왜란 전·후에 여러 차례 고쳐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1981년 보물 제730호로 지정되었다.

 

건축 양식을 보면, 다포(多包)이며 공포가 건물의 옆면에도 돌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앞면에는 중앙칸에 출입을 위한 분합문과 양 협칸에 높다랗게 살창을 달았다.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중기적 특징을 보이지만 첨차 및 쇠서 등에서 조선시대 초기 수법이 잘 남아 있고 가구(架構)의 결구(結構) 방법도 치밀하게 꾸민 건물이다. 특히 내부에는 빗반자를 외측으로 돌리고 있다.

 

 

건물 안쪽은 천장 속을 가리기 위해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다. 건물에 남아 있는 단청은 안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어 조선 중기의 문양을 살펴볼 수 있다. 구조로 보아 처음에는 팔작지붕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언제 지붕이 지금처럼 맞배로 변형되었는지 알 수 없다.

 

나한상

 

안에는 불단 위에 1906년(광무 10)에 조성한 석가본존여래좌상과 후불탱, 그리고 그 좌우에 미륵보살·제화갈라보살상이 봉안되었다. 불단 주위에는 나한상 16위를 배치하여 봉안하였다.

 

나한상

불영지 앞 법영루

 

           불영사 가는 길...박태일

       구름 보내고 돌아선 골짝
         둘러 가는 길 쉬어 가는 길
              밤자갈 하나에도 걸음이 처져
                  넘어진 등걸에 마음 자주 주었다
                        세상살이 사납다 불영 골짝 기어들어
         산다화 속속닢 힐금거리며
                  바람 잔걸음 물낯을 건너는 소리
                  빙빙 된여울에 무릎 함께 적셨다
               죽고 사는 인연법은 내 몰라도
                몸이야 버리면 다시 못 볼 닫집
                        욕되지 않을 그리움은 남는 법이어서
                               하얀 감자꽃은 비구니 등줄기처럼 시리고
                   세상 많은 절집 소리 그 가운데서
            불영사 마당 늦은 독경 이제
                            몸공부 마음공부 다 내려놓은 부처님은
                            발등에 묻은 불영지 물기를 닦으시는데
               다음달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
                         불영사 감자밭 고랑에 물끄러미 서서
               서쪽 서쪽 왕생길 홀로 보다가
           노을에 올라선 부처님 나라
   새로 지은 불영사  길

                                                                       다시 떠난다.

 

2010.08.04

 

한국관광사찰정보.문화재청.울진군청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