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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영동군

영동...백화산 반야사

by 임병기(선과) 2019.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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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충북 답사

주목적은 천태산의 폐사지 2곳 이었지요

 

하지만

동선상의 옛 인연을 스쳐 지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

 

 

백화산 호랑이는 여전히 가람을 수호하고 계십니다.

 

 

배롱과 어울리는 즈음

그런 지절에 인연 짓는 것도 행운이겠지요.

 

 

삼층석탑

고려초기 석탑으로 전합니다

12년 동안 그 자리일텐데,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쳐졌을지 궁금합니다.

 

 

엇물림 결구

그보다 지대석과 기단 중석의 물림이 눈에 확 들어 옵니다

 

우주와 탱주

너비가 줄어 들었습니다

 

 

보이시죠?

지대석 상부를 돋우어 중석을 끼워 넣었습니다.

 

학계의 공식 용어와는 별개로

저와 일부 답사꾼들은 백제계 양식이라고 합니다.

 

지대석의 내림마루

이러한 작례도 흔치는 않습니다.

 

 

지대석과 기단 중석

 

 

부연

깊고 낮게 표현했습니다.

 

 

기단갑석.초층탑신

지대석과 기단 중석 결구방법과 동일 합니다.

 

이러한 작례는

다층청석탑에서 적용되는 작례이기도 합니다.

 

 

초층 탑신

4매 부재를 감입식으로, 상층 탑신은 일석 입니다

 

 

초층 5단, 2~3층 4단 층급받침

낙수면 물매는 깊지 않고, 1단의 탑신괴임을 조출하였습니다

 

 

상륜부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습니다.

 

 

 

배롱이 절정일 즈음에 다시 오겠다는 다짐이

허언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석조여래삼존

조선후기에 조성되었으며 군향토문화재로 지정되었군요.

 

 

석가여래

 

 

문수보살

 

 

보현보살

 

 

 

벽계당정심대선사지진영(碧溪堂正心大禪師之眞影)

 

벽계정심(碧溪淨心) 선사(출처...다음카페/아비라)

스님의 법명은 정심, 법호는 벽계, 금산 사람으로 속성은 최씨이며 구곡에게 법을 이었다.
이조 태종 불교사태 당시 머리를 기르고 축첩하였다.

황악산에 들어가 고자동 물한리에 살았다.

선은 벽계정엄(벽송지엄)에게 전하고 교는 정연법준에게 전했다.
선과 교 두 갈래가 끊어지지 않고 번성하여 뻗어 나가니 무상함이여 시운이라.

정열수가 이르되, "내가 하산한 후에 벽계정심을 위하여 북산으로 이사하지 않으리다." 하였으며,
남명 조식선생은 이사하여 추념하였다.
문인으로는 벽송지엄, 묘각수미, 정연법준 등이 있으며 행장에 자세히 갖추어져 있다.

#동사열전

?
조선시대 불교가 탄압을 당할 때 벽계정심 선사는 머리를 기르고 속인 같이 지내기 위해서 이름도 자칭 '거덜첨지'라고 부르며 예쁘게 생긴 과부를 얻어 사는데, 부인 거벙네는 1년을 살아도 과부요, 2년 3년을 살아도 이름만 영감이지 언제나 밤이 괴로운 남남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스님, 저는 갈랍니다."
"왜?"
"첨지님은 이름만 영감이지 저는 항상 과부 신세를 면치 못하니, 이래서는 더 이상 못 살겠소."
"그러면 할 수 없지. 그러나 3년 동안 밥해 주느라 수고를 많이 했는데, 그 동안 수고한 수고비로 이것이나 받으시오." 하면서 표주박을 하나 내어준다.

부인 거벙네가 그것을 받아 가지고 나오다가 동구 밖 샘물가에 앉아서 표주박으로 물 한 모금 떠서 마시고 팔자 한탄만 하다가 표주박도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만 놓아둔 채 3년 동안 영감을 얻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녔으나 아무도 살자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생각해 보니 어차피 과부 신세 면할 길 없으니, 다시 첨지를 찾아가면 이름이라도 영감이니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그 길로 선사를 찾아뵙고 인사를 올렸더니,

"내 다시 올 줄 알았소." 한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 이유를 알고 싶소. 그러면 3년 전에 내가 준 표주박은 어찌 했소?"
하고 물으니 부인거벙네는 솔직하게 다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자리에 가서 보시오. 아직도 그대로 있을 것이요."
"어째서요?"

"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중이 되기를 5백번이나 하였는데, 처음 중이 되면서 지금까지 남이 주지 않는 것은 가져본 일이 없었소.그래서 그 인덕으로 무엇이든 내 것이라 이름만 지어놓으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요.

그러니 부인도 내것이니 아무도 손대지 못한거요"
그러나 부인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밑져봐야 본전이니 속는 셈 친다고 생각하면서 가서 보았더니, 과연 3년 전에 자기가 버린 바가지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본 부인 거벙네는 인과법칙의 이치는 털끝만큼도 어김이 없음을 확연히 깨닫고 다시는 다른 마음을 먹지 않고 첨지(선사)를 죽을 때까지 잘 받들어 모셨다고 한다.

?
전법게

마음이라야 곧 마음을 능히 알 것이요
법이라야 곧 가히 법을 아는것이니
이제 법과 마음을 부촉하는 바는
마음도 아니요 또한 법도 아니니라


 

 

극락전

반야사의 터줏대감입니다.

 

 

아미타 삼존을 봉안하였습니다

 

 

부도전

조선 후기에 조성된 2기 부도

낯설지 않은 객의 방문이 무척 반가우시지예?

 

예. 맞습니다.

12년만의 해후 입니다.

 

겁없이 껄쩍거린 부도전 옛글을 그냥 두렵니다.

 

 

 

 

 

 

 

 

 

 

 

 

 

그런그런

인연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별난 놈의 중생

12년 전

냇가 돌탑을 바라보며 나누었던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라 입가에 웃음이 흐릅니다.

 

어제 같은데...

 

2019.04.12

 

아래는

2007년 글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반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로서, 안동 하회마을 풍수처럼 백화산에서 흘러내리는 큰 물줄기가 태극문양으로 산허리를 감아 돌면서 연꽃모양의 지형을 이루는 연꽃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이른바 연화부수형국이라고 한다.

 

반야사는 신라 성덕왕 27년(728년) 원효대사의 10대 제자중 수제자인 상원화상이 창건하고 고려 충숙왕 12년(1325년) 학조대사가 중수 하였다고 전한다. 

 

반야사는, 전설에 의하면, 세조가 이곳에 행차하여 체류할 때 문수동자가 나무사자를 타고 안내하여 가 보니 약수가 있어 그 약수를 마시고 병을 치료하였다고 한다.

절의 이름을 반야사라고 한 것도 절 주위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한다. 그 전설을 뒷받침하는 전각이 계곡위 백화산의 빼어난 절경의 봉우리에 있는 문수전이건만 갈길을 재촉하느라 들리지 못했다.

 

 

산사라면 풍경소리가 은은하게 일주문을 내려오는 고즈넉함을 떠올리지만 발가 벗은 겨울 산사의 처연함도 자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아니다.  꽁꽁 얼어붙은 진입로를 들어서니 무너질 듯 바싹 마른 일주문이 손을 내민다.

일주문은 그냥 그자리에 변함 없이 무념무상의 자세이건만 오늘은 내마음이 바쁜 탓에 감정마져 오무라든 모양이다.

 

 

용소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은 내마음을 환하게 비추는 맑디 맑은 명경지수.

동선이 길다는 핑계로 서둘러 둘러보고 떠나려든 마음이 백일하에 노출된 듯하여 개울 건너 많은 인연들이 올려 놓은 작은 돌탑에 눈길을 돌려버렸다. 

 

 

반야사에 와서 묵으며(1)

 

절에와서 묵은지 오랜데 집생각이 전혀 안나는구나

산빛은 자리에 비춰 푸르고 대나무 그림자는 발에 들어와 성글다

맑은 시냇물은 깊은 골짜기에 소리내며 흐르고 힌구름은 파란 하늘 위를 떠간다.

스님은 하던 공부를 이미 끝냈는데 책상위에는 읽던 책이 그대로 남아 있구나.


 

좌측 부도는 특이하게도 편병 도자기처럼 앞뒤가 납작하게 방형인 석종형으로 된 탑신을 지대석과 팔각의 대석이 받치고 있고, 그 위에 옥개석과 팔각 간주(?)를 얹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요상하지 않은가? 옥개석이 복련이다. 그런 경우를 보았는가? 옥개석 위도 상륜이 아니라 팔각의 간주석 모습이다.

 

하여 지대석위에 복련의 옥개석과 간주석을 내려 얹고 현재의 팔각 대좌를 그 위에 올린 후 탑신을 올려보면 어떨까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또한 옥개석을 뒤집어 대좌 상대석으로 복원하면 자연스럽게 앙련이 될텐데...물론 이경우에도 탑신 상부의 홈은 의문이다. 전문가의 현장 답사가 요구되는 부도다.

우측  부도는 방형 지대석위에 석종형 탑신, 지붕돌을 올린 둔탁한 조선조의 일반적 형식으로 여겨진다.


 

반야사에 와서 묵으며(2)

 

대숲속 높은 절간 사람소리 적구나. 밤속에 시냇물 소리는 꿈속에 맑다

촛불은 가물가물 향은 꺼져가는데, 스님은 벽을 향해 앉았구나.

발에는 산들바람 불어오고, 달은 밝게 비친다.

 

(오늘날 거대불사 시주자인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재벌의 선조가 반야사에 남긴 두 수의 시다.)


 

외벽에 팔상도가 그려진 대웅전의 석조 불상은 경주 남산 옥돌로 조성한 석불로 개금한 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전해 내려오며(?) 석가여래를 주불로 협시보살은 문수와 보현 보살이다.


 

극락전을 배경으로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배롱나무 두 그루와 잘 어울리는 석탑은 신라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본래 석천 계곡 위로 1km 떨어진 "탑벌"에 있던 것을 1950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라 한다. 지대석 위에 1층의 기단,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이 올려져 있다.
 
여름에 반야사를 찾아 오면 석탑과 어우러진 500살도 더 먹은 하얀 속살을 드러낸 배롱나무의 푸른 잎새속에 만개한 붉은 꽃을 볼 수 있을텐데......

 

1층 몸돌에 비해 2층은 급격히 낮아지고 있으며, 1층 옥개받침은  5단, 2·3층은 4단이며, 옥개석에는 지나온 역사의 생채기를 감싸안으려는 듯 누어 있는 푸른 이끼 틈새로 철지난 바위솔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대웅전 뒷편에 자리한 사모지붕 산신각이다. 사모, 육모, 팔모 지붕은 장식용 기와인 절병통으로 마무리를 하는데 산신각에는 옹기 두 개를 포개어 올려 보는이에게 즐거움 을 준다. 사진 앞쪽에 내려 놓은 물건이 본래 절병통(사찰에서는 중생의 병를 구제하는 정병으로 인식하기도 한다)인 듯 하다.

 

기능, 상징성 뿐만 아니라 바라보는 재미도 솔솔한 절집 전각으로는 승주 송광사 세월각, 척주각,창녕 관룡사 약사전, 밀양 표충사 가람각,양산 통도사 가람각, 영주 부석사 선묘각 등이 있다.

 

2007.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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