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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영동군

영동...천태산 영국사

by 임병기(선과) 2016.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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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아파트 산악회에 종종 동행한다.

종종 이라는 의미는 산행 초입에 절집, 또는 정상 부근에 마애불이 계시는 코스는 놓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천태산 영국사

여러해전 늦은 오후 답사후 폭포로 하산하다가 혼줄이 난 기억도 있지만 보수중인 망탑봉석탑과 인연을 짓지 못해 늘 아쉬움으로 남아있는 절집이어서 산행에 합류하였다.

 

주차장에서 영국사까지 20여분이 소요되지 않으며, 등산로 주변에는 영국사를 노래한 시인들의 시가 시골 운동회의 만국기 마냥 걸려 있었다. 혼자라면 가장 맘에 다가오는 한 편 가져왔을텐데... 


 

삼신할멈바위

우리민속에서 삼신할매는 아기를 점지해주는 신이다.

할머니 이마의 주름을 닮아서 명명되었을까?

할머니가 집고 다니는 지팡이가 여럿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삼단폭포
 


예전에 없었던 일주문이 건립되어 있었다.

모두들 입장료 징수 때문에 인상이 좋지 않은 표정이었는데 착한 입장료(1000원) 덕에 금방 화색이 돌아온다. 

 

 

영국사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은행나무 

특히 서쪽으로 뻗은 가지 가운데 한 개는 땅에 닿아 뿌리를 내리고 독립된 나무처럼 자라고 있다

수령은 자료에 따라서 500삿.1300살.1500살 등 제각각이다. 

 

영국사 은행나무...이문재


천년 은행나무 아래서 들었다
천번째 가을을 물들여
가차 없이 떨어뜨리는
은행나무에게서 들었다

마음을 버릴 수 있는 자가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거늘

천 번의 겨울 지나
천한 번째 봄으로 들어서는
은행나무에게서 들었다
저 홀로 우뚝한 나무이자 숲인
천 년 은행나무 아래서 들었다

마음아, 마음들아
마음의 멱살을 힘껏 움켜쥐거라
한시도 마음을 놓지 않아야
마음을 버릴 수 있거늘
그 큰 두 눈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이냐

마음아, 이 마음아
늘 다른 마음에게 지기만 하는
이 멀쩡한 마음들아

 

 

영국사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천태산은 지륵산(智勒山) 또는 천주산(天柱山)이라고도 한다. 정확한 창건시기는 전하지 않으며, 고려 문종 때 의천이 중창하여 절 이름을 국청사(國淸寺), 산 이름을 천주산이라 하였다.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홍건적들이 황해도를 건너서 개경까지 육박하자, 왕은 이 절로 피난하여 국태민안의 기도를 계속하는 한편, 이원(伊院) 마니산성에 근위병을 포진하여 놓았다. 이 절의 맞은편에는 팽이를 깎아놓은 듯한 뾰족한 봉우리가 있는데, 왕은 그 봉우리 위에 왕비를 기거하도록 해놓고 옥새를 맡겨두었다. 그 뒤 마니산성의 근위병들이 홍건적을 함정에 빠뜨려 무찌르고 개경을 수복하여 난을 평정하자, 공민왕은 부처님께 감사드리고 평군민안(平君民安)이 되었으니 절 이름을 영국사로 바꾸라 하고 현판을 써준 뒤 떠났다 한다.


또, 일설에는 조선 태조 때 세사국사(洗師國師)가 산 이름을 지륵으로, 절 이름을 영국사로 하였다 하나 신빙성이 없다. 그 뒤 1893년(고종 30)춘계(春溪) 등이 삼축당을 중수하였으며, 1934년 영동군수 이해용 등이 힘을 모아 사찰을 중수하였다. 1942년에 옛 절터에 있던 삼층석탑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고, 1979년에는 법산이 대웅전과 요사 등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한민족백과사전에서 발췌

 

  

 

해발 714미터

영국사 우측 A코스-정상-D코스-영국사 원점회귀

식사시간 포함 약 3시간 소요되었으며 오를 때는 구간구간 경사가 급한 암반에 걸쳐진  밧줄을 타고 등산해야 한다.


 

누가 회수해올까?

 

 

원각국사부도?

팔각원당형 부도로 기단, 탑신,상륜으로  조성되어 있다.

팔각 지대석과 하기단은 한 개의 부재이며 하기단 중석과 기단중대석에는 면마다 안상을 새겼다. 기단상대에는 한겹의 앙련과 복련을 표현하였다. 탑신에는 한 면에 직사각형의 문비 안에 자물쇠 모양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의 각 면에는 기왓골은 깊고 날렵하며. 상륜에는 복발과 보주가 남아있다.

조성시기는  원각국사비와 관련하여 고려 명종 10년(1180)에 만들어진 부도로 추정한다.

 

 

지대석과 기단

 

 

옥개석, 복발, 보주

 

 

탑신의 문비와 자물쇠

 

 

 

 

석종형 부도

원각국사비 뒤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부도.

방형 지대석위에 기단, 탑신, 옥개석, 상륜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 상하대석에는 앙련과 복련이 새겨져 있으며 중대석에도 몬양이 새겨져 있다. 석종형 탑신 상륜은 범종의 용뉴처럼 생긴 보주를 올렸다. 려말선초의 부도로 추정한다.

 

 

기단

 

 

상륜

 

 

 

원구형 부도

주인공이 알려지지 않은 부도이다.

방형 기단과에 낮은 괴임을 두고 4각 중대석을 올렸다. 중대에는 안상을 표현하였고 상대석은 팔각으로 연꽃을 표현하였다. 탑신은 원구형이며이다. 고려말·조선초의 작품으로 전한다.

 

 

원각국사비

고려시대 중기의 승려 원각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원각국사는 어려서 출가하여 선사·대선사가 되었던 명승으로, 명종 4년(1174)에 입적하자 왕은 그의 유해를 영국사에 안치하였다.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비머릿돌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거북등은 6각형이며 비좌에는 안상을 새겼다. 비몸은 아랫부분이 결실되어 있으며 훼손이 심하다. 이수에는 구름과 용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고, 앞면 중앙에는 ‘원각국사비명 제액이 있다.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의하면 비문을 지은 이는 한문준이고, 건립연대는 고려 명종 10년(1180)이다.

 

 

 

이수의 제액

 

 

대웅전

 앞면 3칸·옆면 2칸 겹처마 다포계 맞배지붕이다.

창호는 어칸,협칸 4분합의 띠살문이다.

 

 

 

석가여래삼존불과 후불탱

영국사 대웅전에 있었던 영산회후불탱은 조계종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이며, 모본을 안치하였다.


 

 

목조여래좌상

대웅전 석가여래 우측 협시보살로 모셔진 관음보살좌상이다.

 

조각승 여찬(呂贊)이 제작에 참여했고 단아한 양식의 18세기 전반 충북지역의 불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본존상 대좌에 적혀 있는 조성기에는 1702년과 1711년의 제작 기록이 있고각기 보살상 대좌에도 좌, 우의 묵서명이 남아 있다.

 

*한국사찰문화재 총람 사진에는 오른손 바닥이 위로 가게 표현하였다. 그래서 모본인지 의심도 들지만 개인적으로는 여찬스님 작품으로 보았다.

 

조각승 여찬(呂贊)의 활동과 불상 연구

 

(영동 영국사 목조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최 선 일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18세기 전반 ~ 중반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전국에 걸쳐 활동한 조각승으로 금강산 유점사 범종을 고쳐 다시 만드는데 참여한 여찬스님은 18세기 전반부터 중반까지 경북 포항 보경사에 거주하던 영남의 조각승으로,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금문의 제자이다.

여찬스님이 주도적으로 제작한 불상이 학계에 알려져 있지 않은 가운데, 2011년 8월에 충북 영동 영국사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보살좌상의 수종과 연륜분석을 충북대학교 목재연륜은행과 공동으로 조사하면서 보살 바닥 면에 적혀 있는 묵서를 조사하여 최초로 여찬이 만든 보살상을 공개하였다.

이 목조보살좌상은 1711년에 조각승 여찬과 벽한 등이 제작하였는데, 18세기 불상을 만들던 진열스님이나 하천스님과 달리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전국에 걸쳐 활동할 정도의 실력을 가졌던 조각가임을 밝혔다,

조선 후기 불상 가운데 발원문과 사적기를 통해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불상은 220여 점에 이른다. 이중 수화승으로 여찬이 제작한 불상은 보살상 1점, 사천왕상 4점이다. 여찬이 제작한 불상은 조선후기 전형적인 불상의 형태를 따르고 있지만, 신체 비례와 대의 처리 등이 다른 조각승이 만든 불상과 차이가 난다.

여찬이 제작한 불상의 결가부좌한 다리를 덮은 대의 표현은 1711년 영동 영국사 목조보살좌상이 동일한 두께의 옷주름이 네 가닥 흘러내린 형태에 비해 금문이나 마일이 제작한 불상은 하반신에 걸친 옷자락 끝부분이 각진 형태를 하면서 복부에 앞으로 넓게 펼쳐져 옷자락 끝단이 S자형으로 처리된 것이 차이가 있다.

또한 여찬이 만든 불상은 대부분 17~18세기 불상과 달리 왼쪽 무릎에 늘어진 소매 자락이 표현되지 않았다. 이는 같은 시기에 활동한 색난의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 하천 등이 제작한 불상의 왼쪽 무릎을 완전히 덮은 연봉우리형의 소매 자락 표현과도 차이가 있다.

여찬의 계보는 태진(1600~1615)→법령(1615~1641)→혜희(1640~1677)→금문1655~1706), 마일(1685~1701), 청윤(1684~1706)→여찬(1706~1746)으로 이어졌으며, 여찬은 스승 금문과 마찬가지로 충북 영동, 충남 청양, 강원 삼척, 경기 안성, 서울 등에 불상을 제작하였지만, 1708년에 경북 포항 보경사 괘불도 중수에 사내질(寺內秩)에 언급된 것으로 보아 보경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조각승으로 보인다.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조각승이 거주 지역이나 사찰이 밝혀진 스님은 전남 고흥 팔영산 색난, 전남 순천 조계산 충옥, 전북 부안 능가산 일기, 전북 완주 위봉사 단응, 충북의 혜희와 마일, 경북 경주 승호(1640~1719경) 등이 추론이 가능하다. 이후 18세기 전반에 활동한 하천, 진열,  여찬 등이 대표적인 조각승이다.
 


 

독성탱(1974년).칠성탱(1907년)


 

신중탱(1974년)


 

건륭26년명 범종 乾隆二十六年銘梵鍾
조선후기 1761년에 장인 이만돌이 제작한 종으로 전한다.

용뉴 아래로 넓은 상대, 중대, 하대로 구획 되어 있다. 상대 상부에는 범어, 중앙부는 유곽과 9개 유두를 새기고 보살상을 표현하였다. 중대에는 여러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하대에는 특별한 문양이 없다.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양문규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산과 산 사이로 낮게 구름이 흘러가고

바람 속을 종소리 대신

소똥 묻은 새가 울고 간다

 

스님은 심장을 드러내고 계곡물 소리를 듣는다

서로 가는 것을 묻지 않고,

길이 끝나는 곳으로부터

소리들이 되돌아와 발 디디는 곳마다

종을 울린다

 

물은 흘러가는 것을 묻지 않고 계속 흐른다

 

마음 속의 관음觀音

종소리 아닌 종이 운다

 

절 밖

아름드리 은행나무,

 

큰 울음

나뭇등걸 속에 내장한 채

하늘을 떠받들고 서 있다

 

*영국사에는 범종이 남아 있지만 나는 시인이 노래한 범종의 의미를 모른다.

 

 

삼장탱(1992년)


 

 

산신각

 

 

 

삼층석탑

옛 절터에 도괴된 상태의 탑을 1942년 주봉조사가 현재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상하기단에는 안상이 조식되어 있으며 상기단 안상은 크고 넓다. 상기단 갑석 모서리에는 반전이 뚜렷하다. 탑신에는 양우주를 조출하였고, 1층 몸돌 정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와 문비를 표현하였다. 풍탁공이 남아 있는 옥개석 물매는 얕으며 처마의 반전은 심하다. 지붕돌 아래는 절수구를 두고, 받침은 각 4단이다.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초층몸돌 문비와 자물쇠. 옥개석의 4단 층급받침

 

 

상기단면석의 안상

 

 

4단 층급. 처마의 날렵한 반전. 풍탁공

 

 

 

영국사 은행나무

매년 무병장수와 풍년을 비는 당산제를 올린다

예전에는 정월대보름날 은행나무에 제를 올리던 풍습이 있었으나 1980년대 이후 맥이 끊겼다가 2010년 사찰에서 부활하였다고 한다.  전쟁 등 나라에 큰일이 터질 것을 미리 알리는 울음소리를 내는 등 영험한 기운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고래모양의 흔들바위

사찰에서 내려오다가 일주문에서 우측입 망탑봉 방향으로 진입하면 만난다.

 

 

망탑봉 삼층석탑

망탑봉 정상에 위치한 화강암반을 기단으로 삼았다. 기단(탑신 괴임?)에는 우주와 안상을 표현하였다. 초층몸돌과 탑신괴임이 일석이며 탑신에는 양우주를 모각하였다. 또한 초층 몸돌에는 위·아래가 돌출된 액자형 문비를 두었다. 지붕돌 낙수면 물매가 얕으며 처마의 반전은 희미하다. 옥개받침은 1층 5단,  2·3층은 3단이다. 상촉하관이 뚜렷하다

 

고려 중기 이전 산천비보 목적으로 조성된 탑으로 추정된다.


 

문비와 기단(탑신 괴임?)의 안상과 양우주

 

 

 

 

마을에는 어른이 계셔야 하고

절집에는

영국사 은행나무처럼 오래된 옛날이 살아 있어야 한다.

 

이제

노란 은행잎이 절정일 때 봉안되는 당산제를 기다려 보아야겠다.

 

2016.02.26

 

아래는

2007년에 다녀온 글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에 위치한 영국사는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신라 문무왕, 진평왕 때라는 설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하고 국청사라 하고 산이름도 천태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후 홍건적의 침입으로 남하하던 공민왕이 국청사에 들러 국가의 안녕을 빌었다고 하여 영국사(寧國寺)로 하였다. 행정구역상의 지명인 누교리도 왕의 영국사 출입을 도우기 위하여 칡넝쿨로 다리(橋)를 매달아서(紐) 유래하였다고 한다.

 

금강을 끼고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양산면 일원은 빼어난 절경으로 양산 팔경이 전해오며 영국사는 그중에서도 제 1경이다. 또한 신라와 백제의 싸움에서 전사한 무열왕의 사위 김흠운을 애도한 양산가의 무대이기도 하다.

 

신라 사람이 애절하게 불렀던 정확한 양산가는 전해오지 않지만 조선조 성리학자 김종직이  남긴 양산가 가사는 객관성을 잃고 다분히 승리자의 색채가 강해 보인다.

 

도야지 같은 원수의 나라 나의 조국을 침노하나뇨 
용맹스러운 화랑의 무리나라 위한 충정 어이 참으리 
창을 매고 내 집을 밀리 떠나와 풍참노숙 싸움터로다. 
무찌르던 어느 날 밤 놈들 칼날에 장하도다 나라 위해 목숨을 바쳤네 
돌이켜 바라보니 양산의 구름 타오르는 불기둥 살벌하고나
오호라 슬프다 우리 대장부 북쪽 원수 칼 끝에 쓰러지다니
천추에 빛나는 호국의 영령 길이길이 명복을 누리옵소서.

 

 

2005년 강한 바람을 타고 천태산을 삼키려는 듯한 화마를 티비 화면을 통해 지켜보면서 가슴 졸였던 기억이 새롭다.몇일 지난후 현장을 방문했던 기자가 올린 기사의 제목 "영국사야. 살아 있어 반갑다"에 느꼈던 가슴 찡한 감정을 되새기며 어둠이 쫓아오는 눈 쌓인 산길을 올라갔다.


 

이 길은 신라 김흠운 장군,백제 군사, 공민왕, 이름없는 초동급부도도 오르락내리락 했을 것이니 한시절 왕의 사위를 그리며 노래했던 사대부가의 양산가 보다는 양산지방에 입으로 전해오는 민요 양산가를 흥얼거리고 싶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모링이 돌아서 양산을 가세.
난들 가서 배 잡아 타고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잉어가 논다 잉어가 논다.
양산 창포장에 잉어가 논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자라가 논다 자라가 논다.
양산 백사장에 금자라가 논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장게가 논다 장게가 논다.
양산 수풀속에 무구리 장게가 논다.

 

발 뒷굼치까지 근접한 어둠이이지만 겨울을 품고 있는 장대한 폭포앞에서 한 숨을 고르지 않을 수 없다. 

동장군이 무색하게도 맨들맨들한 바위면이 마치 겨울날 반소매를 입은 여인을 보는 듯 하다.

 

잠시후 계곡의 어둠은 사라지고 하루의 마지막 햇볕을 듬뿍 즐기고 있는 영국사가 멀리서 웃음 짓는다. 영국사 영욕의 세월을 지켜본 500년 넘은 은행은 눈 내린 겨울산사 주위풍광과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어른 여러 명이 손을 맞잡아야 될 만큼 굵으며 국가의 큰 난이 발생하면 소리내어 울고, 아직도 이 년마다 많은 자식을 낳고 있다니 생명력, 종족 보존 능력에 경외심을 느낀다.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룬 결과겠지만 내눈에는 은행나무에 둘러쳐진 금줄이 먼저 눈에 들어 온다. 일주문도 천왕문도 갖추지 못한 산골 절집이기에 사악한 악귀를 물리치려는 소박한 스님들의 심성이 금줄로 표현된 것은 아닌런지?


 

최근에 단장한 만세루를 누하진입하여 대웅전에서 바라본 중정이다.

산속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햇볕을 넉넉하게 쬐고 있는 터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작년에 복원한 대웅전은 다포계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어칸을 활짝 열고 예불을 준비하든 스님이 땀에 젖은 나를 보고 "처사님 들어오셔서 쉬어 가세요"라고 했지만 산아래 주자창에 홀로 남겨둔 동행인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쉼은 사치겠지.


 

대웅전 뒤 옛절터에서 옮겨온 삼층탑으로 대웅전 과 일직선상이 아니다. 이런 이유는 풍수적 이유, 화재등으로 인한 금당터 이건 등 여러설이 있지만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1층 몸돌의 문비, 하층기단 면석의 안상, 상기단 면석 전체를 차지한  큼직한 안상이 독특하지만 특이점은 없는 신라 하대의 일반적 유형이다.


 

4개 옥개석 받침, 기단 갑석은 소리없이 기울어져 있고, 1층 몸돌 물쇠와 문고리가 선명히 돋을 새김되었다. 옥개석 경사는 완만하며 네 귀퉁이는 바짝 치켜올려진 모습이며 풍탁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일부 자료에는 상기단 면석이 잘못 복원되었다고 하였으나 반풍수 눈에는 오밤중이다. 혹 현재의 안상은 바로 잡은 모습인가?


 

어둠은 코밑까지 드리우고 있는데 팔각 원당형의  원각국사 부도는 커녕 공사로 다른 한 기의 부도도 찾을 길 없이 원각국사비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 주인공이 알려지지 않은 석종형 부도에 만족했다.  탑몸돌 위에는 상륜부에는 흔치 않은 형식의 보주가 있다.

 

 

하대석, 상대석 앙련 복련은 한 잎의 연꽃으로 새겨 고려하대 부도 유형을 간직하고 있다.


 

멀리서 바라본 현재 대웅전 뒤 영국사 본래 절터다.

밭으로 용도변경 되었지만 석축은 옛 자취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앉아있다.

 

 

원각국사 비석 귀부이다. 꼿꼿한 목에 힘줄이 강건한 인상이나 무거운  모습의 고려 귀부의 전형이다.

등에는 육각 귀갑문을 표현했으며 비좌에는 덩굴문이 남아 있다.

원각국사가 왕사임에도 귀갑에 王자를 새기지 않은 연유를 모르겠다.


 

"비석은 고려 의종 7년(1154)에 선사가 되었고, 명종 1년(1171) 9월 12일 왕사가 된 원각국사비 이다.
원각국사는 대선사 교웅의 밑에 들어가 아홉 살에 중이 되었다.

선사의 유골은 영국사에 모셔졌으며, 고려 명종 10년(1180) 한문준이 비문을 지어 원각국사비를 건립하였다고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상권에 그 전문이 소개되고 있다. 비몸돌(碑身)은 점판암 1장으로 되었으며, 비문은 총알을 맞아 손상된 곳이 많아 그 내용을 전부 알 수는 없다."...문화재청

 

귀부 뒤에 방치(?)된 이수이다. 네마리 용이 구름을 타고 있는 이수 중앙에 원각국사 전액을 넣었다.


 

내려오는 길에 오른 망탑봉 흔들바위로 크기가 6m, 높이 8m, 무게는 10여톤이라고 한다.

마치 고래가 입을 벌리고 헤엄을 치며 바다 위를 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혼자서 흔들어도 움직여서 흔들바위라고도 한다.



 

망탑봉 삼층 탑을 만나러 왔건만 오늘은 인연이 아닌가 보다.

 

다시 뵈로 오겠습니다. ()()()

 

2007.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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