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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광양시

광양...수월정.섬진진터 석비좌대

by 임병기(선과) 2017.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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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정水月亭

도사리 135-1. 매화마을로 잘 알려진 섬진마을  섬진나루에 자리한 정자             


수월정은 광양 출신으로 선조 임금 때인 1598년 나주목사를 지낸 정설(鄭渫)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정자 옆 유허비는 1971년 정설의 후손들이 수월정 옛터에 세웠으며, 지금의 수월정은 1999년 광양시에서 새로 지었다고 한다.


수월정기水月亭記


士大夫之進不得有爲於斯世。棄位而巷處者。必謀明山麗水之濱。池館苑囿之樂。一以爲淸閑寂寞之娛。一以抒憂時戀闕之懷。六一翁之於穎上。杜祁國之於睢陽。皆是已。前牧使光州鄭侯。年五十而棄於時。遂求先大夫玉川先生之別業於光陽。距先廬十里許而居之。選勝爲亭。以水月爲名焉。余觀夫南方之山。巍然高者以千數。而白雲爲最奇。南方之水。可行舟者以十數。而蟾江爲最大。以白雲之東麓爲屋山。而以蟾江之上流置屋下。則勝絶有不暇論也。而況天下之三神山。方丈居其一。煙火食人之生世間。聞方丈之名者亦罕矣。其於起居飮食。早夜相對者。何如哉。左嶺右湖。控引島蠻。商舡之所走集。市賈之所輻湊。岳陽朝嵐。鶴洞暮煙。躑躅成山。火雲成峯。霜落而千林紅。氷塞而長河白。千態萬狀。畢集於几席之下。則此水月之所以選勝也。兵火十年。文物一空。而水月則依舊也。世降俗末。人心不古。而水月則猶前也。市道日巧。一錢俱湧。而水月則無價也。棄枯集菀。門雀可羅。而水月則不遐也。逝者如斯而未嘗往也。盈虛者如彼而卒莫消長也。浮光躍金。靜影沈壁。水得月而益淸。月得水而益白。直與侯之胸采。上下乎同符。則此水月之所以得名也。余雖不獲登公之亭。而幸嘗竊誦公之歌。見公之書。已得水月之大槩。而若公之心則余固知之。於是乎書。


"사대부가 벼슬길로 나가 세상에서 더 이상 쓰임이 없으면 자신의 지위를 버리고 시골에서 묻히게 되는데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이름난 산과 아름다운 물이 있는 곳을 골라서 집을 짓고 자연의 즐거움을 누린다.

한 편으로는 맑고 한가하며 고요한 즐거움을 누리고 또 한편으로는 시국을 근심하고, 임금을 그리는 정을 드러낸다. 구양수(歐陽修)가 영산에 있었던 것과 두기(杜祈)선생이 휴양에 있었던 것이 모두 이와 같다. 전 나주목사로 본관이 광산인 정 현감은 나이 50에 세상에서 버려졌다.

선 대부 옥천선생(父:玉川先生)의 별서가 있던 광양에 자리를 잡았는데 조상의 여막과 40리 떨어져 있었다. 경치 좋은 곳을 골라 정자를 세우고 수월이라고 이름 하였다.

내가 남쪽의 산들을 쭉 살펴보니 우뚝하고 높은 산들이 수천이나 되었는데 백운산이 가장 기이하였다. 남쪽의 강으로 배를 띄울 수 있는 곳 역시 수천이나 되었었는데, 섬진강이 가장 컸다. 백운산의 동쪽 능선을 정자의 지붕으로 삼고 섬진강의 상류를 정자의 아래에 두었으니 경치의 빼어남은 논할 필요가 없다.

하물며 천하의 삼신산(三神山)가운데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지리산)의 한 줄기에 살면서 불을 때서 밥을 지어먹으며 이 세상에 사는 인간으로써 이 산의 이름을 들은 사람 역시 드물다. 여기서 살면서 음식을 해먹고 아침저녁으로 마주 대하는 즐거움은 어떠하겠는가? 왼쪽은 호남이고 오른쪽은 영남이라 섬과 산봉우리를 껴안았네.

오고가는 배, 구름은 날듯이 가고 새는 깃드네. 나루터를 낀 들판은 텅 비어있고 고기떼는 모여드네, 위천(渭川:황하로 흐르는 강) 넓은 땅에 대나무요 업수가의 붉은 꽃이라 학동(鶴洞)의 아침 아지랑이요, 악양(岳陽)의 저녁노을이라, 철쭉꽃이 산을 이루고 불타는 구름이 봉우리를 만드네, 서리 내리니 온갖 나무들 모두 붉고, 얼음 언 긴 강이 하얗다네, 천태만상이 모두 발아래 모여드니 수월정이 선택받은 명승지가 되는 까닭이다.

10년의 전쟁이면 문물이 모두 비게 되는데도 수월은 옛날과 같다. 세월이 지날수록 풍속은 나빠지고 사람들의 인심은 옛날과 다른데도 수월은 오히려 예전과 같다. 고루한 것은 버리고 예쁜 것에 모여드는 세태 따라 문전이 적막하니 수월은 멀지 않다.


세월 따라 가는 것은 모두 이와 같으나 수월은 간적이 없고 차면 비워지는 것이 저와 같으니 수월은 끝내 사라지거나 자라남이 없다. 달빛에 물결은 금빛으로 일렁이고 고요한 달그림자는 푸른 물결에 잠긴다. 물은 달을 얻어 더욱 맑아지고, 달은 물을 얻어 더욱 희여 진다. 이는 바로 정 현감의 가슴이 맑고 투명한 것과 같으니 수월이라고 이름 지은 까닭이다.

내가 비록 정 현감이 올랐던 그 정자에 오르지는 못하지만 정 현감이 지은 시가를 읊고 정 현감이 남긴 글을 보니 성글게나마 수월이 가진 의미에서 만분의 일이라도 알고 정 현감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다면 나는 진실로 알게 되는 것임으로 이렇게 쓴다. {위의 글은 1925년 발간 광양군지 수월정기비문 번역본"...출처/광양신문.조동래님


옛자료에는 "송강 정철은 수월정기(水月亭記)라는 가사를 지어 칭송했고, 수은 강항(姜沆)은 수월정 삼십영(水月亭 三十詠)이라는 시조를 지어 수월정과 섬진강 경치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현재는 수월정기도 강항이 지은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섬진진터


다압면 도사리 섬진마을에 위치하였던 섬진진은 하동과 연결되는 가장 큰 규모의 군사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뿐만 아니라 진상면에는 섬거역이 있었고, 다압면 신원리 원동에는 섬진원이 있어 섬진나루는 전라도와 경사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문헌상 섬진진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임진왜란 때이다.

호남진지湖南鎭地에 의하면 '처음 섬진에 군사를 배치한 사람은 이충무공으로 섬진의 건너쪽인 두치豆恥(置)에 조방군助防軍을 두어 이곳을 지키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희양지曦陽誌에 "임진왜란 후인 1603년 통영에서 이곳을 도청都廳을 설치하고 군사를 뽑기 시작하였으며,   정식으로 수군진을 삼은 것은 1705년으로 이곳에 종8품의 별장을 두었다"고 하였다.


별장의 직급을 언제 높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지도서에는 종6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섬진진에는 성이 축조되지는 않았으나 희양지曦陽誌에 서해관"誓海館"이란 집무청 및 창고 6채와 아사衙舍 등 8채의 집이 있으며, 병선으로는 방선 2척防船 2隻, 사후선 2척伺候船 2隻이 있었다.


또한 당시의 주둔군은 359명이었으며, 진鎭 주변에는 민가 88호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 당시 진은 폐쇄되고 없었으므로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없고 진이 폐쇄되기 이전인 1895년 이전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현재 진지鎭址의 유적상황을 살펴보면 수월정유허비 주위에 별장들의 공적비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는 비의 좌대 4기가 남아 있다. 또한 아사衙舍와 내아內衙, 진창과 작청, 군기, 장청, 성황당 터와 배를 묶는데 사용하였다는 선돌바위가 있다...출처/위키백과(한문 음차는 나의 해석으로 틀릴 수도 있음)


섬진진터에 좌대가 4기 남아 있으며, 본래는 17기가 있었다고 한다.

좌대는 수군 별장의 공적비 좌대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등 위에 비신을 세웠던 장방형 홈이 있으나 시멘트로 막아버렸다.

일반적으로 비석의 좌대는 귀부라 칭하며 거북이 상으로 조성하지만 섬진진터 좌대는 투박하고 간결하게 묘사한 두꺼비상이다.


 

 

 

 

 

왜 귀부가 아니라 두꺼비 좌대를 조성하였을까?


섬진마을에 구전되는 "섬진강" 이름의 유래가 된 두꺼비 전설 때문으로 생각된다.


"본디 이 강의 이름은 모래내, 다사강(多沙江), 두치강(豆置江)이었던 것이 고려 말부터 섬진강(蟾津江)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려 우왕 11년(1385년)에 왜구가 강 하구에 침입했을 때 광양 땅 섬거(蟾居)에 살던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가 이곳으로 떼 지어 몰려와 울부짖자 이에 놀란 왜구들이 피해갔다는 전설이 있다. 이때부터 두꺼비 섬(蟾)자를 붙여 섬진강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강항의 수월정삼십영 水月亭三十詠


제10영 서산낙조 西山落照


미양렴렴백운간 微陽瀲瀲白雲間 흰 구름 사이로 뉘엿뉘엿 지는 해가 
원소분명입란산 遠燒分明入亂山 멀리 노을 진  산 사이로 넘어가네 
원재주서군막도 元在住西君莫道 원래 해는 서쪽에 머물지 않고 
야조환왕자순환 夜朝還往自循環 아침 저녁 돌고 돌아 다시 떠오른다. 


(개인적인 의역 입니다)


2017.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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