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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광양시

광양...백계산 옥룡사지 석탑재. 탑비전

by 임병기(선과) 2018.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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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옥룡사지

사적 407호.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303번지 일원

 

 

주차장에서 절터로 향하는 길

 

사지보다

옥룡사지 동백림으로 더 널리 알려진 관광명소이다

 

 

 

동백나무 군락

옥룡사를 창건한 도선국사가 지세를 비보하기 위하여 동백숲을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7천여 본의 동백나무가 사지 주변에 넓은 군락을 형성하고 있으며 3월말이면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사지가 보인다.

사진을 담지 못했지만 우물지 지붕 옆이 옥룡사 연기설화에 나오는 연못터가 복원되어 있다.

 

옥룡사 연기설화

"신라말에 도선이 상 백운암에서 종이로 학을 접어 날렸더니 백계산의 큰 못에 떨어졌다. 그 못에는 청룡과 백룡이 살고 있었다. 도선이 이번에는 활을 쏘자 청룡은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백룡만 남아 버티다가 거듭 쏜 화살에 눈을 맞고서야 승천하였다. 도선은 그곳에 옥룡사를 세우고 백씨 성을 가진 스님은 절대로 들이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 뒤에 성명부지의 한 중이 들어왔는데 절이 불이 나서 타버렸다. 그 중은 성이 백씨였고, 그 재난은 백룡이 꾸민 보복이었다는 이야기다."...광양시청

 

우리나라 많은 사찰에 전해오는 설화와 비슷하다.

이를 통해 불교 전래 이전 민속 고유신앙이 있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옥룡사玉龍寺

 

창"건과 관련해서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징성혜등 탑비문光陽 玉龍寺 先覺國師 證聖慧燈 塔碑文에 광양현백학사曠陽縣 白鷄山에 옛절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옥룡사玉龍寺였다. 스님께서 유력遊歷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그 경치가 유승幽勝함을 좋아하여 당우堂宇를 개수하고, 시원하게 여겨 이곳에서 정진하다가 임종臨終할 곳으로 뜻을 굳히고, 명좌宴坐하여 망언妄言하기를 무려 35년 동안 하였다.’라고 기록되
어 있으며, 신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864년(함통咸通5년)에 도선道詵이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872년에 간행된 호남읍지湖南邑誌의 기록을 통해 존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폐사와 관련해서 광야읍지光陽邑誌에는 ‘폐사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옥룡사는 9세기 중반에도 법등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19세기 말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한국의 사지

 

(한문의 음은 개인적으로 해석하여 틀릴 수도 있다.)

 

 

 

 

사지는 5차례의 발굴조사가 있었다.

1차와 2차 발굴조사에서는 탑비전지와 관련 건물지, 조선시대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조사당시 탑비전지에서는 승탑재들과 탑비편이 발견되었다. 3차 발굴조사에서는 사역의 경계가 확인되었고, 4차 발굴조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연못지 및 조선시대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5차 발굴조사에서는 1960년에 조성된 옥룡사 관련 건물을 철거한 후 해당 지역에 대해 조사한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건물지 17개소와 석축 4개소 등이 확인되었다....한국의 사지

 

 

사진 출처/현장 안내문

 

 

사진 출처/ 현장 안내문

 

옥룡사(), 성화십이년병신(), 만력십칠년기축(), 송치() 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 분청사기, 순백자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사진 출처/ 현장 안내문 

 

1, 2차 발굴조사에서는 출토된 승탑제와 탑비편으로 보아 주변 건물지가 승탑을 보호하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승탑편과 탑비편은 특성상 나말여초의 것으로 판단되어 범우고梵宇攷에 기록된 도선국사와 동진대사의 승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초

 

 

석주, 탑재

 

 

상층기단 중석

양우주(사진의 면석에는 우주 1주만 모각)와 탱주 1주가 모각되었을 것으로 추정.

현재 우주로 판단하면, 2층 기단의 석탑이며, 상층기단 중석은 엇물림으로 결구 되었음을 알수 있다.

 

 

 

탑신.옥개석

 

 

옥개석

낙수면 물매가 급하고, 상부에는 각형 1단 괴임을 조출하였다.

 

 

옥개석

층급받침은 각형 3단으로, 처마에서 깊게 새겼으며, 절수구는 생략되었다.

 

 

 

탑신

통돌이며, 양우주를 모각한 초층탑신으로 추정된다.

 

 

 

조성시기

고려 중기 이전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석등 간주석,청수대 간주석. 누하주...

정확한 용도는 개인의 몫으로 돌린다.

 

 

 

 

 

탑비전지

사지 향좌측 언덕 너머 위치, 2002년 복원

 

"도선과 경보의 부도와 탑비가 있던 ‘비석거리’라고 불리는 탑비전(殿)터에서 부도를 보호하였던 2채의 건물터가 노출되었다. 이 건물터는 현재 전하는 최초의 신라 말~고려 초의 부도전(殿)으로 조사되었다. 곧 도선의 부도전에서는 8각 바닥돌 아래 석곽石槨에서 길이 95㎝, 너비 54㎝, 높이 48㎝인 돌로 만든 관이 출토되었는데, 관 안에서는 인골()이 물 속에 잠겨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인골은 두개골에서 척추와 골반까지 원형대로 가지런히 놓였고, 척추 좌우로 대퇴골, 비골 등의 하지골과 상완골, 요골 등의 상지골이 놓였다. 인골의 상태로 보아, 도선의 유해는 화장()을 하지 않고 우리의 전통 장법 가운데 2차장인 세골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선의 업적을 기록한 징성혜등탑비()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파손되지 않은 채 묻혔거나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경보를 기리기 위해 세운 보운탑비()는 조각이 100점 이상 발견되어 산산이 깨진 것으로 짐작된다."...한국의 사지

 

 

동진대사 탑비 958년(광종9년)와 부도

보(洞 , 869( 9)~947( 2))의 . . () () () .

 

비문...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찬찬히 일독 하면 익숙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고려국(高麗國) 광주(光州) 희양현(晞陽縣) 고(故)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 동진대사(洞眞大師) 보운탑비문(寶雲塔碑文)과 아울러 서문. 통직랑(通直郞) 정위(正衛) 한림학사(翰林學士) 사단금어대(賜丹金魚袋) 신(臣) 김정언(金廷彦)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제자(門弟子) 사문(沙門) 신(臣) 석현가(釋玄可)는 교지에 의하여 글씨를 쓰다.


공손히 생각해 보건대 법신(法身)은 동(動)과 적(寂)인 양면이 있고, 도체(道體)란 희(希)하고 이(夷)하여 중생세계 중에 성인(聖人)을 보는 마음을 달아 놓고, 사바세계에 인(仁)을 구하는 생각을 걸어 놓았다. 대웅(大雄)께서는 서축(西竺)에 태어나셨고, 그 진법(眞法)은 동방으로 전래하였다. 이로부터 강회승(康僧會)는 오(吳)나라에서 전법하고, 마등대사(摩騰大師)는 한(漢)나라로 와서 부처님의 밀인(密印)을 가지고 선백(禪伯)의 깊은 종지(宗旨)를 연창하였다. 드디어 불법을 배우게 하여 중생을 교화하며, 선(禪)을 익히게 하여 세속을 구제하였으니, 보월(寶月)이 능가산 위에 떠오름에 조용히 금인(金人)을 생각하게 하였다. 현주(玄珠)를 적수(赤水) 중에 찾았음은 오로지 망상(罔象)에 의거하는 것과 같았으니, 이는 묵묵함을 말미암은 것이고, 다만 심중에만 있을 뿐이다. 목경(目鏡)을 찾으려고 서쪽으로 유학하여 중묘(衆妙)를 터득하였고, 심주(心珠)를 갈고 닦아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뭇 중생을 교화하였으니, 석문(釋門)풍구(風丘)에 높이 열렸고, 현도(玄道)진역(震域)에 크게 중흥하였다. 불(佛)이란 깨달았다는 뜻으로, 그를 스승 삼아 수행(修行)하는 것이니 대사(大師)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 하겠다.


법휘는 경보(慶甫)요, 자(字)는 광종(光宗)이며, 속성은 김씨로서 구림(鳩林) 출신이다. 아버지는 익량(益良)이니 관위는 알찬(閼粲)이었다. 오산(鰲山)이 내린 악령(岳靈)을 받아 광화(光華)의 여경(餘慶)을 육성하였고, 계림에서 탄생하여 혁엽(奕葉)으로 더욱 아름다움을 드날렸다. 어머니는 박씨(朴氏)이니 품행은 풀잎에 나부끼는 맑은 바람과 같이 우아하고, 마음은 꽃잎에 매달려 있는 이슬과 같이 투명하였다.

 

궁중에서는 왕의 수라상에 대한 뒷바라지에 정성을 다하였을 뿐만 아니라 궁 안에서 왕비를 도와 내화(內和)를 도모하였으며 이로부터 가문이 크게 창성하였다. 함통(咸通) 9년 상월(相月) 재생명(哉生明)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흰 쥐가 푸른 유리구슬 1개를 물고 와서 사람의 말을 하되 “이 물건은 희대의 진기한 보물이니, 바로 현문(玄門)의 상보(上寶)이다. 가슴에 품고 호념(護念)하면 반드시 빛나는 광명이 나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임신하였는데 항상 마음을 맑게 하여 재계하다가 음력 4월 20일에 탄생하였다.

집안에는 한치의 땅도 없었으나 초년(髫年)에 이르러서부터 가산이 일기 시작하였으니, 이는 전생에 이미 법아(法牙)를 닦았고, 승과(勝果)를 역수(逆修)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아이들과 노는 가운데 있으나, 오히려 동년(童年)의 위에 있었다. 나이 유학(幼學)의 시절이 되어서는 책을 메고 학당에 들어가려는 마음이 있었으며, 덕은 노성(老成)한 사람보다 귀하였다. 이미 불교에 출가 수도하려는 뜻을 품고는 이친(二親)에 고하되 “세상의 진노(塵勞)를 여의고 출세간(出世間)인 불지(佛地)에 오르는 인연을 닦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비록 혜가(慧柯)의 재질(才質)은 부족하나, 오직 불법의 동량이 되기를 기약하는 마음은 굳게 다짐하였다”라고 여쭈었다. 이 말을 들은 부모는 말없이 탄식하고 “기인(己仁)을 이루고 물지(物智)를 이룩하여 이미 내외(內外)의 도(道)에 합하였다”면서 “네가 출가하려는 뜻은 좋으나, 너와 헤어짐은 슬프고 또 슬픈 일이라”하자, 대사가 “뜻은 부모의 곁에 있으나, 마음의 약속은 부처님 앞에 있습니다”라 하였다.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의 원하는 바를 하늘도 따라 주는 것이거늘 내 어찌 아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아버지로서 거역할 수 있겠는가”하고 드디어 울면서 허락하였다. 대사는 곧바로 부인산사(夫仁山寺)로 가서 삭발하고, 경전을 배우는 강원으로 들어가 교리를 배웠다. 선산(禪山)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빠른 걸음으로 행각(行脚)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느 날 밤 꿈에 금선(金仙)께서 이마를 만지며 귀를 잡고 방포(方袍)를 주면서 “너는 이 가사를 입어야 하니 그 까닭인 즉 앞으로 이를 몸에 두르고 수행(修行)하되 그 기회를 놓치지 말라.

 

이곳은 심학자(心學者)의 참선하는 곳이 아니다. 곧바로 떠나가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하거늘 대사는 잠을 깬 다음, 깊이 생각하되 “이는 앞으로 내가 수도의 길을 떠날 조짐으로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어찌 가만히 앉아서 때를 기다리겠는가”하고, 입산하는 행장을 꾸려 마치 새처럼 집을 나와 백계산(白鷄山)으로 나아가 도승화상(道乘和尙)을 배알하고 간청하되 제자가 되어 보살도를 닦아 여래의 집에 들어가서 오묘한 진리를 보는 지혜의 눈모든 사물(事物)의 근원을 아는 마음을 열도록 지도를 간청했다. 이미 깨달은 것은 지혜(智慧)가 아니며, 그 불법(佛法)을 옹호할 수도 없으니, 오직 계율(戒律)이 아니면 비위(非違)를 막을 수 없다하여 열 여덟살 때, 월유산(月遊山) 화엄사(華嚴寺)에서 구족계를 받고는 인초(忍草)에서 싹이 돋고, 또한 부낭(浮囊)을 굳게 지니 듯하여 계향(戒香)의 향기로움을 더욱 퍼지게 하였고, 마음을 돌과 같이 견고히 하였다.

 

그 후 여러 해 동안의 좌우(坐雨)인 하안거(夏安居)를 마치고, 운수행각(雲水行脚)을 하다가 다시 본사인 백계산(白鷄山)으로 가서 도승(道乘)스님을 뵙고 하직 인사를 드렸더니, 도승대사가 이르되 “너의 뜻을 꺾을 수 없으며, 또한 자네의 굳은 의지를 막을 수가 없구나! 너는 나를 동가(東家)의 구(丘)로 삼으려 하였으나, 나에게는 그러한 지도 능력이 없으니 어찌할 수 없다”하고 웃으면서 심사방도(尋師訪道)의 길을 떠나기를 허락하였다. 그로부터 제방(諸方)으로 행각하되 배움에 있어 일정한 상사(常師)를 두지 아니하고, 성주사의 무염대사(無染大師), 굴산사의 범일대사(梵日大師) 등을 차례로 친견하여 법문을 듣고 현기(玄機)를 깨닫고 생각하기를 ‘옥을 캐고 구슬을 탐색하듯 도(道)가 어찌 먼 곳에 있겠는가. 행하면 바로 그 곳에 있다’고 하였다.

 

드디어 경복(景福) 원년(元年) 임자년 봄에 훨훨 산을 나와 바람처럼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유학할 마음을 굳혔다. 마침내 선장(船長)에게 간청하여 편승(便乘)을 허락받아 기꺼이 동행하게 되었다. 기꺼이 동행하게 되었다. 주교(奏橋)를 지나 한(漢)나라에 이르렀다. 운수(雲水)의 마음으로 도를 묻고 여기 저기 선지식을 찾았다. 무주(撫州)소산(踈山)으로 가서 광인화상(匡仁和尙)을 친견하였다. 광인화상이 말하되 “너는 큰 바다용이 되고자 하는가” 화상(和尙)이 현언(玄言)을 드날리면서 비설(秘說)을 묻고는 곧 승당(昇堂)하게 하여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 바야흐로 목격도존(目擊道存)의 심인(心印)을 깨달아 이심전심의 정법안장을 전해 받았다. 광인화상(匡仁和尙)은 크게 기꺼워하면서 “중국 법통이 해동으로 흘러간다는 설과 서학(西學)을 위하여 중국에 와서 유학하는 구도자 중에 가히 더불어 도(道)를 논할 만한 자는 극히 드문 일이었으나, 동인(東人) 중에 목어(目語)할 만한 사람은 오직 자네를 제외하고 또 누가 있겠는가” 하였다. 손을 잡아 법등(法燈)을 전하고 마음을 통하여 심인(心印)을 전해 준 다음, “그대는 반조산(盤桃山) 곁에서 불일(佛日)을 도와 다시 중흥하고, 해우(海隅)국민을 잘 순화시키는 한편 선법(禪法)으로 인도하여 다시 넓힐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그로부터 훌륭한 큰스님은 반드시 찾아가서 친견하고, 환경이 절묘한 성지(聖地)는 남김없이 참배하였다. 강서(江西)로 가서 노선화상(老善和尙)을 배알하고 그의 법문을 들으며, 그의 수행담을 듣고자 하였다. 화상(和尙)이 묻되 “백운(白雲)이 행인(行人)의 길을 봉쇄하며 차단하였구나” 대답하되 “스스로 청소(靑霄)인 공중 길이 있거늘, 백운(白雲)이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화상은 대사의 변재가 민첩하여 조금도 걸림이 없이 자재하게 답함을 보고,인가하여 법을 전해주고는 “남을 이롭게 할 자신이 생긴 연후에 떠나도록 하라”고 말씀하였다. 대사는 대붕새는 반드시 남명(南溟)에서 변하고, 학은 모름지기 동해(東海)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화이(華夏)에서의 구법을 마치고 상진(桑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였다.

 

마침 본국으로 돌아오는 배를 만나 천우(天祐) 18년 여름 전주 임피군(臨陂郡)에 도착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거리에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못할 정도의 위험한 시기였다. 그 당시 주존(州尊)인 도통 태부견훤(太傅甄萱)군대를 통솔하여 만민이 보호하는 방벽의 언성(堰城)이었다. 태부는 본시 선행을 쌓아 장군의 집안에 태어났으니 바야흐로 웅대한 뜻을 펴기 시작하였다. 비록 일단은 대사를 체포하였다가 석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스님의 자안(慈顔)으로 접근하였으나, 존경하는 마음만 더욱 돈독해졌다. 그리하여 찬탄하되 “우리 스님을 만나기는 비록 늦었지만 제자가 됨을 어찌 늦추겠는가”하면서 모시는 태도가 정성스러우며, 존경하는 마음 또한 돈독하여 전주의 남쪽 남복선원(南福禪院)에 주석하도록 초청하였다. 대사가 말하되 “새들도 장차 쉬고자하면 나무를 선택함이거늘, 난들 어찌 포과(匏瓜)처럼 매달려서만 있으리요”라 했다.

 

그리고 백계산(白鷄山) 옥룡사로 갔다. 과연 그 곳은 편안히 수도할 수 있는 청재(淸齋)이며, 또한 조용히 참선하기에 알맞는 성지였다. 구름은 계상(溪上)에 덮여 있고, 돌을 베고 누워 흐르는 시냇물을 양치질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그러나 드디어 태부(太傅)의 초청을 받아 들여 그 곳으로 이주하기로 하였으니 실로 뗏목은 이미 귀당(歸塘)에 버렸고, 구슬은 다시 구포(舊浦)로 되돌아 왔다고 하겠다.


자비로 집을 삼아 중생을 교화하던 옛 스님들의 자취를 밟았으며, 지혜(智慧)의 횃불을 높이 들어 육도(六途)의 혼구(昏衢)를 비추어 군생을 구제하던 고승(高僧)들의 여휘(餘揮)를 계승하였다. 이 때 절학자(絶學者)들이 서로 경축하면서 말하되 “비록 년전에는 태산이 무너진 탄식이 있었고, 오늘에는 대중들이 앙모할 대상이 없다는 슬픔이 없음을 기뻐하도다”라 하였다. 이제 존경하며 따르는 문도(門徒)가 번창하고 법문을 들으려고 찾아오는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대사는 24년 동안 운수생활(雲水生活)을 하면서 후생(後生)을 지도하였으니, 마치 거울이 물상(物象)을 비추되 전혀 피로함이 없으며, 범종(梵鍾)이 언제나 치기만 하면 울리는 것과 같이 수문수답(隨問隨答)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조리 있고 정연하게 부상(扶桑)의 백성을 교화하였다.

 

청태(淸泰) 3년 가을에 이르러 우리 태조 신성대왕(神聖大王)께서 몸에 갑옷을 입고 손에는 한검(漢劍)을 잡아 공손히 천벌(天罰)을 행하되 해우(海隅)를 괴롭히는 자는 모두 소탕하고 삼한(三韓)을 협화(協和)하였으므로 이에 사군(四郡)이 다시 태평한 군자국이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 또한 깊이 신봉하였다. 대사께서 서토(西土)에 가서 유학한 후 귀국하여 남산(南山)에 은거하고 있었으나, 전혀 불편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환구(寰區)를 복되게 하였다. 이 때 태조께서 청풍(淸風)을 바라보고 백월(白月)을 첨앙하듯 숭앙(崇仰)해 마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급히 지검(芝檢)을 보내 옥경(玉京)으로 초빙하였다. 눈으로는 대사가 개경으로 왕림함을 보았고 귀로는 용이 변화함을 들었다. 비록 승가(僧伽)에 귀의하는 의례(儀禮)이나 마치 부처님을 받드는 의전(儀典)과 같이 하였다. 대사는 달이 하늘을 지나가고 구름이 푸른 산 바위틈으로 돌아가듯 조금도 걸림이 없고 적적(寂寂)하게 보광(葆光)을 세상 밖으로 비추었고, 현현(玄玄)하게 역중(域中)에서 교화를 행하였다. 이른바 엄숙하게 위엄을 보이지 않으나 함이 없어도 스스로 다스려져 선도(善道)로 나아가고, 함께 복문(福門)으로 출입하도록 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태조 임금이 승하하였다. 마치 고기가 수조하(水藻下)에 편안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어서 나라에는 하늘이 무너진 듯 탄식하였고, 함지(咸池)에는 일잠(日蘸)의 빛도 없는 듯하다. 의공대왕이 즉위하여 부왕(父王)의 유풍을 받들고 선지(先志)를 계승하여 정성스러운 마음을 미미(亹亹)하며 법력을 빌어 자자(孜孜)하다가 문득 세상을 버리고 이미 천상(天上)으로 돌아가셨다. 이어 문명대왕왕위올라 중광(重光)으로 꽃을 엮어 천축의 교풍(敎風)인 불교를 널리 퍼뜨리고, 거울을 잡아서는 해방(海邦)의 풍속을 비추어 순화시켰다. 왕은 봉필(鳳筆)을 보내 스님을 왕궁으로 초빙하였고 중헌(衆軒)으로 내려와 친견하였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 용집(龍集) 협흡(協洽) 4월 28일에 대사께서 열반에 들고자하여 목욕한 다음, 대중을 방 앞에 모아놓고 유훈하되 “나는 이제 떠나려하니 대중들은 잘 지내도록 하라. 진속(塵俗)에는 귀천이 있으나 공문(空門)에는 높고 낮음이 없는 법이니, 수월(水月)처럼 마음을 맑게 하고 연하(煙霞)와 같이 고상하게 살도록 하라.


 

옷은 계절에 맞추어 갈아입지 말며, 음식은 두 가지 이상 하지 말며, 마땅히 고사리 등 풀뿌리를 캐어 식량을 삼고 선열(禪悅)로써 포식을 삼을 것이니, 이렇게 하여야 나의 제자이며 또한 나의 원에 적합할 것이요. 그 밖에 나의 도(道)에 무슨 별다른 관행(觀行)이 따로 있겠는가”라 하였다. “또한 나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으니, 너희들은 내가 죽거든 탑으로써 나의 유체(遺體)를 간직하거나, 비를 세워 행적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또한 마땅할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만이 나의 현복(玄福)을 짓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방(房)에 들어가 승상에 기대어 가부좌를 맺고 앉아 엄연(儼然)하게 옥룡사상원(玉龍寺上院)에서 입적하였다.


 

슬프도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의 나이는 80세요, 보살계를 받은 지는 62하(夏)였다. 이날 아침 현무산(玄武山) 산정에 4~5명의 젖먹이 어린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태양은 향정(香庭)에 처참하게 비추고 바람은 보찰(寶刹)을 슬프게 하며, 송백나무 또한 슬픈 빛을 띠었고, 인령(人靈)은 떨면서 두려워하는 소리를 내었다. 다음 날 영구를 백계산으로 옮겨 모시고 돌로 감실(龕室)을 만들어 시신을 그 안에 모셔 봉폐(封閇)하였다. 문명대왕(文明大王)이 부음을 듣고 슬픔을 금치 못하여 미리 살피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서(弔書)를 보냈다. “고옥룡선화상(故玉龍禪和尙)은 조각달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고고하고, 고운(孤雲)이 한가롭게 날아가는 것과도 같이 조용하셨다.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보배로운 불교를 배우고 동국(東國)으로 돌아와 그 법을 전파하니 자비스러운 바람은 만리의 변방까지 불었고, 선정(禪定)의 밝은 달은 구천(九天)의 밖에까지 비추었다.

 

이와 같은 분은 오직 우리 통진대사 뿐이시다” 그러므로 시호를 동진대사(洞眞大師), 탑호는 보운(寶雲)이라 추증하고, 국공(國工)을 시켜 돌을 다듬어 탑을 세우도록 하였다. 시공한 지 2년 후 문도들이 감실을 열고 신구(神軀)를 보니 얼굴이 생전과 같아서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울면서 색신(色身)을 옮겨 백계산 동쪽 구름 덮인 바위 위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왕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주위의 환경은 노을이 덮인 뫼가 병풍처럼 청룡과 백호로 둘러 있고, 구름이 자욱이 덮인 시냇물은 마치 거울과 같이 맑다. 진실로 위인을 길러내는 신구(神區)이며, 진리를 세계로 돌아가는 비택(秘宅)이 될 만하였다. 대사는 계족산에 들어가 멸진정에 입정(入定)하여 자씨(慈氏)인 미륵불의 출세를 기다림과 같으니 스님의 추모사업을 내가 하지 않으면 다시 누가 하겠는가”라 하였다. 대사의 신기한 자태는 선천적으로 자연스러웠다

 

인행(仁行)은 스스로 실천하고, 덕행(德行)은 남에게 나누어주었다. 문하에 선객(禪客)은 신신(莘莘)하고 법손(法孫)은 제제(濟濟)하였다. 심등(心燈)은 계속 타올라 꺼지지 아니하였고, 행동은 아름다움을 전하였다. 전법제자인 큰 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천통선사(泉通禪師) 등이다. 그들은 아픈 마음을 쥐어 잡고, 열반 직전에 보았던 스님의 얼굴을 추모하면서 서로 의논하되, 우리가 선사(先師)의 유언만을 고수하고 그를 지키기 위해 만약 비석을 세워 훈적(勳跡)을 새겨 두지 않으면 선사(先師)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고 여겨 비를 세우기로 하고, “존조(尊祖)하는 일로써 대사의 행장을 모아 왕에게 표장(表狀)을 올려 유부(幼婦)의 문장(文章)을 지을 수 있는 자에게 명하여 선사(先師)의 업적을 기록하는 비문을 짓도록 청하였으니 어찌 호곡하면서 슬퍼만 하랴” 하고, 급히 비석을 세우는데 온 힘을 다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돌아가신 스님을 추억하니 문인(門人)들은 스님께서 백계산 기슭에 자취를 감추어 다시 친견할 수 없음을 슬퍼하며 땅을 치며 애통해 하다가, 다시 혜원법사가 여산 동림사에 있는 호계(虎溪)에 자취를 감추었던 일을 기억하였다. 이러한 소문이 낱낱이 임금에까지 들렸다. 곧 우리 상(上)이신 정종임금께서는 경악(瓊蕚)을 이어 받았을 뿐 아니라, 경사스럽게 요도(瑤圖)를 승습하여 조업(祖業)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선조(先祖)의 가풍을 빛나게 하고 항상 백행(百行)의 근본인 효도의 정성을 다하는 한편, 삼보에 귀의하는 마음 더욱 돈독히 하신 분이었다.

 

드디어 한림학사인 신(臣) 김정언(金廷彦) 저에게 명령하시되 “고옥룡대사(故玉龍大師)는 몸을 가짐에 있어서는 강한 절제력이 있었고, 심학(心學)의 도(道)는 그 끝이 없었다. 중국에 가서는 가섭(迦葉)의 현종(玄宗)인 선법을 전해 왔고, 청구(靑丘)인 본국에 돌아와서는 퇴폐한 풍속을 순화하였으니, 능히 정리(靜利)로써 인세(人世)를 이익하게 하였으므로 국민들에게 끼친 그 공적은 막대하여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대사의 은혜를 보답하고자 모름지기 외손제구(外孫虀臼)의 비문을 지어 그 위업이 무궁토록 전하려 하니 자네는 마땅히 훌륭한 문장으로 대사의 공훈을 적어 비석에 새겨서 현종(玄蹤)을 세세(世世)에 전해 보이며, 빛나는 행적을 생생(生生)에 드러내도록 하라”하시었다. 신(臣)이 폐하의 명을 들으니 땀이 흐르고 뼈에 사무쳤다.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한 다음, “신(臣)은 붓을 잡을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절묘(絶妙)한 문장으로 비문을 짓는 일을 감내할 수 없습니다. 마치 공중에 드리워 진실을 분간하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오니, 청컨대 하명(下命)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하였다.

 

상(上)이 이르되 “대저 사람은 의(義)를 의지하여 행할 것이며, 인(仁)을 당하여는 사양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하였다. 신(臣)은 하는 수 없이 왕의 명을 받아들였으나, 용기를 다른 사람에게 끼쳐 줄 만한 여력이 없다. 후일 이 비문을 보는 사람들에게 공연히 빈축이나, 비방함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니, 마치 서투른 목수(木手)가 손을 다칠까 두려워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주상의 강하신 명령이 몸을 베어 내는 것과 같았기에 드디어 떨리고 뛰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억지로 붓을 잡게 되었다.

 

이상 비문의 뜻을 거듭 선양하려고 게송으로 읊는다.

불타(佛陀)의 교리는 심오하고도 미묘하며 달마의 선지(禪旨)는 공(空)하지 않음이 없네!
도(道)가 어찌 우리들의 마음밖에 있으랴! 부처란 본시 중생의 심중에 있다네.
지혜의 햇빛은 모든 중생 비춰주고 진리의 강한 바람 무명(無明)을 흩어준다.
일찍이 내가 부처임을 깨달은 이는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 우리 스님뿐이라네!

(其一)


높고 넓은 스님의 덕은 풀잎과 같고 마치 우담발화의 꽃봉오리와 같아
깊고도 아름다운 스님의 지혜광명 글로나 말로선 표현할 길이 전혀 없다.
무주(撫州)의 소산(疏山)에서 광인(匡仁)의 법 이어받고정법안장(正法眼藏) 소중히 해동으로 전해 와서
그 덕망 앙모하여 사방(四方)에서 모여들어 문 앞에는 삼대처럼 긴 열이 섰도다.

(其二)


스님의 도덕을 말로는 설(說)할 수 없어 현묘(玄妙)하고 또 현묘하여 비할 데 없다.
사람을 교화(敎化)함은 태양처럼 혁혁하고,불도(佛道)를 홍포(弘布)함은 허공같이 끝이 없네.
때때로 임금과 신하들이 함께 만나서 지극한 마음으로 설법을 경청하였네!
더 높은 그 명성을 견줄 사람 전혀 없고 위대하신 그 업적 앞에서 비추고 있네!

(其三)


자비와 위력으로 중생을 제도하여 드넓은 이 세상에 이타행(利他行) 쉬지 않았네!
열반에 드시니 달은 선정(禪庭)에 떨어졌고,치솟은 산봉오리 성지(聖地)를 무너뜨렸네!
화려한 문장(文章)으로 비문을 지었으니 개성(芥城) 이 끝나더라도 이 비는 남아 있어,
비록 내가 지은 비문 부끄럽긴 하지만 그러나 오로지 사실만 직필(直筆)하였을 뿐.

(其四)


현덕(顯德) 5년 세차(歲次) 돈양(敦䍧) 8월 15일 세우고,문생(門生) 석계묵(釋繼黙)은 글자를 새기다.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

 

 

선각국사 도선비先 詵 碑와 부도.

 

1173년(명종3년) 건립.

[ : 827( 2)~898( 2)] . () () () () 1173 .

2002년 복원

 

선국사비문(출처/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해동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贈諡 先覺國師) 비문과 아울러 서문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대위(守 大尉)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자사 집현전대학사 판상서 형부사 감수국사 상주국 신 최유청(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集賢殿大學士 判尙書 刑部事 監修國史 上柱國 臣 崔惟淸)이 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조산대부 상서 예부시랑 한림시독 학사 지제고 사자금어대 신 정서(尙書 禮部侍郞 翰林侍讀 學士 知制誥 賜紫金魚袋 臣 鄭叙)는 조칙을 받들어 비문을 쓰다.

의종 임금께서 보위를 이은지 4년째되던 10월 신유에, 臣 惟淸에게 조칙으로 명하여 이르기를, 선각국사는 도덕이 고매할 뿐 아니라, 국가에 대한 공업도 가장 많아서 우리 조종께서 여러 차례에 걸쳐 법계(法階)를 봉증(封贈)하였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대사에게 존중함이 지극하였다. 그의 성덕과 대업을 아직 비문으로 전하지 못한 것을 짐이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인고(仁考)께서이미 경에게 命하여 비문을 찬술케 함은 그것은 곧 국사에 대한 지극한 공경을 표한 것이다. 신이 왕명을 받고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물러나와 그 행장 자료를 살펴 사실의 자세한 내용을 얻고는 차례로 기술하였다.


 

스님의 휘는 도선(道詵)이요, 속성은 김씨이며, 신라국 영암 출신이다. 그의 세계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史事는 유실하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태종대왕서얼손 이라고도 하였다. 어머니는 姜氏니, 어느 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明珠 한 개를 건네 주면서 삼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임신하여 만삭이 되도록 오신채(五辛菜)와 누린내 나는 육류(肉類)는 일체 먹지 아니하고 오직 독경과 염불로써 佛事에 지극하였다. 태어난 후, 유아시기부터 일반 아이들보다 특이하였다. 비록 어려서 희희(嬉戱)하거나, 우는 때에도 그의 뜻은 부처님을 경외함이 두터웠다. 그리하여 부모가 그는 반드시 불법을 담을 만한 그릇임을 알고, 마음으로 출가를 허락하기로 하였다. 15살이 되었을 때, 이미 영오(穎悟)하고 숙성할 뿐 아니라, 기술과 예술에까지 겸비하였다. 드디어 머리를 깎고 월유산 화엄사에 나아가서 大經을 독습하여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미 大義를 통달하였다.


 

문수의 妙智와 보현의 玄門에 모두 契入하여 남음이 없었다. 百千이나 되는 학도들이 모두 해안하여 神聰이라 하였다. 문성왕 8년 20살 때에 이르러 홀연히 스스로 생각한 나머지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교법을 여의고 스스로 靜慮하여야 할 것이어늘 어찌 능히 움직이지 않고 올올(兀兀)하게 문자에만 고수하고 있겠는가." 이때 혜철대사가 密印을 서당지장(西堂智藏) 禪師로부터 전해받고, 귀국하여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대안사에서 開堂하여 연설하고 있었으므로 법을 구하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스님도 선문에 구의(摳衣)하여 제자가 되려고 청하였다. 혜철대사가 그의 총명함을 가상하게 여겨 알뜰히 지도하였다. 무릇 이른바 말이 없는 말과 法이 없는 法을허중(虛中)에서 주고 받아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23살 때 혜철대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이미 一乘了義를 통달하고, 參學하여 일정한 곳이 없었다. 노을을 밟고 천석(泉石)을 완상하면서 유수(幽邃)한 곳과 명승지를 찾아 선지식을 친견하고 問法하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때로는 운봉산동굴에서 참선하기도 하고, 혹은 태백과 같은 큰 바위 앞에 초막을 맺고 좌선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의 명칭이 널리 퍼져서 온 천하 사람들이 그의 도덕을 尊仰하였다. 신비한 기적이 많았으나, 그러나 별로 중요하지 아니한 것은 기록하지 않았다. 희양현 백계산에 옛 절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옥룡사였다. 스님께서 遊歷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그 경치가 幽勝함을 좋아하여 堂宇를 개수하고, 시원하게 여겨 이곳에서 정진하다가 임종할 곳으로 뜻을 굳히고, 연좌(宴坐)하여 망언하기를 무려 35년 동안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의 도덕을 흠모하여 마치 양고기가 있는 곳에 개미가 모여들 듯, 학인들이 사방으로부터 구름처럼 운집하였다. 세수할 때에는 수건과 양치질할 물을 수발하며, 출입할 적에는 錫杖과 신발을 준비하는 등 정성껏 시봉하였다. 문하에 제자가 항상 수백명을 넘었다. 차별적인 모든 根機들에게 一雨로 널리 윤택하였으며, 목격(目擊) 현장에서 신비하게 密授하여 빈손으로 나아가서 가득히 채워서 돌아갔다.

 

헌강왕이 그의 높은 덕을 공경하여 사신을 보내 禁中으로 맞이하고 처음 보는 초면에 크게 기꺼워하여 禁中에 머물게 하고, 수시로 玄言과 妙道로써 임금의 마음을 開發토록 조언하였다. 얼마 후 시끄러운 경주가 싫어서 本寺로 돌아가도록 간청하였다. 어느 날 홀연히 제자들을 불러놓고 이르기를, "나는 곧 이 세상을 떠나갈 것이다. 대저 인연을 따라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따라가는 것은 진리의 상도이니, 어찌 오래도록 이 세상에 거할 수 있겠는가"하고 엄연히 입적하였으니, 때는 대당(大唐) 광화 원년(光化 元年) 3월 10일이었다. 향년은 72세이다. 사부대중들이 슬피 통곡하니 마치 사모하는 듯, 또는 넋이 빠진 바보와도 같았다. 드디어 神座를 옮겨 탑을 절 북쪽 언덕에 세웠으니, 유명을 준수한 것이다. 효공왕이 소식을 듣고 도탄(悼歎)하면서 특히 시호를 요공선사(了空禪師), 탑명(塔名)을 증성혜등(證聖慧燈)이라 추증하였다. 문인 홍적 등이 先師의 빛나는 행적이 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눈물을 머금고, 表狀을 올려 누구를 시켜 비문을 짓도록 하여달라고 간청하였다.


 

임금께서 이에 서서학사(瑞書學士) 박인범에 명하여 비문을 지었으나, 마침내 돌에 새기지 못하였다. 처음 스님께서 옥룡사에 자리잡지 아니하고, 지리산 구령에 암자를 짓고 주석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떤 이상한 사람이 찾아와 座下에서 스님께 여쭈어 이르기를, "弟子는 物外에서 깊이 숨어서 살아온 지가 벌써 수백년에 가깝습니다. 조그마한 기술이 있어 높은 스님에게 받들어 올리려 하오니, 만약 천술(賤術)이라 하여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면 다른 날 남해의 바닷가에서 마땅히 알려 드리겠사오니, 이것 또한 대보살이 세상을 구제하며, 중생을 제도하는 법이옵니다"라 하고,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스님께서 기이하게 여겨 약속했던 곳으로 찾아가서 과연 그 사람을 만났다. 그는 곧 모래를 끌어모아 산천에 대한 順逆의 형세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돌아다 보니 그 사람은 이미 없었다. 그곳이 현재의 구례현 경계 지점이니, 그 지방 사람들이 사도촌이라고 일컫는다.


 

이로 말미암아 스님은 스스로 홀연히 깨닫고, 더욱 음양오행의 술을 연구하였다. 비록 금단옥급유수한 비결들을 모두 흉중에 담았다. 그 후 신라의 政敎가 침쇠(寢衰)하여 국가 위망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장차 성인이 천명을 받아 特起할 사람이 있을 줄 알고, 그 길로 송악군으로 갔더니, 그 때 우리 세조께서 郡方에서 거택을 짓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그의 문전을 지나면서 이르기를, "아! 이곳은 마땅히 王者가 출생할 곳이언만 다만 經始하는(살고 있는 사람) 자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 했다. 그 때 마침 靑衣童子가 이 말을 듣고 집 안으로 들어가서 이 사실을 세조에게 전하였다. 세조는 급히 나와 스님을 집 안으로 迎入하여 그 謀策과 改營에 대해서 자문하였다. 스님께서 대답하되, "2년 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대답하고, 이어 책 1권을 지어 겹겹으로 封하여 세조에게 주면서, "이 책은 아직 출생하지 아니한 군왕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 장실(壯室)에 이른 후에 전해 주라"고 당부하였다.

 

바로 이 해에 신라 헌강왕이 즉위하였는데, 唐나라 건부 2년에 해당된다. 4년에 이르러 태조 왕건이 과연 前第에서 탄생하였다. 그 후 장년에 이르러 스님이 전해 준 책을 받아 보고서야 천명이 자신에게 내려진 줄 알고, 드디어 구포(寇暴)한 무리를 제거하고 비로소 區宇에 나아갔으나, 공손히 신성의 뜻을 받든 것이지, 어찌 천하를 소유할 욕심이 있었겠는가? 그 까닭은 반란의 무리를 무찌르고, 정의로 돌아가서 국민을 도탄으로부터 구제하여 壽域에 오르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큰 위업아름다운 덕이 未來際가 다하도록 끝없이 傳할 것이며, 비록 다시 하늘이 有德한 이를 도우며, 백성들은 모두 인의를 지켰다. 그러나 그가 계성(啓聖)하여 화원(化元)을 기약한 것은 결정코 천명을 유수(幽數)에서 이룩하였으니, 그 원인은 모두 우리 스님으로부터 發起되었다. 대개 功烈이 우뚝하고 혁혁함이 이처럼 성대하므로 마땅히 포상하고 추모하며 존숭하였다. 그리하여 현종이 大禪師라는 법계를 追贈하였으며, 숙조(肅祖)는 王師로 추봉하고, 우리 聖考이신 효공대왕조에 이르러 열성조에 대한 위업을 크게 선양하였다.


 

따라서 스님에게 건국공로에 대한 은혜를 보답하는 뜻으로, 드디어 선각국사로 책봉하고 사신을 本寺의 影堂에 보내 국사 추대의 고례행사(告禮行事)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의종 임금께서는 또 그 사적을 비에 새기도록 명하여 오래도록 전하게 하였으니, 장하신지라, 왕조의 존경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 臣이 생각나는대로 말하건대, 대저 제왕이 장차 일어남에 있어 그 威靈과 氣燄이 반드시 먼저 物心에서 動蕩함이 있게 되므로 높은 재주를 가진 이와 뛰어난 학식을 가진 자들이 전연히 일어나되, 혹은 앞서기도 하고, 혹은 뒤를 따르기도 하여 起用함이 되었다

 

예컨대 국사께서 태조에 대하여 陰助한 사실은 심히 위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개 먼저 태조가 태어날 것을 미리 알았으며, 그가 말한 예언들이 그의 죽은 후에도 적중하였다. 그의 신비한 부작이 冥契한 것은 不可思議함이 있었다. 오호라! 스님의 도덕은 극치에 이르러 佛祖와 더불어 합일하였으며, 자취를 나타낸 것은 마치 장자방이 神으로부터 兵書를 받은 것과 같고, 釋寶誌公 스님이 징조가 나타나기 이전에 예언한 것은 一行禪師음양 術數에 정통한 것과 같은 것이다. 스님께서 전하신陰陽說 數篇이 세상에 많이 유포되었는데, 후세의 지리가들이 모두 이것을 依宗하였다.

 

명하여 가로되,


지난 세상 나타나신 모든 부처님!
無上甚深 微妙法을 연설했으니
그 법문은 文字로써 다툴 수 없고
聞思修인 三慧로도 얻지 못할새  


直指人心그 자리는 초연한 境地
一念卽是 千劫이라 長短이 없네!
위대하신 고려조의 우리 國師여!
禪悅世界 우유하게 自在하시네.  


達磨宗旨 禪思想을 善學하시어
眞空이나 空아니고 有도 아닐새
투철하신 眞正法眼 터득하시고
四通으로 자재하신 六神通이여! 

(3)

無碍自在 확철하온 그 여력으로
陰陽數術 兼硏하여 교화하시다.
시서(蓍筮)로써 점복함을 依支치 않고
사건전에 미리 알아 적중하도다.   


후삼국을 평정하지 못하였으며
天의 명령 아직까지 닫혀 있으나
오래전에 지나간 일 모두 알았고
미래일을 미리 알아 예언하였다.  

(5)
책을 지어 王隆에게 전해 주면서
고려국이 개국됨을 예언하였다.
周文王이 周나라를 건국하듯이
후삼국을 통일함이 손 펴듯 하다. 


지리산속 구령에서 異人을 만나
地理書인 金壇玉笈 전해 받았다.
그로부터 각종 음양 연구하여서
上通天文 下達地理 自在하였네!   


장자방과 도선국사 때는 다르나
두 사람이 예언함은 다르지 않네!
위대하신 그 공적은 비길 데 없고
산하처럼 높고 깊어 다할 수 없다. 


열반한 후 오늘까지 삼백년이나
바람 불고 물 흐름은 다르지 않네
높은 德을 瞻仰하는 四部衆이여!
그 도덕이 높고 높아 하늘 같도다. 


偉業行狀 돌에 새겨 舊祠에 세워
천년 만년 지나도록 보여주려고
산신령인 山君에게 부탁하노니
길이 길이 수호하여 게을리 마오.  


天德 2년 歲次 庚午 7월 乙亥 9일 癸未에 비를 세우고, 영오(穎悟) 三重大師 臣 處實이 왕명을 받들어 글자를 새기다


 

(陰記)
선각국사비 음기(先覺國師碑 陰記)
비문을 이미 비석에 새간 다음 해에 臣과 鄭叙와 함께 참소를 당하여 혹은 유배를 가거나, 혹은 공직에서 쫓겨났다. 朝士들이 모두 규탄하였으며, 臣들도 百喙으로 공격하여 반드시 死地에 놓여 원수의 배를 채워 주고자 하였다. 비록 도선국사의 사적이 臣의 賢과 不肖에 얽매이지 아니 하였으므로 한 마디도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비석이 마땅히 세워져야 할 것이나, 그 돌이 드디어 국청사문무(門廡)의 밑에서 20여년간 방치되어 먼지에 덮혀 쌓이고 흙이 묻어 부식되어 거의 비상한 功烈로 하여금 민멸(泯滅)하여 후세에 傳聞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성상폐하께서 즉위함에 이르러 난적을 잔제(剗除)하고 百度를 정돈하여, 유신 선정을 베풀었다. 국사의 법손인 운암사 주지 중대사 지문이 그 事訴로써 대사씨에 접수하여 드디어 교지를 받았다.

 

光陽縣貢을 불러 그 비석의 원석을 배에 실어 옥룡사로 보냈다. 임금께서 내시 양온(良醞) 서승(署承) 박봉균 등을 보내 공사를 감독케 하고, 대사 설호정 이양정에게 터를 정하도록 하였다. 석공은 화엄사 대중을 불렀고, 역부는 광양과 구례 두 현에서 징발하였으며, 군인 감무원(軍人 監務員) 장사랑 위위주부( 將仕郞 衛尉主簿) 한언방과 장사랑 위위주부 강립서등이 그 역사를 감독하였다. 그러나 실지 총감독은 주지 지문스님이 맡아 얼마 되지 않아 낙성하니, 三間의 비각이었다. 대정 12년 임진년 10월 19일에 수비(竪碑) 공사가 끝났는데, 구부가 산정(峻整)하고 계기(階基)가 견고하여 실로 천년·만년이 지나가도 전혀 기울어지지 않을 것이다. 탑비를 보호할 塔殿인 堂直은 절 동북쪽 약 2백보 지점에 세웠으니, 참으로 상개(爽塏)한 위치이다.

 

지문이 또 임금께 고하여 이르기를 원하옵건대, 本朝 王의 국사 비문도 구식에 의하여 석배(石背)에 법손과 제자 중에 대덕 이상의 직명을 실어, 미래에 영원히 垂示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계사년 5월 29일 주청하여 臣에게 음기를 짓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종파의 문손을 찾아, 이른바 正孫 10인을 아래와 같이


송림사 주지 중대사 형균
현갑사 주지 중대사 민언
        중대사 지효
        중대사 지연
        중대사 언선
        중대사 종순
        중대사 처령
        대사 혜온
        대사 혜자
        대사 혜의

 

금자(金紫) 광록대부(光祿大夫) 수사공 중서시랑 평장사 집현전대학사 판상서예부(守司空 中書侍郞 平章事 集賢殿大學士 判尙書禮部事) 치사(致仕) 신(臣) 최유청이 왕명을 받들어 기록하다.


癸巳 6월 14일 판허(判許)와 아울러 法孫들이 傳持하고 있는 4個寺도 새겨둔다.


문인 옥룡사 주지 중대사 臣 지문이 왕명을 받들어 비를 세우고, 보현사 주지 대오 중대사 신 기준은 조칙을 받들어 비문을 쓰며,
문인 참학 신 정충이 어명을 받들어 글자를 새기다.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3】(1996)]

 

 

복원한 도선국사부도(사진/달넘새님)

동행ㅎ엉터리로 복원하였다고 화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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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석 위의 운문이 표현된 하대석 하단부 상부에 복련이 조식된 하대석 상단석이 빠졌다는 지적이다.

 

 

광양 옥룡사지 동백꽃이 만발할 때,또는 매화기 절정인 시즌이 도래하면

옥룡사지,중흥산성 삼층석탑을 포함하여  동선을 세우면 알찬 답사가 되리라 확신한다.

 

2018.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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