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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신안군

신안...수대항 고운정

by 임병기(선과) 2016.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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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문 대교

비금도와 도초도를 연결하는 교량 입니다.

 

비금도 수대항

당나라로 향하던 고운 최치원 전설이 어린 샘을 찾았습니다.

 

 

수대항에는

고운정 팻말만 서 있습니다.

 

근처

해안경찰 파출소에 탐문 하기위해 다가갔더니

문이 열리며

익숙한듯 설명 해줍니다.

 

수대항에는 안내문만 있고

설화속의 우물은 저기 산록에 위치하지만 접근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고운정.

저 산록에 있다고 합니다.

 

고운정...사진,글 출처/신안문화원

 

최치원 샘(고운정)
"최치원 샘은 오늘날도 항로의 요지인 비금도와 도초도 사이의 해협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비금도 수도마을 뒷산 8부 능선에 위치하며, 지금도 맑은 물이 샘솟고 있어 주민들이 약수로 음용하고 있다. “최치원이 당으로 건너가기 위해 수도리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때 마침 배에 식수가 떨어진다. 최치원이 수도리 뒷산 봉우리에서 물이 나올 것 이라 하여 그 곳을 팠더니 물이 솟아올랐다.

 

이에 사람들이 이 샘을 고운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 당시 섬에는 가뭄이 들어 농사를 짓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최치원에게 비를 오도록 기우제를 지내 달라고 청을 하니 최치원은 선왕산에 가서 기우제를 지냈고, 곧 비가 내렸다. 후에 최치원은 배에 물을 채우고 난 뒤 우이도로 건너갔다.”

 

 

선왕산

 

고운 최치원과 우이도 상산(孤雲 崔致遠과 牛耳島 祥山)...출처/신안문화원

해동국(海東國) 휘어감은 초록빛 드넓은 치마폭에 점찍어 수놓아진 그래서 누구나 눈여김 없이 지나쳐버리는 외로운 섬! 소귀처럼 오똑 솟아 우이도(牛耳島)라고 불렀는지 쓸모 없는 소귀처럼 생겼데서 우이도(牛耳島)라고 했는지 옛날 옛적 신라와 당나라 간 교역이 성행했을 때 번창했는지도 모를 우이도다. 이 섬은 목포에서 33마일 도초에서도 8마일이나 떨어진 서남해상의 27개 외로운 섬 가운데 5개 섬이 유인도며 이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우이도이다.


신라말 고운 최치원 선생이 당나라를 왕래할 때에 이 섬의 북쪽에 서 있는 상봉에 도착했다. 고운 선생은 조국 신라에서 보다는 중국에서 먼저 문장가라는 명성을 크게 떨쳐다. 어렸을 때 그는 그의 어머니가 금돼지에게 납치당한 후 10개월만에 그를 낳았다고 전한다. 출생 후 부모들은 아이를 보자기에 싸서 바닷가에 버리니 하늘에서 선녀들이 데려와 아이를 키우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데려 갈려고 할 때에 아이는 홀연히 바다 가운데 바위에 앉아 글을 읽고 있었으며 그 때 백발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이 아이는 본래 하늘의 아이인데 잠시인간세계에 내려와 최씨 집안에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의지할 처소가 없어 걱정 하노라」라고 하였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바닷가에 나와서 아이를 위해 월영대와 망월루를 만들어 주었는데 하늘에서 학자들이 많이 내려와 그를 가르쳤으며, 고운은 쇠지팡이로 모래 위에 글씨를 연습했다고 전한다. 말년에는 조국의 국운을 바로 잡기 위해 당으로부터 귀국하지만 이미 기울어버린 국운을 다시 일으키지 못하고 뜻을 세우지 못한 채 외롭게 생애를 마친다. 


이렇듯 하늘에서 온 천자(天子)가 도착한 우이도에는 때마침 한발이 극심하였는데 고운 선생을 본 주민들은 가뭄을 물리치고 비를 내려주도록 간청한다. 고운 선생은 즉시 북해 용왕을 불러서 가뭄을 해결하라고 했으나 옥황상제의 명령이 아니면 용왕의 마음대로 비를 줄 수 없다고 난색을 표한다. 용왕의 말을 듣고 고운 선생은 화를 벌컥 내면서 속히 비를 내리라고 호령하였다. 기가 꺾인 용왕은 하는 수 없이 고운 선생의 명령대로 비를 내려 가뭄을 해결했다.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는 뒤 늦게 보고를 받고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도록 흥분을 하더니 용왕을 잡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고운 선생은 용왕을 도마뱀으로 변장시켜 선생의 무릎 밑에 감추었다가 옥황상제의 진노가 꺼진 뒤 다시 용왕으로 보내서 당나라를 왕래할 때 수호신으로 썼다고 한다.


그 후 고운 선생은 당나라로 떠났는데 선생이 머물면서 상산봉 제2봉 바위에다 바둑판을 만들어 신선과 바둑을 두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바둑판의 흔적은 현재까지 남아있다.


또한 고운 선생은 당시를 기념하기 위해 철마와 은접시를 놓아두고 갔는데 은접시는 주민들이 가져갔고 철마는 계속 내려 오다가 고인이 된 주민 문모씨가 대장간에 가지고가 용도를 변경해 쓸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산을 탕진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는데, 그 후 철마마져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고 한다.


우이도 상산(牛耳島 祥山)의 이야기는 전설(傳說)이 아니다. 이중환(李重換)의 택리지(澤里誌)를 참고(參考)하면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김가기(金可紀) 최승우(崔承佑)는 모두 상선을 따라 당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했다. 고운(高雲)은 고변의 막료가 되어 사육문(四六文)을 잘하였는데, 지금 여문에 실린 황소의 요문은 곡 고운의 문이다. 고운은 김, 최 양인과 같이 신천사(申天師)를 종남산사(終南山寺)에서 만나 내단(內丹 신선이 되는 비결) 비결을 얻어 후에 종국에 돌아와서 모두 수련하여 선술(仙術)을 참으로 깨달았다 한다.

-擇里誌중에서 - 종남산사(終南山寺) : 현재 도초면 우이도 상산(現在 都草面 牛耳島 祥山)으로 추정(推定)함

 

 

201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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