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서울특별시 205

서울...부석 금표

浮石 禁標 사릉 금표에서 조선시대 가마터를 지나 구천동 계곡 입구. 북한산 대동문코스이며, 구천폭포로 향하는 등산로상이라고 합니다. 사릉 금표 https://cafe.daum.net/moonhawje/DjZP/6329 문인석 묘지를 떠나 마치 벅수처럼 등산로를 지키고 있습니다. 浮石 禁標 눈에 쉽게 들어오는 바위에 얕게 음각으로 새겼습니다. 왕실 채석장의 화강암을 채취 못하도록(돌을 뜨지 못하도록) 새긴 금표 같은데, 사릉 금표와 마찬가지로 설명문에는 사릉 부석 금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채석장에 남아 있는 사릉감역필기 (思陵浮石監役畢記) 때문인 것 같습니다. 浮石 禁標 세로 두 줄로 새겼습니다 선명합니다. 부석 금표(浮石 禁標) 조선 왕실에서 필요한 석물을 채취하는 채석장에 일반인의 출입과 돌을 뜨는 ..

서울...사릉 금표(思陵 禁標)

사릉 금표思陵 禁標 수유동 분청사기터 인근에 위치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조선왕릉의 하나인 사릉(정순왕후 능)을 조성할 당시, 석재를 채취했던 채석장 입구에 세운 금표입니다. 思陵 조선 6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1440∼1521)의 능이다. 정순왕후는 송현수의 딸로 1454년(단종 2) 왕비로 책봉되었고, 다음 해에 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의덕왕대비가 되었다. 그러나 1457년(세조 3) 단종복위운동이 발각되면서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왕후도 군부인으로 강등되어 동대문 밖 정업원에서 생활하였다. 정업원 뒤쪽 산봉우리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비통한 마음으로 단종을 그리워하며 한 많은 세월을 살았다. 자식 없이 1521년(중종 16)에 82세로 세상을 떠나,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시가(媤..

서울...우이동 궁림장 금표

積翠屛(적취병) 아름다운 비취색 같은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병풍에 비유하였습니다 우이구곡의 2경으로 망경폭포 아래에 자리합니다. 조선후기 이조판서,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한 홍양호는 우이동 구곡기에서 적취병을 '물이 빠르게 쏟아져 사람들이 바위 옆면으로 비스듬히 걸어가며, 두 발을 똑같이 디딜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궁림장 금표(宮林場 禁標) 폭포 옆 바위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彰表 宮林場禁 標 세로 3줄로 새겼습니다. 요즘 글로 의역하면 공지 나무를 비롯하여 궁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곳이니 출입을 금한다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가로 글씨는 금표와 무관한 글 같습니다 宮林場禁標 彰表 宮林場禁標 백악산, 인왕산, 목멱산, 낙산에 새긴 사산금표(四山禁標)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고 합니다. 한문..

서울...사산 금표(四山禁標)

사산 금표(四山禁標) 우이동 보광사 주차장 옆 둘레길 100여 미터 위쪽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궁금장(宮禁場) 도성안과 성저 10리 이내(한성부 관할 내)에서 송림 벌채를 금지하고, 葬地를 금한다는 표석입니다. 조선 후기 도성 안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무분별한 벌채와 무덤이 증가하자 이를 막기 위한 조치로 새긴 금표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宮禁場 명문은 궁금장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宮 궁궐의 의미가 아니라 왕실 소속으로 특정 업무를 맡고 있는 부속기관을 뜻한다고 합니다. 宮禁場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사진 출처. 서울 역사박물관) 사산은 백악산, 인왕산, 목멱산, 낙산을 이른다고 합니다 사산금표와 관련하여 깊은 내용은 아래 논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조선후기 한성부의 四山 관리와 松禁정책. 유승희. 이화사학..

서울...불중박 고운사 특별전

주마간산식 관람. 사진 몇 장 남깁니다. 고운사 현판. 해강 김규진 글. 죽농 안순환 그림 의성 고운사. 고금당 현판. 광무 임인(1902년) 의성 고운사 우화루 嘉慶十四年己巳四月日 1809년 의성 고운사 석가불좌상.1482년 의성 고운사. https://cafe.daum.net/moonhawje/DjZP/4353 고운사 목조아마타불좌상. 1695년 고운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1670년 도명존자. 무독귀왕 제7 태산대왕 제5 염라대왕 고운사 아미타불회도. 1701년 고운사 사입이수관음보살도. 1828년 고운사 쌍수암 영산회상도. 1887년 의성 고운사 불영패(佛影牌). 1896년 업경대인 줄 알았는데. 의성 대곡사 소조십육나한상. 1694년 의성 대곡사 https://cafe.daum.net/..

서울...조계사 칠층석탑. 승탑

고운사 특별전 겸사 서울의 미답지를 찾은 이틀간 일정 조계사 칠층석탑 1930년 태국 왕실에 모시던 진신사리를 기증 받아 봉안했던 탑입니다. 2009년 사리를 대웅전 중정 8각 10층탑 속에 모시고 석탑은 불교중앙박물관 뒤쪽으로 이건 하였습니다. 석가세존진신사리탑비 釋迦世尊眞身舍利塔碑. 1930년 佛紀二九五七年庚午七月 日 退耕沙門相老 譔 惺堂居士 金敦熙 書 퇴경 권상로가 짓고, 김돈희의 글씨입니다 탑비에는 조성과정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전문을 옮기지 않았지만 전국 큰 사찰 대부분이 동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단부 3단 지대석 운족형(雲足形) 기단. 범자 기단 중석의 연주문 기둥, 장방형의 十자 안상 속의 화문 전층 탑신석 하부는 난간을 두르고 연엽주를 양각으로 표현했습니다. 탑신부 옥개석은..

서울...상명대학교 박물관

동선에 없었던 답사 눈 밝은 또르님 덕분에 인연 지었습니다. 도자기, 민속품 등 다양한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지만 관심 분야만 둘러보았습니다. 상명대학교박물관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69347 청동 불두. 소조여래입상 소조여래입상 개금 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나발의 머리 위에 반구형의 육계가 돌출되어 있으며 야무지게 닫은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다. 양쪽 귀가 어깨 위까지 드리워져 있어 근엄함과 자비로움을 느끼게 해주며, 석가의 공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수인(手印)을 보면, 오른손은 가슴높이에서 손가락을 위로하여 손바닥을 바깥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수평으로 들어 손가락을 아래로 한 채 손바닥은 오른손과 마찬가지로 바깥 방향을 취하고 ..

서울...보O사 목조여래좌상.삼층석탑.석불입상

보O사 대웅전 불단 목조여래좌상 서울시 유형문화재. 복장물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조선후기의 불상으로 전합니다, 나발, 중간계주, 낮은 정상계주, 방형 상호, 반개한 눈, 오뚝한 코,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별조의 두 손은 촉지인, 아미타수인을 취하고 있습니다. 수평으로 마감한 승각기, 이중 착의법, 대의자락응 무릎 사이로 흘러내렸습니다. "특히 하반신의 대의 처리는 네 겹의 주름 가운데 가장 안쪽 주름이 넓게 펼쳐지고, 나머지 주름은 물결이 일렁이듯 접혀 있으며, 반대쪽 무릎에 걸친 대의자락은 연판형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데, 이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 활동한 색난과 그 계보 조각승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요소이다. 보각사 목조여래좌상은 얼굴의 이목구비에서 풍기는 인상이나 오른쪽 어깨에 늘어진 U..

서울...장안사 오층석탑

장안사 신대방 2나길 21-2 일제강점기 오층석탑을 찾아왔습니다. 기단부 층급받침 없는 옥개석 우주가 생략된 탑신석 오층 옥개석과 보주가 일석. 4층 탑신석은 후보한 느낌입니다. 오래전 경기도 모처에서 일제강점기에 대량 생산(?)된 석탑이라는 자료를 보았었는데... 일제강점기 석등 유형입니다. .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 석탑 https://cafe.daum.net/moonhawje/MebK/262 2022.11.16

서울...미륵암 석불입상. 석조여래좌상 外

미륵암 동작구 상도동 103-2 답사객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옛님이 있었습니다. 태고종 소속의 사찰로 승려가 상주하지 않으며, 관리를 맡고 있는 분은 미륵암을 중수, 복원한 진법의 아들인 이승열 교임입니다. "창건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문헌 및 고고학 자료들에 의하면 조선 시대 이전 이미 그 일대에 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제주고씨 대동보(濟州高氏 大同譜)』에는 조선 성종 때에 이 지역에서 금불암의 터가 발견되었으며, 청기와 등 유물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설화에 의하면 조선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단 씨(段氏)라는 인물에 의해 땅에 묻혀 있던 미륵불이 발견되어 암자를 짓고 모신 것이 시초라고 한다. 이후 김 씨와 강 씨라는 사람에 의해 관리되다가 일제 강점기 고명진에 의해 법당이 중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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