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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곡성군

곡성...유팽로 장군 의마총

by 임병기(선과) 2021.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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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사(道山祠)

옥과면 합강리 182

의마총을 찾기 앞서 유팽로 장군 장군의 생가에 세워진 사당에 들렸으나, 아침 이른 시간 문이 닫혀 까치발로 바라보았습니다

 

월파 유팽로 선생 행장...청사 고용후

선생은 옥과 출신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발발 시 4.24일 가장 먼저 창의하신 분이다. 선생의 휘는 한자 柳彭老 이오 생년 1554년(명종 9) • 몰년 1592년(선조 25) 이다. 본관은 문화(文化 지금 황해도 신천)). 자는 형숙(亨叔)·군수(君壽), 호는 월파(月坡). 개국공신 유만수(柳曼殊)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유경안(柳景顔)이다. 천성이 효우(孝友)하였다고 한다. 1579년(선조 1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옥과현에서 살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대박(梁大樸)·안영(安瑛) 등과 함께 궐기하였으며, 피난민 500명과 가동(家偅) 100여명을 이끌고 담양에서 고경명(高敬命)의 군사와 합세하였다. 여기에서 고경명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는데, 유팽로는 고경명 휘하의 종사(從事)가 되었다.

 

당시에 기호지방에 돌린 격문을 지었는데, 그 격문이 『정기록(正氣錄)』에 실려 있다. 호남의병들은 처음에 근왕(勤王)을 목적으로 북상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이 전주를 침입하려 하자 금산에서 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전투에 앞서, 적의 수만의 병력을 오합지졸인 아군으로써는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험한 요지에 분거(分據)하였다가 적이 교만하고 나태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이 싸움에서 패전하였다.

 

일단 탈출하여 고경명이 아직도 적진 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적진에 뛰어들어, 고경명을 일단 구출하고는 끝내 전사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대사간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광주(光州) 포충사(褒忠祠)와 금산 종용당(從容堂)에 제향되었다.

 

 후손이 없어 가장이 정리되지 못하고 행장을 청사 고용후 선생이  찬하였다.

 

贈司諫院司諫柳公行狀 (월파 유팽로 선생 행장) 

壬辰之亂。公以學諭。在京師。 大駕西巡之日。公之意必欲扈從。無所騎遂沮。蓋先是。上令百官各出馬以助軍興。而公之馬。亦已獻於其日故也。公旣進退俱失。彷徨無計。適公之鄕人。有持馬南犇者。公乃不得已借其馬。艱關歸故里。見親舊。語及時事。涕淚覆面。家人饋美饌。則公輒却之不食。其內子慰解之。公但嗚咽曰。 君父安在。爲臣子者。豈忍安坐於家。而食厚味耶。與人言。或恂恂如平日。而夜寢必噓唏達曙。 是時。本道官軍渙散。公召募鄕隣。欲以勤王。會先君倡一道起義旅。公卽爲其從事。及錦溪之敗。公與先君相失。公躍馬以出。賊追不及。公駐馬問潰卒曰。大將脫乎。曰未也。公愕然曰。旋吾馬。其奴堅轡不從。公按劍叱之曰。爾宜生還。以我之死。告家人。遂策其馬。冒圍而從先君於亂兵中。先君顧謂曰。吾必不免。盍先馳出。公不肯曰。吾豈忍棄大將而苟活耶。至以身捍蔽先君。遂俱隕於賊鋒之下。 嗚呼。若公之死。尤人所難也。部曲鳥散。將卒相失。則當其奴堅轡之際。公雖生。人孰非之。而公乃捨其必生之勢。蹈白刃而視死如歸。古人所謂從容就死者。非公也耶。然則公之死。不惟今世之所未聞。而稽諸載籍。亦罕有其比矣。宜乎中朝之士。亦皆嗟悼感嘆之辭。至或形於文字間也。 公諱彭老。字享叔。玉果人。係出文化。高麗元勳柳車達。卽其始祖。入我 朝。冠冕奕世。至諱景顏。是爲公考。以某年月日。生公。公爲人。純謹樂易。喜慍不形於色。勤於學業。志甚篤。襁褓喪先妣。事父盡其孝。於庶母。待之如所生。其處鄕黨。則敬於長。信於友。自牧卑。接物恭。見之者。無賢不肖。皆知其爲善人。 己卯。1579년 中司馬試。戊子。1588년 登式年第。權知成均館學諭。翌年。丁父憂。廬于墓側。朝夕常就哭墓下。不以雨雪廢。雖隆寒盛暑。必衰麻在身。三年不出山口。人以爲難。吁。由此觀之。不惟公之偉節光振古今。而其家行之卓爾。亦足以垂砭末俗矣。初 朝廷聞公之死。 贈司諫院司諫。 公不幸無子女。以族姪繼其後。公之配某貫金氏也。夙有閨則。公之凶問之至也。卽於衣帶。拔佩刀自剄。血淋漓滿地。家人驚惶犇救。絶而復蘇。越一年。竟以哀毀致死。悲夫壬寅冬。公之繼子柳君萏。訪余於東郊之寓居。相視泫然。接數語畢。柳君卽向余言曰。吾先子之言行。子爲我記之。我將持之。而轉籲於當代之文章鉅公。或傳焉。或碣焉。吾欲請一焉。余憮然爲間曰。先司諫之言行。余尙忍記之哉。且余之不閑於文字。子寧不知耶。子之懇。我安敢當。雖然。余嘗欲以絮酒蕪辭。一哭於司諫之墓者久矣。今子之懇。又發於千里客中之相見。則我安敢以不文辭。故略敍其言行之大槩。泣而書之。庶乎知言之君子。有所考云。晴沙集卷之二 / [文]...(출처/다음 카페. 東洋文獻學會)

 

*청사 고용후(晴沙 高用厚 1577-1648)

고경명 선생의 여섯째 아들

 

선생이 6세에 지은 시비

 

정렬각

도산사 참배를 하지 못하고 본래 답사 목적인 의마총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의마총

도산사는 합강면, 의마총은 하천을 건너 입면 송전리 820에 자리합니다.

 

현장 안내문에 의하면

1592년 7월 10일 금산 전투에서 순직하자, 장군의 검은 오리마(烏驪馬)는 장군의 머리를 물고 300리 길을 달려 부인에게 전해 주고 죽었다고 합니다, 부인 원주 김 씨도 장군을 무덤에 묻고, 자결하였으며 도산사 인근 합강리에 정려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동물 무덤

https://blog.daum.net/12977705/8726933

 

여러 자료에 유팽로 장군이 우리나라 최초 임란의병장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외에도 호남 의병과 관련하여 많은 자료가 있으나, 본 글의 취지는 우리나라 동물 무덤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2021.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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