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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속초시

속초...보광사 목조 지장보살좌상

by 임병기(선과) 2021.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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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지방 답사 동선에 포함되지 않았던 보광사

동행한 세종아빠 님이 내시 부인이 발원하여 조성한 목조지장보살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유래를 알고 건너뛸 수 없기에 추적추적 비 내리는 절집을 찾아가서 신분을 밝히고 정중하게 스님께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하며 그간의 히스토리를 실감 있게 설명해주셨습니다.

 

보광사

영랑호변에 자리한 보광사는 설악산 신흥사 말사입니다. 1623년 광명당 등휘가 안양암을 창건한 후 폭우로 유실되자, 속초의 옛 절터로 이건하여 보광사로 사명을 개칭하였습니다. 한국 전쟁 후 수복된 후 이순덕 보련화 님이 개창하였으며, 2016년 석문 스님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목조지장보살

1654년 내관인 승록대부 나업의 부인 청주 한씨가 남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금강산 안양암에 봉안하기 위하여 발원한 지장보살상으로 조각승 초안의 작품입니다.

 

특히 조성 발원문, 불교 경전 등과 함께 발견된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보낸 제불여래보살명칭가곡(諸佛如來菩薩名稱歌曲)이 발견되었습니다.제불여래보살명칭가곡은 국내에서 처음 발견 본으로 이 책에 실린 변상도는 조선 초기 변상도와 조선시대 불교가곡(佛敎歌曲) 정립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지장보살좌상

민머리로,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방형의 상호, 백호가 있고, 반개한 눈, 짧은 코, 인중이 다소 넓습니다

이중착의법, 승각기는 연화형으로 접었으며, 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품하생 수인으로 별조로 조성하였습니다

대의 자락은 무릎을 덮고 흘러내렸습니다. 

 

불모(佛母) 초안(草安)

https://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88971

 

상선 나업(尙膳 羅嶪)

"상선(尙膳)은 왕을 보좌하는 내시의 최고 직위다. 그의 이름은 나업(羅嶪)이다. 1596년에 태어나 1654년 59세로 사망했다. 광해군 4년 17살에 내시부에 들어갔다. 부인은 청주 한씨로 나업보다 한 살 연상이다. 나업이 죽고 21년을 더 살았다. 한씨 부인은 81세 천수를 누렸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 일기를 확인한 결과 나업은 인조가 가장 총애하는 최측근이었으며 병자호란을 전후로 조선 조정과 청과의 관계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1636년 12월9일 청나라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자 인조는 강화도 피신을 결정한다. 먼저 숙의 세자비, 원손과 인조 뒤를 이어 효종에 오르는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강화도로 가게 했다. 

이들을 승정원 승지 한홍일과 함께 나업이 수행했다. 왕을 호위하는 본진은 청군이 강화도 건너가는 길을 막는 바람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 강화도의 봉림대군이 남한산성의 인조에게 보내는 서신을 나업이 전달했다. 전장에서 서신을 전달하는 역은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위험하고 막중한 소임이다. 그 공을 높이 평가받은 듯하다. 그는 정2품으로 진급하고 말 노비 밭 등을 하사 받았다.

 

그의 활약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하고 사신을 보낼 때 나업이 차출된다. 1638년 6월 청나라에서 요구한 결혼 처녀단자를 사신단과 함께 심양으로 가지고 갔다. 이를 시작으로 나업은 모두 5차례 청을 방문한다. 모두 중요한 방문이었다. 1639년 2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모시고 심양을 찾았고, 1642년5월 인평대군을 수행하였으며, 1649년과 50년 사이 효종이 즉위한 뒤 한번은 사은사로 또 한 번은 청나라 왕실과 혼인하는 효종의 양녀 의순공주를 따라 청을 찾았다. 

 

그는 단순한 사신단이 아니었던 듯 하다. 인조는 청의 요구 사항을 수습하는 역할을 그에게 맡겼다. 청의 요구를 조선 조정에 단순 전달하는데 그치지도 않았다. 나업은 청이 요구하는 세공미를 줄였다는 공로로 인조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청과의 외교 역할 뿐만 아니라 궐내 공사도 담당했다.

 

탁월한 외교관 능력 보여

문헌에 나타나는 활약으로 미뤄 그는 비범한 인물로 추정된다. 우선 외교관으로서 탁월한 수완을 선보였다. 5번이나 청의 수도 심양을 방문했다는 사실은 그가 청과 조선 양측으로 부터 신뢰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외교관으로서 능력과 신뢰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그토록 자주 사절단에 포함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갈 때 마다 세자 등 왕자와 공주를 수행했다. 

 

외교관으로 그의 능력은 인조가 청이 요구하는 후속 처리를 맡기고 또 청과 협상을 벌인데서도 나타난다. 청 황실과 외교전을 펼쳤다는 것은 언어 소통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아무리 뛰어난 협상가라해도 중간에 통역을 놓으면 내밀한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 그는 청황실의 만주어와 중국어에 능통했을 것이다. 

 

다른 나라 언어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언어 감각이 뛰어나고 각별한 노력을 펼쳐야하며 무엇보다 적극적이고 활달하며 대담한 성격을 갖고 있어야 한다. 명에서 청으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동북아 국제 질서 변혁기에 패전국 조선의 일개 내관이 양국 외교 무대를 오가며 맹활약했다는 것은 나업이 얼마나 대담하고 비범한 인물인가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그는 권력욕도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업은 효종 2년 1651년 인평대군이 연경으로 가던 날 가교를 타고 있었다는 이유로 대간들로부터 탄핵을 받아 파직된다. 한 마디로 건방지다는 이유다. 인조가 승하하던 자리에 세자와 함께 있을 정도로 총애를 받고 효종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을 때 동행했던 나업이니 위세가 대단했을 것이다. 왕자가 타는 가마에 자기도 모르게 탔을 수도 있다. 관료들이 보기에 ‘감히 내시 주제’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안하무인이었는지 모른다.

 

달리 생각하면 그 만큼 권력욕이 강했던 인물이다. 아마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한 뒤 조용히 물러났으면 파직이라는 수모는 겪지 않았을지 모른다. 오늘날에도 자식이 권력이든 기업이든 물려받으면 선대의 공신과 측근은 물리치는 법이다. 효종 역시 비록 심양에서 함께 고락을 보냈다 해도 선친의 측근이 자신의 곁을 지키는 상황이 불편했을 것이다. 인조가 죽기 전 얼마나 신신당부했겠는가? 

 

그의 아들에게는 상선(尙膳)을 곁에 두고 조언을 들어라 했을 것이고, 나업에게는 세자를 잘 보필 할 것을 당부했으리라. 하지만 그의 나이 그 때 벌써 55세, 요즘에도 퇴직할 나이다. 책임감을 내세우기 보다 시류에 따라 물러났으면 좋았으리라. 파직된 것이 억울했는지, 아니면 일에 너무 열중해서 건강을 해쳤는지 관직에서 물러난 뒤 4년 만에 세상을 떠난다.

 

비범하지만 권력욕 강했던 듯

그런데 그의 관(棺)이 처갓집 선산에 묻혔다. 조선 후기 성리학이 득세를 하고 사대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내관은 내시라는 이름으로 매도당한다. 내관의 무덤은 문중에서 파묘됐다. 그런데 나업의 무덤은 지금까지 처갓집 선산에서 흠 없이 발견됐다. 이는 나업이 처갓집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우선 재물로 많은 기여를 했을 것이다. 그는 많은 공을 세우고 그 때 마다 토지 노비 가축 등 수많은 하사품을 받았다. 청을 오가며 무역하며 돈을 많이 모았을 것이다. 

 

왕의 최측근에게 선을 대려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 모든 것이 예나 지금이나 물질로 통한다. 두 번 째는 청주 한씨 자제들의 벼슬길을 열었을 것으로 추정가능하다. 이 역시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국제 정세가 요동치고 조선이 풍전등화에 놓였을 때 목숨을 걸고 현란한 외교술을 펼치고 조정의 실세로 등극할 정도로 냉철하고 야심만만한 나업은 재물은 처와 처가를 위해 아낌없이 받칠 정도로 사랑 앞에서는 지고지순한 순정남이 아니었을까? 

 

나업이 죽은 21년 뒤 한씨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한씨 집안은 두 사람을 합장하고 묘표를 세워 죽어서도 둘의 사랑을 맺게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 한 남자의 순정과 헌신을 처가에서도 깊이 감사했기 때문이리라.

 

그토록 애절하고 깊은 사랑이어서 400여년 뒤 금강산이 올려다 보이는 속초 영랑호의 사찰에 홀연히 나타난 것일 까? 내관을 위해 발원한 불상은 처음 발견됐다. 이 역시 참 희귀한 인연이다. 보광사는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 남자와 이름 모르는 여성의 러브 스토리를 연극으로 올린다고 한다. 400년을 건너 찾아온 내관 나업과 한씨 부인의 불멸의 사랑이 영랑호의 물결에 드리운다.(불교신문 발췌)"

 

나업과 청주 한씨 합분(사진 출처. 다음 블로그 / 배기봉의 구름 가듯 물 흐르듯)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소재한 청주 한씨 질경공파 묘역에 위치

 

숭록대부행내시부상선나공양위지묘(崇祿大夫行內侍府尙膳羅公兩位之墓)

나업과 한씨 묘표

순치 12년 을미 이월 15일 립(順治 十二年 乙未 三月 十五日 立)

 

1655년 세움

 

대웅전 불단

 

대웅전 현왕도

1863년 5월 단오

화사 송암 대원 법인 삼여

목조지장보살을 조성한 금강산 안양암에 조성되었던 불화로 추정

중앙에 8폭 병풍 배설하고 전면에 의지에 현왕이 앉아 있으며, 7위의 권속이 시립 하였습니다

 

옥개석. 

 

역사와 우리 문화재에 해박한 스님께서 내관의 부인이 남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조성한 지장보살과 청주 한씨 묘역의 부부 합묘 등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설명하신 후 대웅전 현왕도 참배를 권하며, 학술대회 자료집을 선물해주셨습니다.

 

폭 넓은 해설과 함께 사진 촬영을 허락해 주신 주지 스님께 지면을 통하여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2021.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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