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상남도/사천시

사천...와룡동사지 석탑부재

by 임병기(선과) 2020. 9. 5.
728x90
728x90

 

와룡동 사지 (臥龍洞寺址)

와룡산의 남쪽 산자락 와룡골에 있었다고 전하는 절로, 삼한갑찰(三韓甲刹)의 하나였다고 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고문헌에 고려 현종(1,009~1,031)이 왕위에 오르기 전 유배 온 아버지(왕욱)지냈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왕욱은 왕건의 여덟번째 아들이며, 민가 주인은 그 외에도 민간에 전하는 이야기를 길게 말씀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운사 진명국사비(1,272)에는 진명국사의 하산소로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후 조선 숙종 재위 시에 다솔사(多率寺)의 전신인 영악사(靈嶽寺)를 중창하고 세운 중건비(1,704)에 영호남 고을의 여러 절과 더불어, 와룡사도 참여한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조선 후기의 영남지도, 해동지도 등에 사찰 표시가 남아 있어 18~19세기에도 향화를 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명국사 혼원

"수선사 제4세 혼원(混元, 1191〜1271년)은 성이 이씨, 호는 충경(녑鏡)으로 황해도 수안(遂安) 출신이다.

혼원은 사굴산문 범일의 운손(雲孫, 범일로부터 9대손)인 종헌(宗軒)에게 출가했다. 13세 때 외삼촌인 종헌선사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사굴산문에서 선풍을 전개하다가 선선(禪選)의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했다. 혼원은 쌍봉사의 청우(靑牛)를 모시고 정진하다가 수선사 제2세 혜심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후 수선사 제3세인 청진국사 몽여의 지도를 받아 수행했다.

 

당시 권력자 최우가 그의 도행(道行)을 흠모해 왕에게 아뢰어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내리고 정혜사의 주지로 임명했다. 그러나 혼원은 곧 바로 사양하고 전국을 유행하며 법을 설했다. 1245년 54세에 최우가 강화도에 선원사를 창건하고 낙성회를 열면서 혼원에게 주맹(主盟, 법회의 책임자)이 될 것을 청하자, 혼원은 승려 200여명을 이끌고 강화도에 들어가 선원사에 머물렀다. 혼원이 선원사에 머물 당시 국왕과 대신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산으로 돌아갈 것을 청했다.

 

1252년 몽여가 입적하자, 혼원은 왕으로부터 조계산 수선사의 제4세 사주(社主)로 임명받고, 이때부터 수선사에서 선풍을 펼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혼원은 혜심이 머물렀던 단속사(斷俗寺)를 감독하는 도감(都監)으로 임명받았다.

65세의 혼원은 천영에게 수선사 사주 자리를 물려주고 은거했으나 다시 고종의 부름을 받고 자운사로 옮겼으며, 1259년 왕사로 책봉됐다. 1260년 원종이 즉위한 뒤에도 특별히 예우하고 존숭했지만 다음해 다시 수선사로 돌아와 설법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했다.

 

선사는 80세까지 왕사의 자리에서 불교계를 주도했으며, 늘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을 제도했다. 혼원은 솔직담백하면서도 해학이 있어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지냈다. 혼원은 수선사 선풍을 여러 지역에까지 널리 펼쳤으며, 스승의 선풍을 본받아 선교융합적인 간화선을 계승 발전시켰다. 80세에 혼원이 입적한 후에 국사로 추증됐다. 시호는 진명(眞明), 탑호는 보광(普光)이다." (불교 신문)


 

현재 사지에는 석축, 우물터 등이 유존하고 있으나, 풀이 우거져 답사가 불가능하며, 민가 주인의 말씀에 의하면 경작지 곳곳에 기와, 도자를 비롯하여 치석재가 많이 산포되어 있다고 합니다.

 

 

민가

 

 

석축

 

 

석탑 부재

경작지에서 발견되어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합니다.

 

4매로 결구된 기단 갑석의 2매로 추정됩니다.

각호의 2단 탑신굄이 뚜렷합니다.

 

사적으로 미루어 11~12세기 조성하였던 탑재로 추정됩니다.

 

 

기단 갑석(1)

 

 

 

 

기단 갑석(2)

 

 

 

치석재

 

 

겨울날

다시 와야겠습니다.

 

막걸리 사들고...

 

2020.08.25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