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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사천시

사천...일본인 국내 이주 기념비

by 임병기(선과) 2020.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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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진삼로 180-23 민가 뒤편 야산에 위치합니다.

 

고 심충성 군이 올린 글을 찾아 들렸습니다.

민가 앞에 주차후 불과 10분 미만이면 오를 수 있지만, 녹음 짙은 계절에는 길이 없어 주의를 요합니다.

 

3단으로 쌓은 바위 위에 있었던 비석이 땅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기단부

 

상부 비좌

 

 

비는

앞면 상단에 조성 동기, 하단에 비석을 세운 사람, 측면에 글쓴이와  새긴 사람을 각기 구분하여 음각하였습니다.

명문은 1912년 후쿠오카에서 사천으로 이주하여 척박한 땅을 가꾸어 비옥하게 가꾸었다는 내용으로 이주 25년 후 1937년에 세웠습니다.

 

 

조성 동기

 

세운 사람

 

글쓴이, 새긴 사람

 

제 사진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귀한 자료를 공유해 준 심충성 군의 뜻을 기려 그가 올렸던 사진과 글을 아래에 전재합니다. 거듭 고인의 열정에 감사드리며 명복을 빕니다.

 

明治 四十三年 日韓倂合成リ 東洋ノ平和確立セラル

명치 사십삼년(1910년) 일한병합을 성공하여 동양의 평화확립을 하였다.

 

兹ニ 東洋拓殖株式會社ハ 朝鮮農業ノ 改良發達ヲ 計ルト共ニ 內鮮一如ノ基調タラシメンカ爲 內地人農家ノ 朝鮮移住ヲ  圗ル

이에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농업의 개량발달을 계획하면서 동시에 조선안의 기조까지 탄탄하게 하기 위해 일본인 농가의 조선이주를 계획했다. 

 

福岡縣 糸島郡 櫻井村 林熊四郞ハ 村長臼 杵桝太郞氏ヨリ 此ノ 旨勧奨ヲ受ケ 同志 浦熊吉及 城戶松太郞ト 共力奔走 十戶ヲ以 テ 櫻井團ヲ 組織シ 選ハレテ 團長トナリ 一同 渡鲜 此處ニ 定住ス

후쿠오카현 이토시마군 사쿠라이촌 임웅사랑은 촌장인 저승태랑씨에게 이 뜻을 전하여 장려해 줄 동지 포웅길과 성호송태랑과 함께 힘을 합쳐 분주히 열 집으로 앵정단을  조직하여 선발하고 단장과 더불어 조선으로 건너와서 이곳에 정착했다.    

 

時維 明治 四十五年 四月 三日ノ 佳日トス

때는 명치 사십오년(1912년) 사월 삼일의 좋은 날이었다.

 

爾來 團員 協力一致チ 辛萬苦ヲ 忍ヒ 農林業ノ 改良發達ノ 爲 奮勵努力即チ 枯渇ノ 瘠地ハ 變シテ 沃土トナリ 荒寥ノ 山姿ハ 化 シテ翠巒トナル

이 곳에 와서 단원들이 협력하고 뭉쳐서 많은 고생을 힘써 참고 농림업 개량발달을 위해 힘써 노력한즉 메마르고 척박한 땅을 바꾸어 옥토가 되었고 거칠고 쓸쓸한 산 모양을 달라지게 하여 푸른 산봉우리가 되었다.     

 

團員ハ 又克ク 部民ト和シ民風ノ改善ニ 勉 メ 勤倹力行 産ヲ治メ以テ 遂ニ 今日ノ 平和 鄕ヲ 建設シ其ノ目的ノ大半ヲ達セリ

단원은 또 용케 부락의 사람을 화합하여 풍속의 개선에 노력하고 부지런함과 검소함을 힘써 행해서 생업을 이어감으로써 드디어 오늘 평화로운 마을을 건설하고 그 목적을 대부분 달성했다.       

 

之一ニ皇威ノ然ラシムル所ナリト雖モ 一面 又 東拓會社竝ニ 諸官署ノ 適切ナル 指導ヲ辱フシタルニ依ル所ニシテ誠ニ感激ニ堪ヘス乃テ相議リテ碑ヲ建テ之ヲ不朽 ニ記念スルモノナリ

 처음으로 천황의 위엄이 분명하게 되었고 비록 일개 면이지만 동시에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어울렸다.여러 관청의 관리들과 적절한 지도를 욕되지 않게 하는 바니 진실로 감격에 겨웠다.이에 서로 의논하여 비를 세우게 되니 썩어 없어지지 않게 기념하는 바이다.     

       

廿五週年 満期 記念日 昭和 十二年 四月 三日

25주년 만기 기념일 소화 십이년(1937년) 사월 삼일

 

建設者

林熊四郞 矢野二道 城戶景三郞 竹浦想七 林保太郞 浦本一 小林又五郞 三木吏壯

건설자

임웅사랑 시야이도 성호경삼랑 죽포상칠 임보태랑 포본일 소림우오랑 삼목리장

 

書 前田洛水

글쓴이 전전낙수 

 

工 古野定太郞

새긴이 고야정태랑

 

치욕적인  역사의 산물이지만

우리 모두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해 보존이 필요하며,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2020.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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