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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사천시

사천...용산리사지(서봉사지) 승탑. 서봉암 목조대세지보살

by 임병기(선과) 2020.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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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용산리사지.

경남기념물 제178호입니다.

그러나. 사천시사, 곤양면지 등에는 서봉사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봉사지(栖鳳寺址)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龍山里)에 주산(主山)인 봉명산록(鳳鳴山麓) 북쪽에 서봉사의 옛 절터가 아직 남아 있다. 
서봉사가 언제 누구에 의해 창건되고 또 언제 폐허화 됐는지를 모르고 있었는데 근래에 묻혀 있던 서봉사기(栖鳳寺記)를 찾아냄으로써, 역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사찰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사찰에 관한 기록으로는 먼저 영봉산(靈鳳山) 용암사(龍岩寺) 중창기(重創記), 서봉사사적( 事蹟) 등이었다.

 

서봉사 사적은 서기 1726년(영조 2년)경에 이뤄진 목판본 사지(寺誌)로 현재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서봉사적은 1336년 즉, 고려 충숙왕 복위 2년에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쓴 사적기와 1657년(효종 8년)에 최응천(崔應天)이 쓴 서봉사기를 합하여 편찬한 것이다.기록에 의하면, 신라눌지왕(417∼457년)때에 이 절이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 아직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이라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진평왕 때는 운집대사(雲集大師)가, 문무왕(661∼680년)때는 의명(義明)대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중수(重修)했다고 한다. 신문왕(681∼691년)때는 신라의 두 왕자가 이곳에 와서 의명대사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머물렀다. 두 왕자는 곧 삼국유사에 보이는 신문왕의 아들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인 듯하다. 두 왕자는 4년간에 걸쳐 창건했다. 새로이 50여 칸(間)의 건물을 세웠고 석등을 조성하였다. 또한 이들은 대왕대비를 위해 금당의 주불 석가여래와 그 보처(補處)보살상을 주조하여 조성하기로 했다. 이 때 절이름을 봉암사(鳳岩寺)라고 했는데 동쪽 봉우리 우봉암(雨鳳岩)에서 취한 것이었다.


 9세기 중엽 법량선사(法諒禪師)가 이 절에 주석(主席) 했는데 그는 이 절이 위치한 석봉산(石鳳山)을 영봉산(靈鳳山)으로 고쳤다. 법경은 당시 혜해(慧解) 제일로 손꼽히던 고승이다. 법경은 아마도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혜소(慧昭:774∼850년)의 제자 법량(法亮)과 동일 인물일 것으로 추측된다.


서봉사는 왕실의 도움으로 1315년부터 1318년까지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고, 조선 광해군 6년(1614년)에 의현(義玄)스님이 중창했고 이로부터 8∼9년 후인 1622년 및 1623년에는 일잠(一岑), 경희(敬熙) 등이 서로 발원해 불전과 동서선실을 지었다.    

 

최응천이 1657년(효종 8년)에 서봉사기에는  절의 규모가 대단하여 다음과 같은 전당(殿堂)이 늘어서 있었던 것이다. 

대웅전 구층탑 팔상전 영산전 명부전 영자전 향로전 봉황루 봉하루 선당 승당 동상실 서상실 청산요 두월요 함월당 만월당 매구당 열반당 봉황문 세진정 등이 있음이다.   

 

 17세기 중렵의 미륵암과 봉암과 직조암(直照庵)의 동서남의 삼암자는 서봉사에 속한 암자였고 직조암에 대해서는,

무용(無用) 수연(秀演 : 1651∼1719년)이 쓴 영남로곤양군봉명산 직조암신성모연문(嶺南路昆陽郡鳳鳴山直照庵新成募緣文)이 전해진다. 무용당집하권(無用堂集下卷)에 의하면 서봉사 남쪽 백보 쯤 밖에 절터가 있었고 광밀(廣密)이라고 하는 스님이 직조암 재건의 발원으로 세웠던 것이다. 조선 후기 이곳 서봉사에서는 불전(佛典)을 간행 그 인본(印本)이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599년(선조 32년)에 간행된 묘법연화경언해를 비롯하여 묘법연화경(1649년), 운수단가사(雲水壇柯司:1659년), 천지명양수륙재찬요(天地冥陽水陸齋簒要:1659년) 등이 있고 또한 간행연도를 알 수 없는 묘법연화경도 있다" (사천시사, 곤영면지에서 발췌)

 

 

그러나, 2.109년 발행된 한국의 사지에는 서봉사(栖鳳寺)를 棲, 西로도 표기되며, 용암사(龍岩寺) 중창기(重創記)는 진주 이반성면의 용암사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천시사 자료에는 폐사 시기를 알 수 없다고 하였으나, 경상도읍지(1,832), 영남읍지(1,871)에는 고유금무(古有今無)로 기록되어 있어 19세기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한국의 사지에는 설명되어 있습니다.

 

진주.용암사지

blog.daum.net/12977705/8725713

 

진주...용봉산 용암사지

2008년 2월. 정문부를 배향하는 해주정씨 재실 장덕재章德齋 외삼문 앞은 축사가 들어서 있었다. 비연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재실 관리인이 거주하는 관리사에는 병색이 완연한 목소리에 거동이 �

blog.daum.net

 

 

현재 사지에는 5단 석축, 석탑 옥개석, 괘불지주, 맷돌, 치석재가, 와편, 도자편이 산포하고 있으나 풀이 우거져 겨울을 기약했습니다.

 

석탑 옥개석은 1,657년 고성 현령 최응천의 서봉사기에 장육존상과 더불어 언급된 구층석탑 부재 같습니다.

 

 

부도전

곤양면지에는 6기 부도가 있다고 하였으나 낮은 돌담장안에 3기만 남아 있습니다.

 

 

조선후기 부도

 

 

효월당 曉月堂

탑신과, 옥개석

옥개석은 본래 부재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계미 시월 癸未 十月

계미년

1,643. 1,703. 1,763?

광해군 6년(1614년) 의현(義玄)스님이 중창, 1622년 및 1623년에는 일잠(一岑), 경희(敬熙) 등이 불사

최응천이 1657년(효종 8년)에 서봉사기에는 절의 규모가 대단하여 장육존상, 구층탑, 많은 불전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1,643~1,703년 사이에 주석하였던 스님 부도 같습니다.

 

 

탑신석 상부에 16엽 단판복련을 새겼습니다.

 

 

옥개석 하부

추녀와 사래

 

 

옥개석 상부

사모지붕, 보주, 기왓골이 깊습니다.

 

 

 

 

풍O당OOO(楓O堂OOO)

뒤의 OOO은 대선사(大禪師)로 보입니다

위패에 당호를 새겼으며, 탑신석만 부도재입니다.

 

 

 

정면 당호

양측면에는 중호문 重弧紋을 새겼습니다

 

 

중호문

 

 

 

 

처렴당(處染堂)

위패에 당호를 새겼으며, 훼손이 심하며 탑신석만 부도재입니다.

 

 

 

 

 

위패에 당호를 새긴 부도는 바로 옆 다솔사 부도전에도 보여, 동일 계열의 장인, 승려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다솔사 부도전

blog.daum.net/12977705/8725835 

 

사천...다솔사 부도전

부도전 조선후기 석종형 부도 3기가 봉안되어 있다. 성진당대사신협 性堂大師信冾 대좌에 큼지막한 복련,간엽을 새기고, 탑신과 보주를 일석으로 조성하였다. 탑신 중앙에는 연화좌위 전각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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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암에서 바라본 전경

 

 

서봉암

주지 스님께서는 서봉사지의 산내암자로 추정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조대세지보살

단독으로 모셔진 경우는 없는 까닭에 아미타불의 우협시보살임을 추론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은 서봉사에 있었던 보살상으로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다녀가신 몇몇 분이 18세기 상으로 추정하였다고 합니다.

 

 

 

 

연화대석

중대석은 임시로 가공한 목조입니다.

초파일 관욕시에 활용되며, 상부에 크게 홈이 있어 불상대좌는 아닙니다.

부도 상대석으로 생각했지만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돌확

 

 

누구의 글씨인지.

 

 

사지에서 옥개석을 비롯하여 석조부재를 찾지 못하고,

대세지보살을 뵙기 위해 들린 서봉암의 스님께서 비 맞은 생쥐꼴을 한 두 사람에게 시원한 수박을 가져오셨습니다.

평생 잊지 못할 수박 맛, 그리고 스님의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겨울에 꼭 다시 찾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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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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