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기도/가평군

가평...조종암(朝宗巖)

by 임병기(선과) 2020. 8. 2.
728x90
728x90

조종암(朝宗巖)

가평군 대보리 조종천변 바위.

1,684년 가평 군수 이제두, 허격, 백해명 세 사람이  암벽에 글씨를 새기고 조종암으로 명했다고 합니다.

이후 조종암은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깊은 이해는 없었으나 사대사상이라는 생각에 조종암 앞을 두어 번 스쳤지만 젊은 객기에 들리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조종암이 위치한 곳은

조종면 대보리로 조종암에서 행정명이 유래되었으며 대보리도 인근 명나라 황제를 모신  대통묘(大統廟)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 순조 31년(1831)에는 명나라 9의사(병자호란 때 청에 잡혀간 봉림대군과 합심하여 인조 23년 대군이 귀국할 때 우리나라로 망명했던 명나라 사람들)의 후손이 이곳에 와서 지방 유림들과 함께 대통행묘(大統行廟)와 구의행사(九義行祠)를 세워 명나라 태조와 9의사를 위한 제사를 지내었다."(문화재청)

 

()

 (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

 

1684( 10) () (), () () () . , , . 1804( 4) () .

 

조종암기실비

유명조선국 가평군 조종암 기실비
일만 강류가 바다로 쏟아져 바다를 왕으로 삼고 있듯이 왕자의 일은 제후의 조회를 받는 일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강한이 동으로 흐르는 것을 일컬어 조종이라 하는데 이 말은 우공에서부터 비롯하여 ‘춘추’가 지어지면서 그 뜻이 더 분명해져 크게 일통하는 뜻을 의미하게 되었다. 무릇 공허한 이름을 가지고 천하후세에 호령해도 사람이 너 나 엇이 비분강개하여 옷을 벗어 던지고 달려갈 듯이 하는데, 이는 누가 시켜서 그렇다는 말인가? 이 점이 바로 조종암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연유이기도 하다.


바위는 가평에 있는데 가평은 해동의 궁벽한 고을이고 특히 조종은 마을 이름인 것이다. 한사람의 호의자가 있어 일찍이 그 명칭에 감탄하고 이르기를, “이곳은 천하의 건정시이다. 지난날 임진 계사의 난리에 기자의 봉강을 통 털어 주리를 면하게 된 것은 황제의 힘이 아니었겠느냐?

 

아! 그러나 명의 사직은 이미 무너지고 중원은 더러운 땅이 되어 우리들은 우모할 곳이 없었는데 다행히 여기에서 얻었다.”고 하고 마침내 마을 북쪽의 큰 바위 하나에 의종황제가 쓴 ‘사무사’ 석 자를 새겼는데, 이는 바로 배신 문정공 김상헌이 심양에 구류당했을 때 얻어온 것이다. 다음에는 ‘만절필동’ 넉 자인데, 이는 우리 소경왕의 신한이고 조금 왼쪽에 새긴 것은 ‘재조번방’인데, 무술년의 주문에서 나온 것이며 또 ‘날은 저물고 길을 멀으니 지극한 아픔이 마음에 있다.’이란 문귀는 효종께서 재상인 이경여에게 내린 윤음으로 문정공 송시열이 쓴 것이다.

 

바위 면에 전액하기를 조종암이라 한 것은 낭선공의 아들인 우이다. 처음에 창해 허격이 그 일을 주창하였고, 찬조한 사람은 고을의 수재 백생이다. 따라서 앞으로 사당을 세워 신종황제를 제사지내려 하였는데 송 문정공이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의종황제를 어떻게 빼놓겠는가?”하였다.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선생께서 돌아가셨고 그 문인 한수선생이 그 뜻을 이어 화양산중에 만동묘를 세웠는데, 이는 조종암이 이루어진 전조이고 또 황단이 이루어진 시초이기도 하다.

 

한편 선조와 효종 두 임금을 배향하려 하였으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비록 그만두기는 하였으나 이 역시 이 뜻을 미루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두 분의 글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배신이 그 임금을 따르는 것은 뭇 제후가 천자를 따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점이 또 단의 논의가 끝나지 않은 점은 아니겠는가?


무릇 덕을 생각한 것은 순인 것이고 오매간에 풍천을 생각하는 것은 시대가 불행했던 것이다. 물에다 비유하자면 흐름이 멈추지 않은 것과 같고 바다로 나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혹은 평파가 되기도 하는데 이는 무사할 때에 흐르는 모습이고 혹은 큰 여울도 되고 급한 파도가 되어 용문에 부딪치고 지주를 뒤흔들기도 하는데 이는 천하의 변란이 극에 다달음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물이 즐겨 그런 것이겠는가? 그저 본성이 그럴 뿐인 것이다. 선조 갑진년에 판서 황승원이 본군에 외보되어 바위를 등지고 6칸의 집을 지어 또 조종암이라고 명명하였는데 해가 오래되어 퇴락하니 곁에 사는 인사들이 동심합력하여 보수하고 돌을 떠다가 글을 새겼으니 어떻게 작은 마을에 이토록 충신이 많을 수 있을까?


옛날 우옹이 창강 조속과 함께 처사 신만을 찾아가서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눴는데 말이 격해지자 조공이 김탁영의 조천부를 외우니 서로 크게 탄식하기를, “지난날에는 사대부가 상국을 유람하였으니 지금 사람과는 처지가 다르다.”고 하였다. 아! 지금 사람으로 이러한 뜻을 아는 이도 드물다. 마멸되지 않은 것은 오직 석면의 먹 자국뿐이고 번쩍거리는 먹 자국은 조천부의 냉화보다 낫다 할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양추 일백이 천지간에 아직도 부쳐있다고 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숭록대부 행 호조판서 겸 지경연 실록사 홍문관 제학 조진관은 글을 짓고,
정헌대부 원임 이조판서 겸 동지경연 성균관사 김달순은 글을 썼으며,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서매수는 전액을 하다.

숭정기원후 세 번째 갑자년(순조 4, 1804년) 월 세움.

 

조종천

 

바위 각자

 

사무사 思無邪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의 글씨.

논에에서 유래하였으며 생각에는 사악함이 없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바위 각자

 

일모도원 지통재심 日暮途遠 至痛在心

청나라에 복수를 불태우던 효종의 시. 우암의 글씨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먼데,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마음속에 있다

 

부여 백마강 건너 부산에도 같은 글씨가 있습니다.

 

부산 각서석(사진.문화재청)

 

만절필동 재조번방 萬折必東 再造藩邦

선조의 글씨.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청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였습니다.

 

만절필동 萬折必東

괴산 화양서원 옆 만동묘와 유래는 동일합니다.

 

괴산,우암 송시열 유적지

http://cafe.daum.net/moonhawje/DjZP/2063?q=%EA%B4%B4%EC%82%B0...%EC%9A%B0%EC%95%94%EC%86%A1%EC%8B%9C%EC%97%B4%20%EC%9C%A0%EC%A0%81%EC%A7%80

 

재조번방 再造藩邦

다시 조선을 되찾았는지...

 

 

 

조종암 朝宗巖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이우의 글씨

 

낭선군[1637(인조15)~1693(숙종19)]은 옛 명필들의 글씨를 모아 서첩을 만든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의 편찬자인 선조(宣祖)의 손자인 이우(李俁)이다낭선군은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에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하기 위해서 단양, 영주을 거쳐 부석사를 경유하였습니다. 동행한 동생 낭원군 이간 朗原君 李偘(인조18년(1640)∼숙종25년(1699)과 함께 경로에 암각문을 많이 남겼습니다.

 

백비?

 

견심정  見心亭

1874년 성재 유중교의 일행이 새겼다고 합니다.

 

 

 

조종암(朝宗巖). 숭명배청(崇明排淸). 중화(中華). 숭정(崇禎) 년호.

그리고

오늘의 현실, 약소국의 운명이라고 자위하기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2020.07.04

728x90
728x90

'경기도 > 가평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평...태봉리 선조 왕자 태비  (0) 2020.08.02
가평...소설산 소설암지  (0) 2020.04.23
가평...중종대왕 태실  (0) 2020.04.22
가평...운악산 현등사  (0) 2020.04.21
가평...대원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0) 2014.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