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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가평군

가평...소설산 소설암지

by 임병기(선과) 2020.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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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암지 小雪庵址

설악면 설곡리 691

마을 뒤편에 위치한 사지입니다. 오직 사지에 남아 있는 부도 답사 목적으로 들렸지만 글을 준비하면서 반전이 있었습니다.

문화재청 발간 한국의 사지

"『세종실록지리지』에 공민왕 5년 國師 普愚가 우거하다 고 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佛宇條에 기록하면서 보우의 사리탑이 있다고 하다.이후 『여지도서』와 『범 우고』에는 폐사되었다고 하므로 고려시대 후기부터 조선 시대 중기까지 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창건과 폐사에 대한 사적이 전하지 않은 사지입니다.

그런데, 2001년 홍수로 인해 권근이 찬한 원증국사 사리탑편이 발견되어 사지가 원증국사( 태고 보우)가 열반에 들었던 소설암지로 확인되었습니다.

 

먼저, 북한산 태고사에 있는 태고 보우 부도비명의 일부를 발췌하였습니다.

[ : 1301( 27)~1382( 8)] . () () 3 1385( 11)

 

"임술년(壬戌年)여름 소설암(小雪庵)으로 돌아와 그 해 12월 17일 미질(微疾)을 느끼게 되었다. 23일에 이르러 문인(門人)을 불러 앉히고 이르기를 “내일 유시(酉時)에 나는 떠날 것이니 지군(知郡)에게 청하여 국사의 인장(印章)과 구점(口占)으로 남긴 사세장(辭世狀) 수통(數通)등을 봉하여 임금께 전달하라”고 당부하였다. 때가 다가옴에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은 다음 단정히 앉아 임종게(臨終偈) 사구(四句)를 설하고, 그 소리가 끝나자마자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다. 부음을 우왕(禑王)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심히 진도(震悼)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월 12일 향목(香木)을 하사하여 화장하였다. 그 날 밤 광명(光明)이 하늘에 뻗쳤고 사리의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중 100과를 내전(內殿)의 임금에게 올리니, 이로 말미암아 임금은 더욱 경중(敬重)하시고 유사(攸司)에 명하여 시호를 원증(圓證)이라 하고 탑을 중흥사(重興寺)의 동쪽 봉우리에 세우고, 보월승공탑(寶月昇空塔)이라 이름하였다. 석종(石鍾)을 만들어 사리를 진장(鎭藏)한 것이 무려 세 곳이니 가은(加恩)의 양산사(陽山寺)양근(楊根)의 사나사(舍那寺) 미원현(迷源縣)의 소설암(小雪庵)  이다"

 

태고보우의 부도가 소설암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산 태고사 원증국사 보우 부도,부도비

http://cafe.daum.net/moonhawje/DjZP/3872?q=%EA%B3%A0%EC%96%91...%ED%83%9C%EA%B3%A0%EC%82%AC%20%EC%9B%90%EC%A6%9D%EA%B5%AD%EC%82%AC%20%EB%B6%80%EB%8F%84.%EB%B6%80%EB%8F%84%EB%B9%84

 

양평 사나사 원증국사 보우 부도, 부도비

http://cafe.daum.net/indramang1/9WU8/629?q=%EC%96%91%ED%8F%89...%EC%82%AC%EB%82%98%EC%82%AC

 

태고사 부도비문에 실려있는 가은加恩의 양산사陽山寺는 문경 봉암사입니다.

봉암사 경내의 "석종형 부도"로 칭하는 부도가 태고 보우의 부도로 전합니다.

 

문경 봉암사 (전) 태고 보우 부도

http://cafe.daum.net/moonhawje/DjZP/2249?q=%EB%AC%B8%EA%B2%BD...%ED%9D%AC%EC%96%91%EC%82%B0%20%EB%B4%89%EC%95%94%EC%82%AC(1)

 

그리고 2001년 부도비 파편이 발견된 소설암지에 원증국사 부도, 부도비가 있었습니다.

소설암은 선사가 오랫동안 주석하였으며 열반에 든 절집입니다.

 

부도비문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이성계의 왕조 창건에 중심적인 역할을 권근(1,352~1,409)이 찬하였으며, 양촌문집陽村文集에 실려 있습니다.

 

권근은 대지국사 요청으로 부도비문을 찬하였습니다.

 

한국고전종합 DB(양촌문집 陽村文集)

 

"迷源縣小雪山菴圓證國師舍利塔銘 幷序

王師圓應尊者馳書於予曰。吾先師大古國師。大有異德。及示寂。舍利甚多。上心敬重。命有司諡曰圓證。

塔曰寶月昇空。樹于重興寺東峯。牧隱相國奉敎以銘。礱石作鍾。藏舍利非一所。曰陽山,舍那,靑松,大古菴是已。又於迷源小雪菴。樹塔以藏。小雪。師之所始終焉者也。師嘗入龍門山。發十二大願。自是道日進。旣有得。遊入中國。謁石屋珙公於潮洲。一言相契。授以信具。石屋。臨濟之直派也。及東還過迷源。有老吏泣請留。因卓菴於龍門之北麓。號之曰小雪山。躬耕以居者累稔。此師所以始之也。玄陵封王師。尊禮甚極。雖有歷居廣明,陽山,迦智等寺。間必往小雪居焉。初。鷲城旽以左道惑上。師白於玄陵曰。彼實邪妄。願

上勿邇。玄陵不詧。旽含之。旽始用事。師還印章。寓於全之普光寺。旽欲害之。誣以㳅言。幽之俗離山。未幾。玄陵悔之。請還小雪。旽果逆誅。玄陵曰。吾恨不用吾師之言。遣使加封國師。今上嗣位。請住陽山寺。又封國師。壬戌夏。師年八十二矣。自陽山還小雪。冬十二月示疾。定時日如期而逝。此師所以終之也。始於此卓錫。終於此茶毗。樹塔於此亦宜也。諸藏舍利之所。皆得巨筆以誌。獨於小雪。尙未有銘者非歉歟。時之大儒若牧隱,陶隱,三峯諸公皆已有言於吾師。而吾子獨無。幸無讓。予不敢居數君子之列。固辭不獲命。

乃言曰。佛氏之道玄微高遠。固難以言語形容。况儒者所不究。敢妄議哉。惟師之德相孚於石屋。師之智卒驗於鷲城。所造可謂高矣。所見可謂明矣。然其閫奧。非具眼者莫能知。惟舍利之異。赫然播人耳目。聞者起敬信之心。是宜藏而表之。以示於無窮也。

 

銘曰。

能仁道大。包含無際。五葉東敷。開士繼繼。粤吾大古。允也天啓。遠參于珙。惟道之契。先見于旽。惟智之睿。道則高矣人莫能睇。赫然舍利。衆所瞻彩。宜藏名山。永示來世。
 
왕사(王師) 원응 존자(圓應尊者)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우리 선사(先師) 태고국사(太古國師)가 남달리 특이한 인격을 갖추었습니다. 시적(示寂)하실 때 사리(舍利)가 매우 많으므로 상께서 마음속으로 몹시 경모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원증(圓證)이란 시호를 내리는 동시, 그 탑은 보월승공(寶月昇空)이라 하여 중흥사(重興寺) 동쪽 봉우리에 세우게 하였는데, 상국(相國)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왕명을 받들어 명(銘)을 썼습니다.
 
이처럼 돌을 갈아 종(鐘)을 만들어서 사리를 안치한 곳이 한 군데가 아니니, 양산(陽山)에 있는 사나암(舍那菴)과 청송(靑松)에 있는 태고암(太古菴) 등이 바로 그것이요, 또 미원현(迷源縣) 소설암(小雪菴)에 탑을 세워 사리를 간직하였으니, 소설암은 곧 선사께서 시종 일생을 마치신 곳입니다.
 
선사께서는 일찍이 용문산(龍門山)에 들어가 십이대원(十二大願)을 발원하였는데, 이때부터 수도(修道)가 날로 진취되었습니다. 도를 깨달은 다음 중국에 들어가 조주(潮洲)에서 석옥 청공(石屋淸珙 석옥은 자. 원(元) 나라 중)을 배알하였는데, 말 한 마디에 서로 뜻이 맞아 그는 신구(信具 신표(信表)로 주는 물건)를 주기까지 하였으니, 석옥은 곧 임제(臨濟)의 직계 정통파였습니다. 선사께서 우리나라에 돌아와 미원현을 지날 적에, 한 늙은 아전이 울면서 머물기를 간청하고는 곧 용문산 북쪽 산기슭에 암자를 지었으니, 이것이 곧 소설산암(小雪山菴)입니다. 여기에서 몸소 밭을 갈며 우거(寓居)하신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이는 선사께서 시발하신 곳입니다.
 
현릉(玄陵 공민왕을 가리킨다)이 왕사(王師)로 봉하고 예우하기를 매우 극진히 하였습니다. 비록 광명(廣明)ㆍ양산(陽山)ㆍ가지(迦智) 등의 절을 거쳐 다녔으나 끝내는 소설암에 돌아와 거쳐하셨습니다. 처음에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 신돈(辛旽)이 사도(邪道)로 상(上 공민왕)을 현혹하므로, 선사께서 현릉에게 아뢰기를 “그는 실로 망녕된 사도를 부리는 사람이니 상께서는 가까이 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현릉은 이 말을 잘 듣지 않았고, 신돈은 이것으로 앙심을 품었던 것입니다. 신돈이 비로소 권력(權力)을 부리게 되자 선사께서는 인장(印章)을 되돌리고 전주(全州)에 있는 보광사(普光寺)에 우거하셨습니다. 신돈이 선사를 해치고자, 유언(流言)을 퍼뜨린다고 모함하여 속리산(俗離山)으로 추방해 못 나오게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현릉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소설암에 돌아오기를 간청하였습니다. 신돈이 과연 반역의 죄로 죽임을 당하자 현릉은 “내가 우리 선사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 하고, 사람을 보내 국사(國師)로 높여 봉하였습니다.
 
금상(今上 우왕)이 즉위하여 양산(陽山)에 머물기를 청하고 또다시 국사로 봉하였습니다. 임술년(1382, 우왕8) 여름에 선사의 연세 82세로 양산에서 소설암으로 돌아와, 그 해 겨울 12월에 병들어 선사께서 정하신 바로 그 시일에 세상을 뜨셨으니, 이는 선사께서 종신한 곳입니다. 처음에도 여기에 머물게 되었고 종말에도 여기에서 다비(茶毗)하게 되었으니, 여기에 탑을 세우는 것이 또한 마땅합니다. 사리를 안치한 곳곳마다 모두 훌륭한 솜씨를 빌어 명기(銘記)하였는데, 유독 소설에만 아직까지 명기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어찌 서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시의 대유(大儒) 목은ㆍ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ㆍ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같은 여러 분들이 모두 우리 선사에 대해 글을 지어 주었는데, 그대만이 유독 없으니 사양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내 감히 이상 여러 군자들의 반열에 참여할 수 없어 굳이 사양하였으나, 끝내 받아주지 않기에 마침내 말하노니, 부처의 도는 깊고 은미하며 높고 멀어서 실로 언어로 형용하기 어려운 것인데, 황차 유생이 궁구하지 않은 것을 감히 망녕되이 의논할 수 있겠는가. 오직 선사의 덕이 석옥과 서로 부합되고, 선사의 지혜가 끝내 취성(鷲城)에게 징험되었으니, 그 조예와 식견이 과연 고명하다 이를 만하다. 그러나 그의 깊은 포부는 안목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능히 알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사리(舍利)의 이적은 사람들 이목에 환하게 알려져 있어, 이를 듣는 사람은 모두 경모하며 신봉하는 마음을 일으키리니, 이 마땅히 사리를 간직하고 그 이적을 표양하여 무궁한 후세에 나타내야 하리라.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부처님의 도가 커서 세상을 포용함에 끝이 없는데, 다섯 종파가 우리나라에 퍼지고 높은 스님들이 계통을 이었도다. 더구나 우리 태고 스님은 실로 하늘이 내신 분이라, 멀리 청공(淸珙)을 방문하매 그와 도가 부합되었으며, 신돈에게서 선견지명을 보였으니 오직 지혜가 슬기롭기 때문이라, 그 도는 너무도 높아서 사람들이 쳐다볼 수 없으나, 빛나는 사리는 뭇사람의 눈에 비추는 광채라, 명산에 안치하여 영원한 후세에 보임이 마땅하도다."

 

소설암지

경작지 석축을 제외하고 유구는 확인되지 않으며, 부도 1기가 사지를 지키고 있습니다.

여러 자료에 보이는 우물도 겨우 위치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부도

특별한 문양이 없으며, 보주는 있는듯 없는 듯.

방형 지대석도 본래 부재인지 불투명하며 당호를 새기지 않았습니다.

조선후기 부도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2004년 강원대학교의 "소설암지 및 화악리 절터 지표조사보고서"에는 태고보우 부도 가능성도 있다고 했습니다.

설악면 설곡리 691번지 일대에서 태고(太古) 보우국사(普愚國師)의 사리탑비편(舍利塔碑片)이 발견되었으므로 이곳이 소설암지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 원위치는 현재 사리탑비편이 폭우로 쓸려 내려온 것을 고려할 때 사리탐이 있는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곳에 사리탑이 1기만 있고, 사나사에 있는 보우국사의 사리탑이 석종형(石鐘形)이며, 고려말~조선초기에 해당하는 석종형 승탑들로 볼 때, 그러한 승탑 양식이 아직 확립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설암의 사리탑(승탑)이 보우국사의 승탑일 가능성이 있다. 현재 소설암터에는 석종형 부도 외에는 이렇다 할 유구ㆍ유물이 없지만, 태고 보우스님이 25년 넘게 주석하던 곳이고, 마지막 열반한 곳이기 때문에 불교신앙과 역사적인 면에서 아주 중요하다. 현재로서 소설암의 창건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대체로 1750년에서 60년 사이에 폐찰된 것으로 보인다"

 

 

 

 

 

왜 봉암사 부도비는 망실, 사나사와 소설암 부도비는 훼손되었을까요?

북한산 부도비와 부도는 온전한데.

 

2020,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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