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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화성시

화성...만의사지 선화당대사 부도. 부도군

by 임병기(선과) 2019.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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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의사

현재 동탄면 중리에 있습니다.

 

"신라 때 창건되어 당시에는 만의사()라 하였다. 1284년(고려 충렬왕 10) 정길()과 현묵()이 중창하였고, 1312년(충선왕 4) 당시 천태종 진구사() 주지였던 혼기()가 주지로 부임한 뒤 크게 중창하고 법화도량()을 열어 천태종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의선()이 사세를 더욱 키웠으며, 충혜왕 때의 주지 묘혜()는 요원()이 《법화영험전()》을 간행할 때 비용을 대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말 우왕(재위: 1375∼1388) 때부터는 천태종과 조계종에서 주지를 교대로 맡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이 절이 사전()과 노비를 많이 소유하여 부유했기 때문이다. 나라에서는 두 종파간 다툼이 심해지자 노비를 모두 수원부()에 속하게 하고 절은 천태종이 관할하게 하였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할 때 공이 컸던 신조()가 주지로 온 뒤부터 다시 노비를 받았으며, 사전 70결도 받았다고 한다. 조선 건국에 공이 큰 까닭에 억불숭유 정책을 편 조선시대에도 비교적 사세를 크게 폈다.

서산대사 휴정(: 1520∼1604)이 이 절에서 수도한 바 있고, 사명대사 유정()의 제자 선화()도 이곳에 머물다가 1644년(인조 22)에 입적하였다. 1669년(현종 10) 절터가 송시열()의 장지로 선택되자, 현재의 위치로 옮기며 이름을 만의사()로 바꾸었다. 1796년(정조 20) 수원화성을 쌓을 때 이 절의 동종을 가져다가 팔달문()에 옮겨 달았으며, 1894년(고종 31)에는 지장전이 무너져 내려 안에 있던지장보살상과 십대왕상, 판관상, 사자상, 인왕상 2구를 용주사로 옮긴 바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관음전.산신각·범종각·봉서루가 있고, 4동의 요사채가 있다. 유물은 1791년(정조 15) 제작된 지장보살 탱화가 유명하다. 한편 동탄면 신리의 옛 절터에는 대한불교법화종 소속 원각사()가 들어서 있다."

(두산백과사전)

 


만의사지 선화당 부도

기흥 CC 정문을 통과하여 주차장 뒤편 원각사에 위치.

부도전을 통과 후 개울을 건너  5분여 임도를 따라가면 이릅니다.

 

부도는

특별한 문양이  없는 종형부도로 탑신석과 크게 표현된 연화보주가 일석이며 몸돌에 당호를 새겼습니다.

 

선화당 경림대사.

대사의 출생과 입적 년대의 해석이 자료마다 제각각이며 잘 못된 자료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비문을 잘 못 새긴 듯 합니다.

비문에는 대사의 출생이 만력 병인생(萬曆丙寅生)으로 새겼지만 만력 년호에 병인년은 없습니다.

또한, 한국금석문종합정보영상시스템에 비를 세운 병술년을 1,706년으로 오기하였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그 단초를 비문을 찬하고,쓰고, 전액을 쓴 인물의 생몰년대와 부도비문 기준으로 역추적 하였습니다.

 

만력병인생    칠십팔입적

萬曆丙寅生 七十八入寂 

 

병술 팔월   일   립

丙戌 八月 日 立

 

찬 통훈대부 홍문수찬 정두경

撰 通訓大夫 弘文修撰 鄭斗卿(1597-1673)

서 자헌대부 형조판서 오 준

書 資憲大夫 刑曹判書  吳 竣(1587-1666)

전 가선대부 이조참판 여이징

篆 嘉善大夫 吏曹參判 呂爾徵(1588-1656)

 

즉, 3분의 생몰(1587년~1673년) 기간 중 병술(丙戌)년이 선화당대사의 부도비를 세운 1,666년 입니다.

출생년도는 부도비를 세운 1666년 이전의 병인(丙寅)년인 1,566년과 1626년으로 압축되며, 비문에 의하면 대사가 78세에 입적(七十八入寂)하였으므로 출생은 1,566년 입니다.

 

그런대 대사가 출생(1,566년)하여 78세에 입적하였다면 1,664년이 되기 때문에 부도비는 입적 후 2년이 지난 1,666년에 세웠습니다.

 

결론

선화당대사는 1,566년에 출생하여 1,664년에 입적하였습니다.

 

 

 

 

화성 단광사 선화당 경림대사바문華城 丹光寺 禪華堂 敬琳大師碑文(출처/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선화당대사(禪華堂大師) 비명(碑銘) 서문을 아울러 쓰다.

 

대사는 광주(廣州)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이(李)씨요 이름은 경림(敬琳)이다. 만력(萬曆) 병인(丙寅)년에 태어나서 16세에 출가(出家)하여 세수(世壽)79에 입적(入寂)하였으며 그의 스승은 서산(西山)대사의 제자인 송운(松雲)이었다.

대사의 성품은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품은 뜻과 행동은 고결(高潔)하여 인근에 풍문이 자자하여 대사를 찾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임종에 미쳐 제자 지해(智海) 보응(寶應) 등이 수원(水原) 화봉산(華鳳山) 만의사(萬義寺)에 부도(浮圖)를 세워 대사의 사리(舍利)를 봉안하였다. 그곳에 7개의 부도가 있는데 제일 첫 번째는 고려말(高麗末) 선사(禪師)로 사리를 봉안한 군▨조(君▨照)란 사람으로, 대사에 이르러 8번째 제자가 되는 것이다.

또 비석을 세워 명문(銘文)을 청해왔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아! 선사(禪師)는 참된 불법(佛法)을 담을 만한 그릇이었나니 어려서부터 속세(俗世)를 싫어하였도다.

추완(芻豢)마저도 감로(甘露)로 여긴 사람이니 집을 버림도 또한 그의 뜻이었도다.

서산(西山)을 할아버지로 하였으니 그 흐름은 그 근원을 지녔으며, 그 문(門)을 얻었으니 그것은 바로 불이문(不二門)이로다.

최고의 선정에서 큰 지혜(智慧)를 내니 툭 트여 더 이상의 성스러움이 없는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얻었도다.

힘있는 용과 코끼리는 부류를 넘어서니 멀고 가까움 없이 기쁜 바람이 불어오도다.

구름처럼 모여 다 기록할 수 없고 볼 수 없지만 보면 반드시 취하리로다.

떠나는 것은 순리(順理)요 삶은 더부살이니 나이 70에 8을 더하였도다.

대중들이 슬퍼하며 콧물 눈물을 흘리도다.

예전 대사의 존재는 커다란 그늘이더니 지금 가시니 이어받을 이 그 누구인가.

입적(入寂)의 날 신비로움을 보이시니 밤에 빛이 있어 천지(天地)를 밝히도다.

신발 한짝만 들고 노닐다 사리(舍利)를 떨어트리니 부도(浮圖)를 세워 사리(舍利)를 안치하도다.

무봉산(舞鳳山) 만의사(萬義寺)에 모든 것을 돌에 새겨 후세에 보이노라.

제자들이 와서 문자(文字)를 청하니 그 말에 따라 그 일을 기록하노라.

 

 

병술(丙戌)(1706년) 8월 일 세움

통훈대부(通訓大夫) 홍문수찬(弘文修撰) 정두경(鄭斗卿)이 찬술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 홍준(洪竣)이 글씨를 썼으며

가의대부(嘉義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여이징(呂爾徵)이 전액을 쓰다.

 

 

대시주(大施主) ▨대남(▨大男)

시주(施主) 김▨▨(金▨▨)

시주(施主)

대시(大施)

대시주(大施主) 박▨▨(朴▨▨) ▨춘▨대(▨春▨大)

시주(施主) 박춘▨(朴春▨) 난(難) 한인선(韓仁先) 금은금▨(今銀金▨) 박▨▨(朴▨▨) ▨▨▨ ▨

  

 

華城 丹光寺 禪華堂 敬琳大師碑文 

 禪華堂大師碑銘 幷序 

師廣州人 姓李氏 名敬琳 萬曆丙寅生 十六出家 七十八入寂 其師西山弟子松雲 師性根聰慧 志行高潔 遠近聞風 來役者甚衆 及終 弟子智海 寶應等 建浮圖于水源華鳳山萬義寺 安師舍利 有七浮圖 第一卽麗季禪師奉利君☐照者也 至師爲八弟子 又立石 來請銘 銘曰

   噫 禪師 眞法器 自童稚 厭塵界 易蒭豢 甘露者 棄其家 亦其志

   祖西山 沠有自 得其門 門不二  寂乎最 生大智 廓無聖 第一義

   力龍象 出乎類 無遠邇 悅風至  若雲集 不可記 有不見 見必醉

   適去順 生也寄 壽七十 加二四  大衆悲 感涕淚

   昔師存 大有庇 今也亡 誰其嗣  化之日 見靈異 夜有光 燭天地

   隻履遊 舍利墜 立浮圖 安舍利  舞鳳山 萬義寺 刻諸石 後世示

   弟子來 請文字 遵其言 記其事

                        丙戌 (1706) 八月 日 立

                       通訓大夫 弘文修撰 鄭斗卿 撰

                          資憲大夫刑曹判書 洪竣 書

                         嘉善大夫吏曹參判 呂爾徵 篆

大施主 ☐大男 施主 金☐☐ 施主    大施

大施主 朴☐☐

☐春☐大 施主 朴春☐

難 韓仁先 今銀金☐

朴☐☐ ☐☐☐ ☐

 

 

비문

 

 

이수 전면

 

 

이수후면

 

 

선화대사비명禪華堂大師碑銘

 

 

 

선화당대사부도 답사후 원각사로 내려 옵니다.

 

 

부도전

선화당 대사 비문에 기록된 7기 부도는 아닌 듯 합니다

 

"수원(水原) 화봉산(華鳳山) 만의사(萬義寺)에 부도(浮圖)를 세워 대사의 사리(舍利)를 봉안하였다. 그곳에 7개의 부도가 있는데 제일 첫 번째는 고려말(高麗末) 선사(禪師)로 사리를 봉안한 군▨조(君▨照)란 사람으로, 대사에 이르러 8번째 제자가 되는 것이다."

 

오히려 선화당 대사 부도 보다도 후기에 봉안된 부도로 당호를 새기지 않았습니다.

 

 

부도(1)

원구형 탑신만 유존 합니다

 

 

부도(2)

기단석 일부, 종형 탑신석만 우존하며, 일석인 보주는 훼손되엇습니다.

 

 

부도(3)

종형 부도로 기단부를 제외하고 비교적 온건합니다.

 

 

 

 

부도(4)

부도(3)과 비슷합니다.

 

 

 

 

부도(5)

수암당 부도

 

 

 

 

 

안산 대부도 쌍계사에서 화성 동탄 만의사지까지 무려 3시간이 걸려 어둠이 내리기 직전에 도착하였습니다.

수도권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유선으로 친절하게 안내해준 우리카페 시나브로님께 감사 드립니다.

 

2019.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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