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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여주시

여주...하리.창리 삼층석탑

by 임병기(선과) 2019.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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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박물관에서 이번 답사의 주목적지인 서문재 방향에 위치하여 들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뵌 것이 2007년이니, 강산이 한 번 바뀌었습니다.


 

두 탑은

사적이 전하지 않는 폐사지에서 옮겨온 탑으로  고려 중기의 탑으로 전합니다.

오류가 있지만 옛글로 대신하며 몇몇 특징을 짚어 보겠습니다.


 

하리삼층석탑

전형적인 2층 기단의 삼층석탑입니다.


하층 기단 갑석 이하는 매몰되었고, 상륜부는 망실되었습니다.


 

 

하층기단 갑석

물매가 급하고 상부에 2단 굄을 두었습니다.


상층기단 중석

양우주를 모각하였고 감입식으로 결구하였습니다.


 

상층기단 갑석

물매는 희미하며, 하부에는 부연. 살부에는 2단 굄을 표현했습니다.


  

 

탑신석

초층에 비해 2,3층의 체감이 급격하며, 양우주를 새겼습니다.


옥개석

낙수면 물매가 급하고, 전층 4단 층급받침과 절수구를 새겼으며 상부에 1단 탑신굄을 조출하였습니다.

전각의 반전은 경쾌하지 않습니다.


 

 

  


창리 삼층석탑

2층 기단의 삼층석탑으로 알려져 있으나, 5층 석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2단 지대석

 

 

하층기단

중석과 갑석이 일석이며, 중석에는 면마다 2구의 안상을 표현했고, 갑석 상부에는 복련을 조식하였습니다.



상층기단 중석

일견 상촉하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상층기단 갑석

창리석탑의 큰 특징의 하나인 갑석 하부의 모습입니다.

부연을 생략하였지만, 하부를 두텁게 내곡하여 마치 부연처럼 느껴 집니다.

상부에는 2단 굄을 조출하였습니다.

 

 

탑신석

전층 우주를 모각하였고

초층 탑신석은 별석이지만, 1층 이상의 옥개석은 상위 탑신석과 일석으로 치석하였습니다.


옥개석

낙수면 물매는 급하고, 층급받침은 3단입니다.


현재 탑신석이 4매로, 본래는 5층 탑으로 추정되며, 상륜부는 망실되었습니다.


 

 

 

 

 


시간에 구속되어

영월루와 마암은 건너 뛰었습니다.

영월루에서 바라보는 신륵사 풍광도 답사의 일미지만 서문재는 개인저택이어서 늦은 시간에 방문은 예의가 아닌 듯하여...


2019.05.25

아래는

2007년 글


 

영월루

 

기실 영월루는 답사 동선에 포함되지 않았었다. 풍광 좋은 정자에서 풍류를 즐길 여유도 없거니와 정자에 걸린 한시 한 편 제대로 해석할 식견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겨우 현판에 걸린 정자이름이  시경, 공맹,주자의 글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과 뜻만 얕게 알뿐이기에 알랑한 자존심이 풍광의 유혹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비게이션 주소를 잘 못 입력하여 여주 경찰서 부근에서 창리,하리 삼층탑을 찾아  맴돌다가 개인택시 기사분의 도움으로 탑을 찾았더니 영월루가 있었다. 물론 예전 신륵사 답사길에 강 건너에서 두어번 바라보기는 했었다.


"영월루는 원래 여주군청의 정문이었는데 1925년경 당시  신현태(申鉉泰)군수가 파손 될 운명에 처해있는 이 누각을 현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상층 누마루에 올라보면 숲속에 파묻힌 유명한 절 신륵사의 대가람이 한강변에  바라보이고, 학동모연·팔대장림·마암어등 등의 여주팔경이 한눈에 들어온다.영월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집으로 2층 누각 형식인데 정면길이에 비하여 측면길이가 짧으므로 평면은 긴 장방형이다.

장대석 기단에 놓인 높은 사각 초석 위에  짧은 하층 기둥이 세워져 누마루가 꾸며지고 그위에 상층 기둥이 세워져 이익공과 결구되고 오량의 지붕가구가 짜올려져 있다. 창방이 굵은 부재로 보강된 것은 문루의 가구법과 유사하다.  상층의 누마루  사방에는 계자각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익공의 형태나 가구수법으로 미루어 18세기 말의 건물로 추정된다."

영월루에서 바라본 신륵사

 

"누각 바로 아래에는 커다란 괴암이 절벽을 이루는데 바위 위에는 힘있는 필치로 씌어진 '마암(馬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암혈에서 황마(黃馬)·여마(驪馬)가  승천하는 것을 본 사람이 있어 이것이 구전되어 여주군명을 황려(黃驪)라 칭했다는 것이다. 이 황려의 군명은 후에 여흥이라했고 그것이 다시 지금의 여주로 변한 것인데 이 「여(驪)」자는 황마승천설에서 유래했다는 전설이 있다."

 

창리.하리석탑

 

이번 답사길에는 익히 알려진 문화유산 보다는 발걸음이 덜하는 곳을 중심으로 돌아 보려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여주에서도 신륵사,고달사지,영릉,목아박물관도 다시 답사하고픈 충동에 몹시 힘이 들었었다.


창리 석탑

 

"이 석탑은 본래 여주읍 내 과수원의 옛 절터에 있었던 것을 1958년 한강변에 위치한 영월루(迎月樓) 아래의 공원 산중턱으로 옮겨져 여주 하리 3층석탑(보물 제92호)과 나란히 세운 것이다. 하층 기단의 각 면에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갑석 위에는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부는 기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1층 몸돌만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고 나머지는 지붕돌과 탑몸돌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돌의 아래쪽에는 각각 3단의 받침이 조각되어 있다.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가 끝 부분에서야 반전되었으나 대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이다. 1층 탑몸돌 윗면의 사리를 모셔두는 사리공에서 동제여래입상이 발견되었다. 탑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리 삼층탑


"하리탑은 신라 이래의 전형양식(典型樣式)을 계승하여 2중기단 위에 쌓아 올린 3층의 방형(方形)석탑이다. 하층기단의 구성은 통식(通式)에 속하여 갑석은 상면에 현저한 경사를 이루었고 그 중심에 삼층기단 중석을 받치기 위한 높직한 2단의 받침이 있다.


각층 옥신에는 우주형이 얕게 조각되어있고 초층 옥신은 특히 높은 편이다. 옥개석의 각층 받침은 4단이고 추녀밑은 아랫면과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에 이르러 반전되었다. 상륜부는 완전히 소실되어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이 탑에서는 1958년 석탑을 하리의 옛절터에서 옮길 때 초층 탑신에서 특이한 사리공(舍利孔)이 확인된 바 있다. 내용물은 하나도 남은 것이 없어 이 원공(圓孔)이 무슨 용도였는지 알 수 없다. 이 석탑의 조성은 고려시대에 있었을 것이나 외형의 온아(溫雅)한 비율이나 각부분 구성의 규율성(規律性)으로 보아 중기를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인용("  ")은 Daum에서 옮겨옴

 

2007.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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