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합천군

합천...초계향교. 풍화루 거북 주초

임병기(선과) 2019. 1. 17.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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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향교
1628년(인조 6)에 창건되었으며,1800년대 초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1819년에 대성전을 중수하고, 1843년에 명륜당을 중수한 사실이 전할 뿐 그 밖의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1993년에 동재·서재를 건립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동무,서무,내삼문,·명륜당,동재,서재,풍화루,관리사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배치이다.

 

그러나 저러나

오늘도 기대에 어긋남 없이 닫힌 문은 순례객의 발길을 거부한다. 

하긴, 오늘도 풍화루 거북주초 답사가 주목적이었으니.


 

하마비

 

 

피곤한 표정이 역력하다.

 

 

 

풍화루

2층 누각으로 향교의 외삼문이다.

유교풍속으로 백성을 교화한다는 뜻이다.


 

까치발로 바라본 명륜당

 

 

동,서재

 

 

대성전 서무 지붕,내삼문,관리사 지붕

 

 

풍화루 누하주의 주초

천진스럽고, 해학적이며 친근하게 다가온다.

 

거북 주초에 대하여
현장 안내문에는 토착신앙의 주술적 의미라고 모호하게 설명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풍수 비보책으로 추정되어,자료를 찾아보았으나 특별한 사실은 알아 낼 수 없었다.

다만, 초계중학교 동창회 카페에 단서가 될 만한 글(초계외 풍수지리.박중구님)이 보인다

 

"초계는 영남좌도의 서북부에 위치한 자연적인 분지형으로서 곡창지대이며 옛날부터 거창 안의 달성 현풍과 같이 3대현으로서 그 명성이 자자한 곳이다. 분지의 크기는 둘래가 약 25키로(?) 이상으로 상당히 큰 지형인 것이다. 1950년대 말까지만 해도 초계현 관활의 현재의 동부5개면 율곡일부 대량일부를 합하여 인구가 8만명이 될 정도로 인구가 많았고 초계장날에 약 1만명의 인구가 모여들 정도로 합천 삼가를 능가하였다. 그 만큼 분지가 비옥하고 사람들이 많이 살고하여 장날에는 사방각지에서 초계장을 보러 모여드는 것이다.

 

초계분지의 지세는 북산이 낮고 앞산이 높으며 물이 사거리 한곳으로 빠지는 길이라 홍수기에는 초계리와 상부그리고 청덕 등 여려마을이 물에 잠기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이 회자되는 말이 북산이 낮아서 풍수지리의 조건을 반대로 갖추고 있어 진주에 발전을 빼앗겨다고 하며 북산이 높고 남산이 낮은 경우였드라면 영남서북부에 도시가 형성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중략)

 

초계분지는 이와 같이 비옥한 분지로서 곡창지대이지만은 풍수지리상의 배산임수의 형세를 거꾸로 갖추어 전래로 부터 사람들의 입에 아쉬움이 많은 것을 어찌하리가  이런 연유로 조선조에도 초계현청터를 두고 많은 고심을 하고 연구를 하다가 현감이 계실 터는 원당으로 정하고 이후 유하 태평으로 옮겼다고 하며 관아는 창말과 아막 등지에 두었다고 한다.

 

이런 것도 다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보겠다는 노력의 일환이며 일제강점기를 맞이하여 신작로가 송림재에서 초계내동으로 관통하는 바람에 오늘날과 같이 형세가 바뀐 것이라고 한다.(하략)"

 

즉, 홍수에 취약한 형국을 비보하기위한 비보책으로 추정 된다.

 

 

거북 주초(1)


 

  


거북 주초(2)

 

 

 

거북 주초(3)

 


거북 주초(4)

 

 

 

거북주초

옛사람들은 자연 재해 까지 고려하여 짓고, 후학을 양성하고, 석전대재를 올리고 하였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떠한가?

 

개방하여야 한다.

최소한 연락처라도 남겨 두면 되지 않은가?

언제까지 우리나라의 향교와 서원은 까치발 답사로 만족해야 하겠는가!

 

2019.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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