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합천군

합천...함벽루(涵碧樓)

임병기(선과) 2019. 1. 14.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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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벽루(涵碧樓)

대야성(大耶城) 기슭에 위치하여 황강(黃江)과 강 건너 정양호(正陽湖)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세워졌다.
황강의 푸르름(碧)에 젖은(涵) 정자.

마치 배를 타고 황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감정에 무딘 나와 같은 사람도  시 한수 흥얼거리고 싶은데,  시인 묵객들이 함벽루 누마루를 찾아 그냥 다녀가지 않았을 것이다.

 

함벽루 뒤편 암반에는 우암 송시열의 암각이 선명하게 남아 있으며,

누각에는 우암의 함벽루기, 조선의 대유학자 남명과 퇴계의 시를 비롯하여 많은 싯구가 걸려 있다.

 

 

함벽루

대야성(大耶城) 기슭에 위치하여 황강(黃江)과 강 건너 정양호(正陽湖)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
1321년 고려 충숙왕대에 당시 합주지주사(陜州知州事)김영돈(金永暾:1285-1348)이 처음 창건한 정자로 전한다고 한다.

이후. 함벽루는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특히 송시열의 함벽루기(1682년)에 의하면 상류에서 떠내려온 나무로 중수(1681년)한 기록이 보인다.

 "지난 장마에 큰나무 몇 그루가 상류에서 떠내려와서 강언덕에 걸렸으니 들보와 기둥을 할만 하였고, 모래쇠가 강가에 쌓여 못을 만들 만하니 이것이 귀신이 그 일을 도운 것이다. 드디어 일꾼을 모집하여 중수를 시작한지 한달이 못되어 공력을 마치니..."

 

함벽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이층 목조기와집이다

아래층은 덤벙 주초위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윗층은 마루를 깔고 사방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예전에는 비가 오면 누각 처마의 물이 황강에 떨어지는 멋진 풍광을 연출하였고 한다.

 

 

현판

 

 

누하

 

 

누마루와 계자 난간

 

 

 

 

함벽루기涵碧樓記
송시열은 합주현감 조지항의 간청을 받고 기문을 남겼다.

(기문에는 조지항을 조후로 칭하고 있다)

이와함께 누각 후면 반듯한 바위에 함벽루 를 새겨넣고 기문의 내용을 요약하여 새겨넣었다.

                      

송시열의 함벽루기涵碧樓記


"함벽루가 본군 남쪽 4리지점에 있다.

내가 젊었을때 여지서를 읽고 이미 이 루가 있음을 알고 그 경치를 상상하고 한번 가서 오르고 다다라서 마음과 눈이 상쾌하지 못함을 한탄하더니 경신년에 은혜를 입어 바다 밖으로부터 돌아올 때 다만 저기 푸른빛이 숨어 비치고 물과 하늘이 맑은데 한 구역 좋은 형승을 이룬 것을 보았다.

 

그러나 엄숙한 길이 촉박하여 능히 눈을 놀려보지 못했더니 금년 정월에 군수 조후가 나를 찾아 산중에 이르러서 말씀하기를 함벽루 유지가 오래 비어서 예전 자취가 거의 없어지고 여기에 흉년이 겹쳐서 시공할 꾀가 없더니 우연히 다행한 운수를 만났다.


지난 장마에 큰나무 몇 그루가 상류에서 떠내려와서 강언덕에 걸렸으니 들보와 기둥을 할만 하였고, 모래쇠가 강가에 쌓여 못을 만들 만하니 이것이 귀신이 그 일을 도운 것이다. 드디어 일꾼을 모집하여 중수를 시작한지 한달이 못되어 공력을 마치니 그 새 다리가 나루어귀에 가로누운 것은 함벽루에서 보면 눈에 먼져 들어오는 자리라. 고을의 부로들이 서로 더불어 보고 칭찬하여 말씀하되 함벽루 퇴락한지가 몇 해가 되었다가 지금다시 예전을 회복하고 또 귀신의 도움을 얻었으니 이것은 기이한 일이니 가히 기문이 없지 못할 것이리라 했다.

 

조후가 글을 보내어 말씀하되 부로들의 청원이 이와 같으니 자네가 어찌 한 말씀 하여 부응하지 아니하리오. 내가 말씀하되 폐하고 떨어진것을 일으키고 수축하는 것은 옛날부터의 도리라. 예전에 자산이 진나라의 다리를 수축하지 아니하고 손님이 옴에 사관이 없음을 보고 진나라가 반드시 멸망할 것을 알았으니 또 사관과 우전을 더하여 꾸밈은 이것이 유씨의 집안법이고 주부자가 소학을 편찬하신지라 조후는 예전 포저 문효공의 손자라 그 교훈을 받은바가 있는지라. 백성을 다스리고 일을 처리함이 모두 마땅함을 얻고 남은 힘이 관우에 미침이 이와 같으니 어찌 세금을 가로 거두어 스스로 경영하여 자본을 취하고 관청일 보기를 진나라 여읜 것과 같이 하는 자를 비유할 것인가.

 

내가 희롱하여 조후에게 말하되 변하 상류의 나무는 명도가 나라를 위하는 정성에 감동하여 떠내려 와서 스스로 물어 귀에 걸렸더니 지금 조후가 복구한 정성이 어찌 능히 나무와 쇠를 감동시킴에 이르렀는고. 지금 봄에 굶주린 백성들이 들에 둘려있어 채색이 많으니 조후가 여기에 그 정성을 반드시 배나 둘 것인 즉 그 능히 장관을 감동시키고 능히 조정을 감동시킴을 내가 알아서 합천의 백성을 위하여 장차 기사를 명함을 축하하노라.

 

이집의 앞뒤에 물과 산의 기상과 맑고 넓은 좋은 경치같은 것은 예전 사람의 시와 기문에 구비되어 있으니 이에 거듭하지 아니하노라. 조후의 시가 자못 아름다워 풍류의 취미가 있다. 예전에 주부자가 동안을 관리할 때 절벽에 써서 이르되  해가지고 하늘이 차운데 마실 술이 없으니 공연히 기생莫愁을 불러오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하셨고 또 일찍 문효공이 주부자 말과 뜻이 간절하니 조후가 여기에 반드시 능히 경계를 더욱 심한 것이 있을 것이다. 조후의 이름은 항恒이요 자는 여상이니 풍양세가이다.

숭정 임술년 봄날에 은진 송시열(1682)은 기록함. 무인년 3월에 중간함."


출처/ 다음블로그...돌도사 도림사 보장천추 석각, 보장천추寶藏千秋돌도사와 떠나는 석각石刻기행에서 발췌

 

 

퇴계선생 시


북래산두기 北來山陡起 북에서 뻗어 내린 산들은 우뚝 솟고

동거수만류 東去水漫流 동으로 질펀하게 강물은 흘러가네
안락빈주외 鷹落蘋洲外 기러기 마름 자란 모래톱에 내려앉고

연생죽옥두 烟生竹屋頭 대숲 속 집 위로는 저녁 밥 짓는 연기

한심지의원 閑尋知意遠 한가로이 찾는 마음 느긋하기 그지없고

고의각신부 高倚覺身浮 높은 곳에 기대서니 몸은 둥실 떠오르네

행미명강반 幸未名韁絆 다행스레 벼슬길에 이름 아직 걸지 않아

유능임거류 猶能任去留 가거나 머무는 것 이렇게 자유롭네

 

*점필재연구소 정석태님의 해석문

 

 

함벽루

 

상비남곽자 喪非南郭子 남곽자 처럼 무아지경에 이르지 못해도

강수묘무지 江水渺無知 강물은 아득하여 알 수 없구나

욕학부운사 欲學浮雲事 뜬 구름의 일을 배우고자 하나

고풍유파지 高風猶破之 고풍유파지 오히려 높다란 바람이 흩어버리네

 

남명선생시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해석문

 

 

황강을 향하는 정면에는 제일강산 第一江山 현판이 걸려 있다.

 

 

누각 뒤편 암각문

 

함벽루涵碧樓

조선국숭정후신유 朝鮮國崇禎後辛酉    

군수풍양조지항중건 郡守豊壤趙持恒重建
이복치시창세갑지회 而復値始刱歲甲之回
우유목철표지지리사적구재서기운 又有木鐵漂至之異事蹟具載叙記云 

 

우암서尤菴書     


함벽루 암각문은  중건한 년도(숭정후 신유.1681년)을 새겼으며,

함벽루 2층 우암의 함벽루기는 임술년(1682년)에 쓴 글이다.

 

 

조선국숭정후신유 朝鮮國崇禎後辛酉    

군수풍양조지항중건 郡守豊壤趙持恒重建
이복치시창세갑지회 而復値始刱歲甲之回
우유목철표지지리사적구재서기운 又有木鐵漂至之異事蹟具載叙記云 

 

 

우암서尤菴書     

 

 

언감생심

한시는 아니더라도

감흥 한 자락 옮길 능력이 없으니

송강의 장진주사를 읊조릴 수밖에...

 

2019.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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