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합천군

합천...호연정(浩然亭)

임병기(선과) 2019. 1. 1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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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정浩然亭

겨울 나목마져 정겨운 황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며,

녹음이 우거진 여름날, 추색 짙은 만추에는 절경을 연출할 것 같다.

 

 

은행나무

주이 선생이 심은 나무로 수령 400년 이상된 호연정의 텃주대감이다.

 

 

정문

붉은 빛으로 단장한 문위에 길상의 의미인 태극문양을 올렸다.

 

 

인지문 仁智門

유교 오상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 유래한 것 같은데

이를 경우 동쪽문에는 인仁,북쪽에는 지智자를 차용한다.

함께 사용할 경우는 어떤 의미인지.

 

일반적으로 정문은 서울의 숭례문 처럼 남문으로 예禮를 차용한다.

 

 

호연정浩然亭

이요당二樂堂  주이(周怡'1515~1564)가 예안현감에서 물러나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정자

이요당(二樂堂)은 지자요수(智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아버지는 주세귀, 어머니는 좌의정 최윤덕의 딸로 창원 최씨이며, 당숙(堂叔)이 소수서원을 건립한 주세붕이다.

1560년(명종 15년) 대과에 급제해 성균관 학정 전적, 이조'형조의 낭관, 춘추기주관, 도사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1551년(명종 6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을 황제 세종이 소나무분재를 보여주면서 지은 시는 널리 인구에 회자된다.

 

반척사분반척송 半尺沙盆半尺松 작은 모래 분에서 자란 반 척의 소나무

풍상고절노용종 風霜孤節老龍鐘 한 평생 풍상 무릅쓰고 용종하게 늙었네

지거불학간천장 知渠不學干天長 나는 아노라 저 소나무 하늘 높이 자라지 않는 뜻을

험득인간직불용 驗得人間直不容 사람이 곧으면 용납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올곧은 사람이 등용되지 못하는 세태를 빗대어 쓴 시로,  황제는 주이를 직불용(直不用)선생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1564년(명종 19년) 향년 50세에 귀천하였다.

저서로 이요당선생문집이 있고 도연서원(道淵書院)에 제향되었다.

 

 

호연정浩然亭

정자이름은 분명 호연지기(浩然之氣)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정면 3칸.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좌측에는 방을,우측에는 마루를 깔고 계자 난간을 설치하였다.

추녀 끝에 활주를 세우고, 후면, 좌측면에는 쪽마루를 걸었다.

 

호연정의 가구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서산 개심사. 안성 청룡사의 굽은 목재에 버금가는 부재를 사용하였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후면과 측면

 

 

후면

 

 

측면

 

 

호연정에는 3개 현판이 걸려 있다.

 

삼우당파손 정홍겸 글씨.

 

 

미수 허목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나 의견이 분분하다.

 

황강변

지호지간에 남아 있는

우암송시열의 함벽루 글씨, 미수 허목의 호연정 글씨

 

어쩌면

두분은  다정다감한 벗?

 

 

마루 위에는 많은 현판이 걸려 있지만 짦은 지식이 부끄러울 뿐이다.

 

 

측면의 굽은 창방과 계자 난간

 

 

정면 창방

좌협실의 분합문과 띠살문. 후면 판문

 

 

마루

좌협실의 분합문과 띠살문. 후면 판문

 

 

계자난간

 

 

멀리 황강이 조망된다.

 

 

천장 가구

건축 상식이 일천하여 설명을 하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중앙은 서까래가 드러난 연등 천장이다.

 

 

우믈천장도 보이고

 

 

눈이 즐겁다.

하중을 분산시키는 가구 일텐데.

 

 

캬~!

마치 용처럼 보이는 들보

 

 

화재를 예방하기위한 비보책으로 조성했을 것이다.

 

 

대공에서 공포로 흘러 내려 걸친 굽은 부재의 명칭이 궁금하다.

 

 

경敬

영주 소수서원, 함안 무기연당, 영양 서석지 경정과 같은 의미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글씨 익숙하지 않은가?

 

아래

함안 무기연당 글씨를 보자.

 

 

함안 무기연당(유현님 사진)

 

이 글씨 액자의 작은 글씨를 보면 모래백운동석벽(慕末白雲洞石壁) 이라고 적혀있다.

즉, 소수서원의 경敬자 암각문을 탁본한 글씨이다.

 

다시

위 호연정 경敬자 글씨를 보자.

무기연당 글씨와 동일하다.

 

그렇다면

호연정 글씨도 소수서원 경자암 글씨를 모사한 것이다.

 

이제 소수서원 경자 글씨를 확인해보자

 

 

소수서원 경자암 글씨(동해의 푸른바다님 사진)

 

경敬의 의미?

소수서원 경자 암각에 대하여 우리카페 조현두(진실하고 당당하게)님이 올린 글이 답이 될 것이다.

 

 

소수서원, 경敬자 암각(조현두님 사진)

주세붕이 소수서원 입구에 경敬자를 새긴 내력

 

白雲洞石壁刻敬字

文成公廟前。有石壁如削。欲刻敬字。書院諸友。皆以取怪世俗爲戒。且曰。當自敬於心。何必刻之於石。世鵬亦不敢強。及得晦翁與蔡季通書。然後乃開視諸友曰。先天諸圖尙可刻。獨不可以刻敬字乎。嘗謂敬者苟之反。纔苟便不敬。此固吾晦軒之所契於晦翁027_162d者。愈不可以無刻也。廟院雖不得久保。使此刻不至於剝落。則千載之下。稱之曰敬石足矣。皆曰諾。遂刻之。

출전 : 武陵雜稿 卷之六 別集 , 주세붕(周世鵬)

 

문성공(文成公)의 사당 앞 깎아지른 석벽에 ‘경(敬)’ 자를 새기려고 하니, 서원의 모든 벗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괴이하게 여김만 당할 뿐이라고 경계하고 또 말하기를,

 

“마땅히 스스로 마음속으로 공경할 것이지 어찌 굳이 이것을 돌에 새겨야만 하겠는가?”

하기에, 나도 감히 강행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회옹(晦翁)의 이 말을 찾게 되어 벗들 앞에 보이고서,

“선천(先天)의 모든 그림도 새겼는데 유독 경(敬)자를 새기는 것만 안 된단 말인가?

일찍이 이르기를, ‘경은 구차함의 반대됨이니, 잠깐이라도 구차하면 이는 곧 불경(不敬)이다.’ 하였다.

 

이는 실로 우리 회헌(晦軒)이 회옹과 부합되는 것이니, 더욱 새기지 않을 수 없다.

묘원(廟院)은 비록 오래 보존되지 못하더라도 이 각석(刻石)이 마멸되지 않아 1천 년 후에 이것을 일컬어 ‘경석(敬石)’이라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하니, 모두 좋다고 하여 드디어 새겼다.

 

 

영양 서석지 경정敬亭(종화님 사진)

 

 

 

정료대庭燎臺

 

 

추원재

 

 

우측 상단 적은 광창(?)

 

 

세덕사

 

 

사당은 닫혀 있다.

 

 

이우당 주이선생 비각

 

 

까치발

 

 

비각 상량문

숭정사계해칠월 崇禎紀 四 癸亥(1863년 칠월)

 

 

 

호연정

배롱이 만개 할 즈음이나, 은행잎이 절정인 계절에

다시 들리고 싶다.

건축을 전공한 사람과 동행이라면 금상첨화이리라.

 

2019.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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