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합천군

합천...대지리사지(무학대사 유허지).무학대(無學臺)

임병기(선과) 2020. 3. 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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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리사지大枝里寺址

합천군 대병면 대지리 산 2번지.

 

진입 들머리

대지 1리. 대지길 24-1 한갓 마을 정류장

멀리 마을 뒤편 우측 정상에 하얀 바위 아래쪽입니다.

 

마을 안길로 들어가서 산길을 따라  약 1km  우측 저수지를 지나 포장이 끝난 지점에 주차합니다.

주차공간은 넉넉하지만, 진입 도로는 교행 하기 쉽지 않은 좁은 길입니다.

 

주차 후

비포장 언덕을 올라서면, 다시 포장도로를 만나고 다리가 있습니다.

다리를 지나면 발굴된 사지가 펼쳐집니다.

도보 10분 미만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사지

 

고즈넉한, 소설 한 편 탈고하고픈

그런

내가 기대했던 사지가 아니구나

 

그도 잠깐!!!

 

아~~~!

 

나를 찾아가는 절터

 

누군가

그랬습니다.

 

나를 찾아간다고...

 

대지리사지.

창건과 폐사의 사적이 전하지 않은 무학대사 유허지로 경남기념물로 지정된 절터입니다.

 

대지리사지.

출처.한국의사지총람(하).문화재청.2010

"사찰의 명칭 연혁은 알 수 없는데, 주민들에 의 하면 원래 이름은 후 두사였다고 하며 현재는 부도사지浮屠寺址라고 한다고 한다. 또한 초석으로 보이는 석재에 옹정 2년 4월 화주 지각(雍正 2年 4月 化主之刻)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1724년에 해당되므로 이때까지 사찰이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사지에는 석탑 옥개석, 괘불대, 석축을 구성했던 석재가 산포 해있으며, 토기류, 기와류가 발견된다."

 

위 내용은

사지가 발굴되기 전 내용이며, 현재는 명문이 새겨진 주초, 석탑 옥개석은 보이지 않으며 괘불대만 남아 있습니다.

주민들이 말하는 후두사는 부도사가 그렇게 불려진 듯합니다.

부도사浮屠寺 사찰명은

여지도서 삼가현 읍지 불우조에서 유래된 것 같으며, 그 이전 자료는 회암사 무학대사 부도비에 부도암浮圖庵이 새겨져 있지만 이 곳이라는 단서는 없습니다.

 

"18세에 기쁘게 부처에게 귀의할 뜻을 품으셨다. 혜감국사(慧鑑國師)의 뛰어난 제자 소지선사(小止禪師)께서 머리를 깎아주시고 구족계(具足戒)를 주셨다. 용문산(龍門山)에 가셔서 혜명국사(慧明國師) 법장(法藏)께 법(法)을 여쭈니, 국사께서 법을 보여주시고, 이어 “바른 길을 얻을 자, 너 아니고 누구이겠느냐?”하시며 부도암(浮圖庵)에서 살게 하셨다."(회암사. 무학대사 부도비)

 

대지리사지

발굴이 완료되어 축대는 복원이 된 듯합니다.

육안으로는 크게 3단 석축을 쌓고 각각의 평탄지 좌우로 전각을 배치한 것 같습니다.

 

합천 무학대사 유허지(陜川 無學大師 遺墟址). 출처 문화재청

"합천군 대병면 대지리 산 2번지 일원은 발굴조사 결과 건물지 16동, 축대 배수로, 괘불지주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출토된 기와, 자기류 등을 통해 볼 때 12세기에 건립되어 18세기까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17세기 초반에서 후반경에는 실체 사찰의 기능을 수행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발굴 결과 수차례에 걸친 수. 개축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고려시대 전기에서 조선시대 후기에 걸쳐 운영된 사찰로 판단되고 있다. 고려 전기~조선 후기에 걸쳐 운영된 사찰로 판단되므로 각종 지리서에서 거리나 방향 등을 고려하여 대지리 폐사지에 비정할 만한 사찰은 보암사와 사나사가 유력하다.

 

보암사 寶巖寺는 여지도서『輿地圖書』가 편찬되는 18세기 중반에 이미 폐사되었다 하므로 논외로 하고 이에 반해 사나사舍那寺는 월여산月如山 자락에 위치하고, 여지도서 삼가현 읍지 불우조(輿地圖書.三嘉縣邑誌.佛宇條 및 교남지嶠南誌에 사나사재현북오십리일명부도사舍那寺 在縣北五十里一名浮屠寺라고 하여 조선말까지 법등이 전해지고 있었으며 그 방향과 거리도 일치하여 대지리 폐사지는 일단 「사라사」로 비정할 수 있다. 

 

그런데 여지집성 삼가현읍지 사찰 사나사재황매산무학소창『輿地集成』『三嘉縣邑誌』寺刹 「舍那寺在黃梅山舞鶴所創」이라 하여 무학이 창건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무학당」 표석과 함께 대지리 폐사지가 무학대사와 관련이 있는 사찰임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며 지표조사를 통하여 무학대사 출생지로 고증된 대지리 마을 또한 보다 신빙성이 높아졌다고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발굴조사 자료와 각종 지리서에 나타난 기록, 춘정 변계량春亭 卞季良의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와 같은 금석문을 통하여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 무학대사는 삼가현 사람임이 분명하게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무학대사와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본 유적을 무학대사 유허지로 명명하여 지정. 보존함. "

 

 무학대사유허지는 삼가현 읍지三嘉縣邑誌 등의 고문서에 기록된  사나사재황매산무학소창(舍那寺在黃梅山舞鶴所創)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재 사지에는 무학당無學堂(당堂의 해석은 아래에서 별도 기술) 표지석만 남아 있습니다.

 

또한, 무학대사가를 삼가현 사람으로 증명하였다는 "춘정 변계량春亭 卞季良의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은 회암사 부도비를 뜻 합니다.

 

비문의 삼기군은 현재 삼가면을 말하며, 합천군청 홈페이지에는 "1414년(태종 14년) 가수현이 삼기현과 합병되면서 삼가현으로 호칭되었고 20개면 관할하였다"라고 등재되어 있습니다. 즉, 비문의 삼기군은 현재의 합천군입니다.

 

한국금석문종합정보영상시스템에서 발췌

 

"회암사(檜岩寺) 묘엄존자(妙嚴尊者) 무학대사(無學大師) 비
조선국 왕사 대조계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 탑명 병서(並序)

가선대부(嘉善大夫) 예문관제학 동지경연 춘추관사 겸 판내선시사(藝文舘提學同知經筵春秋舘事兼判內膳寺事) 신 변계량(卞季良)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짓고, 가정대부(嘉靖大夫) 검교 한성판윤 보문각제학(檢校漢城判尹寶文閣提學臣) 신 공부(孔俯)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쓰다.

 

(상략)

 

신 계량(季良)이 그의 제자 조림(祖琳)이 지은 행장을 살피니, 대사의 이름은 자초(自超)요, 호는 무학(無學)이요, 계시던 처소는 계월헌(溪月軒)입니다. 속세의 나이는 79세시고, 불교에 귀의한 뒤의 나이(法臘)는 61세입니다.속성(俗姓)은 박(朴)씨이고 삼기군(三岐郡) 사람으로, 아버지 인일(仁一)은 숭정문하시랑(崇政門下侍郎)에 추증되셨고, 어머니는 고성(固城) 채씨(蔡氏)입니다. 어머니 채씨가 떠오르는 해가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해, 태정(泰定) 정묘(충숙왕 14, 1327년) 9월 20일에 대사를 낳으셨다.

 

(하략)

 

숭정기원후 네 번째 무자년(순조 28, 1828년) 5월 일에 세우다."

 

(처음 세운 비가 훼손되어 다시 세웠으며, 이 글 아래의 비와 음기陰記 참조)

 

하단 축대

 

중단 축대. 석탑지

상단 축대. 금당지

 

금당지.

상단 평탄지

 

 

하단 평탄지

나무, 괘불지주.

 

중단 축대. 계단

 

괘불지주

일부 자료에 당간지주로 표기한 것은 오류입니다.

 

괘불지주

괘불을 걸고

야단법석野壇法席을 열었을 그 시절의 영화를 그리겠지요.

 

괘불지주

짝을 잃어 나무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중단 축대. 계단

 

삼층석탑지는 어디일까요?

 

합천박물관.대지리사지에서 반출된 삼층석탑

http://cafe.daum.net/moonhawje/DjZP/4454

 

대지리사지

하단 축대에서 바라본 사지

 

글?

우수마발牛溲馬勃이며, 사족蛇足 이겠지요..

 

.

.

.

 

무학당(無學堂)

사지에서 돌아 나와 산길 10여 미터 전방에 위치.

 

근자(?)에 조성한 2단 축단을 쌓고 바위에 새겼습니다.

자료에 무학당(無學堂)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멀리서 바라보고 마애부도로 생각했습니다.

 

아~~!

영조 이전 마애부도를 찾았구나 그것도 조선 초기의...

흥분도 잠깐!!!

 

마애부도는 아니었습니다.

사리공으로 생각했던 부분은 바위가 떨어져 나간 흔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산골처?

하지만, 무학대사 부도비문에는  대사의 유골은 입적한 금강산에 있었으며, 3년 후 왕명으로 회암사에 봉안한 기록만 있고 분사리에 관한 내용은 없습니다.

 

회암사 무학대사 부도비문에서 발췌

"태조께서 회암사(檜岩寺)는 나옹(懶翁)이 살던 큰 도량이라 하시며, 대사에게 들어갈 것을 명하셨다.

 정축년(태조 6, 1397년) 가을, 절의 북쪽 벼랑에 탑을 세우라 하신 것은 대사의 스승이신 지공(指空)의 사리를 모신 곳이기 때문이다.
무인년(태조 7, 1398년) 가을, 대사께서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용문사로 돌아가 기거하셨다.

임오년(태종 2, 1402년) 5월, 태종께서 또 회암사(檜岩寺)로 들어가라 명하셨다.

다음 해 정월 또 사양하시고 금강산으로 들어가셨다. 을유년(태종 5, 1405년) 9월 11일에 세상을 떠나셨다.
3년이 지난 정해년(태종 7, 1407년) 겨울 12월, 상감께서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에게 대사의 뼈를 회암사 탑에 모시도록 하셨고,

또 4년이 지난 경인년(태종 10, 1410년) 7월, 시호를 내리셨다."(출처. 한국 금석문 종합 영상정보시스템)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 부도

http://cafe.daum.net/moonhawje/DjZP/1603

 

회암사 무학대사. 부도비(우측 비신이 없는 비석이 처음에 세운 비)

새로 세운 내역이 새겨져 있습니다.

 

무학왕사비 음기(無學王師碑 陰記)

우리나라의 세 분의 조사(祖師) 지공(指空) · 나옹(懶翁) · 무학(無學)의 사리를 안치한 탑과 사적비(事蹟碑)가 양주(楊州)의 천보산(天寶山) 북쪽 벼랑에 있으니,지공(指空)과 나옹(懶翁)의 두 비는, 목은(牧隱) 이문정공(李文靖公)이 글을 짓고, 한수(韓修)와 권중화(權仲和)가 써서 고려 말에 세운 것이다.


무학(無學)의 비는 태종께서 즉위하신지 10년(태종 10, 1410년)되던 해인 경인년에, 왕명을 받들어 문신 변계량(卞季良)이 글을 짓고, 공부(孔俯)가 써서 두 분 왕사(王師)의 탑 아래에 세웠다.그러나 지금은 절은 폐허가 되었고 비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금상 21년(순조 21, 1821년) 신사년에 이응준(李膺埈)이란 자가 술사(術士) 조대진(趙大鎭)과 함께 사리탑을 헐은 뒤 자기 아버지를 묻고, 지공(指空) · 무학(無學)의 두 비를 두들겨 부쉈다.

관찰사가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니,임금께서 깜짝 놀라시어, 이응준(李膺埈)과 조대진(趙大鎭)은 섬으로 유배하고, 이응준(李膺埈) 아비를 묻은 무덤을 파버리라 명하셨다.이어 “부서진 비는, 개국 초에 선조의 분부에 따라 세운 것인데, 오늘날 보존치 못함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말씀하시며, 경기(京畿) 감영(監營)에 명하시어 일을 주관토록 하였다.
지공(指空)의 비는 문정공(文靖公)의 후손인 목사(牧使) 의현(義玄)에게 다시 쓰게 하고,무학(無學)의 비는 많이 훼손되지 않았으므로 예전에 새긴 공부(孔俯)의 글씨를 모방하여 새기도록 하였다.
무자년(순조 28, 1828년) 가을에 공사가 비로소 끝나 옛터에 세웠다.
지공(指空)과 나옹(懶翁)은 중국으로부터 와서 고려 말에 부처의 가르침을 폈다.무학(無學)은, 그들의 도(道)를 이어받아 개국 초기 수도(首都)를 정할 때에 공로가 많았으니, 기록으로 남길만한 분이다.회암사(檜巖寺)에 세 분의 비를 함께 세운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400여년이 지난 지금에 갑자기 비가 훼손당한 것은, 이 또한 불교의 한 수난이리라.

상감께서 지난날의 감회를 서글퍼하시며, 담당 관리에게 그윽이 명하시어 한 번에 거듭 새롭게 하도록 하셨다.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던 옛 자취가 이 때문에 다시 훤해지고 더욱 멀리 전해지게 되었으니, 이 어찌 훌륭한 성인의 옛 자취를 쫓고 공로를 기념하는 성대한 의식이 아니겠는가?

이에 전말을 갖추어 비의 뒤에 기록하노라.
숭록대부(崇祿大夫) 행 용양위 상호군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원임 규장각 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세자우빈객(行龍驤衛兼上護軍弘文舘大提學藝文舘大提學知成均舘事原任奎章閣提學都捴府都摠管世子右賓客) 김이교(金履喬)가 덧붙여 쓰고,가선대부(嘉善大夫) 경기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수원부유수 개성부유수강화부유수 광주부유수 순찰사(京畿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水原留守開城留守廣州留守巡察使) 김겸(金鎌)이 쓰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무자년(순조 28, 1828년) 5월 일에 세우다.

주사도감동 인봉당 덕준 봉은사 수선종판사 회선스님 성암당 영철
부간역 기암당 의관 전판사 환허당 등환
물력차지 가선 희행 봉선사 수교종판사 평송당 보채
남한도총섭 취봉당 관활 공원 가선 최인스님
중군 가의 의찰스님 도암당 성기
북한도총섭 가의 성묵스님 영장당 옥인
중군 가의 도문스님 추담당 삼학
용주사 도총섭 제방대법사 긍준 인성당 의현
중군 가선 정우스님 산인 신경
각수 박지춘
석수 박종석 문수조

 

무학당(無學堂)

부도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다시 암각문을 보았습니다.

어?

당堂이 아닙니다.

 

분명 人+口+土 입니다.

 

제 능력 밖의 글입니다.

 

하지만, 운 좋게도 제 곁에는 한문에 뛰어난 지인 두 분(조현두,이영규)이 계십니다.

특히, 이체자(異體字)에 안목이 높은 도솔산인(이영규)님에게 사진을 보내 자문을 구했더니 청나라 강희자전에 실린 대臺로 해석하였습니다.

 

더불어, 바위에 새겨진 글씨(人+口+土)는 강희자전, 한한사전, 이체자전에도 없으며, 처음 등장하는 글씨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영주 선비촌의 진당(조현두)님도 대臺의 용례를 알려 주셨습니다.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청. 강희자전

 

한한사전.

강희자전과 동일

 

이체자전

 

조현두님의 글씨

 

무학대(無學臺)

지금부터는 무학대로 읽겠습니다.

 

여기에 무학대 명문을 새겼는지.

 

삼가현 읍지三嘉縣邑誌 등에 실린 황매산 무학처소창黃梅山舞鶴所創이 맞을까요?

 

무학대(無學臺)

뒤편으로 올리 가면 대나무 숲 속에 암자터(?)가 있습니다.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무학대 표석은 대나무 숲 속에 있었던 암자 이름이거나, 전각을 뜻한 것 같습니다.

즉, 무학대사 수행터 및 영정 봉안, 사찰 선방, 조실 스님 거처. 폐사후 스님 수행터 등으로 사용되었더라도, 건물은 무학대(無學臺) 현판을 걸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합니다.

 

돌담과 대숲에 싸인 암자터

 

대숲 사이로 길이 있습니다.

 

돌확

입구에 돌확?

사지가 교란이 되었더라도 길 중앙에 위치?

 

돌확과 축대 전면

 

축대. 향좌측

 

축대. 향우측

 

돌담장

 

돌담장

 

돌담장

 

사각사각

댓닢 소리가 휘감고 도는 암자터

 

돌계단을 내려서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합니다.

 

남가일몽南柯一夢. 일장춘몽一場春夢

 

호접몽胡蝶夢

호접몽胡蝶夢

 

산짐승 울음이 뒤통수를 후려 칩니다!!!!!

 

20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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