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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영주시

영주...영전사 석불좌상. 석탑부재

by 임병기(선과) 2018.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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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좌상

풍기 영전사에 계시는 불상

근자에 발행된 문화재청 한국의 사지에 등재된 석불좌상으로, 이전의 책에서는 언급이 없었기에 답사에서 뵙지 못하였다.

마침 동호회 최석훈님이 소백산자락 답사를 떠난다고 하여 재확인 요청 후 들렸다.

 

석불좌상과 더불어 영전사 어린이 놀이터 옆에 모셔진 부재는 2009년 영전사지에 있었던 부재이며 이후 풍기 영전사로 옮겨 온 듯 하였다. 영전사의 처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영전사지의 당간지주도 말씀드렸다.

 

 

석불좌상

두부는 결실되었고, 우견편단의 법의, 항마촉지 수인이다.

불신에 비해 무릎이 높고, 손이 크다.

길상좌, 옷주름이 무릎 아래로 흘러 내렸다.

목걸이를 걸고 있는 여래상으로, 9세기 불상으로 추정된다.

 

 

부채꼴 옷주름과 하대석

 

 

 

 

 

 

석불좌상의 상대석으로 추정

 

 

배례석

전면에 안상 2, 측면에 1개를 새기고, 상면에 연화문을 조식하였다.

 

 

부도 탑신석

2009년 영전사지에서 뵈었었다.

 

출처/한국의사지에서 촬영

 

팔각 탑신

2면에는 문비와 자물쇠, 2면에는 범천,제석천, 나머지 4면에는 사천왕상을 새겼다.

9년 전 보다 더 많이 마모된 상태로 실내로 옮겼으면 좋겠다.

 

 

 

 

 

제석천(?)

 

 

 

문비(1)

 

 

문비(2)

 

 

 

석탑,부도재

2009년 답사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답사기에 언급 없었던) 작례가 눈에 들어 왔다.

 

 

부도 하대석

팔각,안상을 새기고 상부에 2단 괴임을 조출

 

탑신석

양우주를 모각

 

 

옥개석 층급받침

아래로부터 5*4*3으로 작례가 몇 기 없다

(안동 안기동 석탑은 6*5*4로 기억된다)

 

옛답사기에도 언급이 되어 있다.

 

 

3층 옥개받침

 

 

2층 옥개받침

 

 

초층 옥개받침

 

 

그런데, 여기서 눈을 의심했다.

 

초층 탑신괴임이 각호각 3단이다.

이런 작례는 부지기수이다.

 

 

어?

2층 탑신괴임도 각호각 3단이다.

맨위 각형은 낮게 표현되었다.

 

 

그렇다면 3층 옥개받침은?

역시 3단이다.

다만, 초층에 비해 상,하층 각형을 낮게 조출하였다.

 

전층 옥개석 상부에 각호각 3단 괴임은 유일한 작례 아닐까?

 

 

 

상부에는 부도 옥개석으로 추정되는 부재를 올렸다.

 

 

 

어린이 놀이터 옆 석불좌상

하대석,상대석을 활용하여 현부재라도 활용하여 작은 전각을 지어 봉안하였으면 좋겠다.

 

석탑재와 부도재

또한, 부도재와, 석탑재를 구분하여 각각 올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8.06.17

 

아래는 2009년 영전사지,영전사 답사기이다.

 

 

 

영전사. 풍기 욱금리에 있었 사찰로, 신라시대인 669년(문무왕 9)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의상이 중국 당(唐)나라에서 귀국하여 소백산(小白山:1,439m) 영지봉 하추동에 창건한 사찰은 풍기읍에서 북쪽으로 3㎞ 정도 떨어진 영전마을 뒤편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폐사되었다. 

 

1924년에 옛 절터에서 석불 입상이 발견되면서 해운선사가 중창하였다. 1936년 경남불찰통도사포교당(慶南佛刹通度寺布敎堂)으로 등록하고 이듬해 조선총독부 관보에 기재됨으로써 사찰의 지위를 얻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49년 소백산 전투사령부의 소거령으로 욱금리의 영전사를 폐하고 지금의 풍기읍 동부리로 옮겨갔다.  

 

현재 영전사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인 영주 영전사 석조여래입상(榮州靈田寺石造如來立像:경북유형문화재 324)을 비롯해 연화대석(蓮花臺石)과 정원에 있는 팔각대석(八角臺石), 석탑부재(石塔部材), 초석재(礎石材) 등이 그 때 옮겨 갔다고 한다. 

 

 

영전사지 초입 인삼밭 두렁에 누운 당간지주(?) 기단석. 나란히  2기가 누워 있다. 동행한 진당님의 설명으로는

인삼밭 속에 높이8m의 당간지주가 매몰되어 있다고 영전사지에 거주하시는 스님에게 전해들었다고 한다.

 

 

인삼밭. 저 어딘가에 당간지주가 있다고 한다. 금선정 근처에서 화실을 가지고 우리카페 있는 치즈히난세님께서 한달음에 달려 왔다. 1년 만인가? 무척 살갑게 맞아주었다. 수필협회장도 겸하고 있으니 답사기 한 편 나올련가?

 

 

스님이 거주하시는 법당 앞에 위치한 부도 몸돌. 팔각 원당형으로 문비와 자물쇠를 두 곳에 모각하였다. 문비사 새겨진 면을 제외한 면에도 신장상을 새겼다.

 

 

자물쇠는 문비 상단에 위치하는데 거의 중앙에 새겼다. 금강상인가?

 

 

사리공

 

 

 

연화대좌

 

 

주초와 기단석 

 

 

소백의 정기를 품은 영전사지에서 바라본 삼가저수지. 영전사 옛영화를 물밑에 간직한 채 고요하다. 누군가가 할 일이리면 더늦기 전에 발굴 조사가 이뤄져 옛모습의 일부라도 되찾아 새벽 도량석의 향기가 가람에 가득하고 저녁 예불  범종소리가  마을 아래로 은은하게 울려 퍼질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2009.06.28 


 

 

 

 

 

 

 

 

 

 

 

 

 

 

 

 

 

 

 

 

 

 

 

 

 

 

 

 

 

 

 

 

 

 

 

 

 

 

 

 

 

 

 

 

 

 

 

 

 

 

 

 

 

 

 

 

 

 

 

 

 

 

 

 

 

 

 

 

 

 

 

 

 

 

 

 

 

 

 

 

 

 

 

 

 

 

 

 

 

 

 

 

 

 

 

 

 

 

 

 

 

 

 

 

 

 

 

 

 

 

 

 

 

 

 

 

 

 

 

 

 

 

 

 

 

 

 

 

 

 

 

 

 

 

 

 

 

 

 

 

 

 

 

 

 

 

 

 

 

 

 

 

 

 

 

 

 

 

 

 

 

 

 

 

 

 

 

 

 

 

 

 

 

 

 

 

 

 

 

 

 

 

 

 

 

 

 

 

 

 

 

 

 

 

 

 

 

 

 

 

 

 

 

 

 

 

 

 

 

 

 

 

 

 

 

 

 

 

 

 

 

 

 

 

 

 

 

 

 

 

 

 

 

 

 

 

 

 

 

 

 

 

 

 

 

 

 

 

 

 

 

 

 

 

 

 

 

 

 

 

 

 

 

 

 

 

 

 

 

 

 

 

 

 

 

 

태평초로 포만감이 가시지 않았지만 진당님은 풍기의 먹거리라며 풍기 '情 도너츠 가게"로 안내했다.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가게로  인삼가루(?)를 두른 쫀득쫀득한 느낌의 도너츠였다.

 

그 시장 안골목에 위치한 영전사. 유치원 또는 어린이 집을 운영하는 듯 장식이 천진스럽다. 외형적인 모습과 달리 탐방객에게 경계의 빛이 역력하며 비개방적인 분위기가 깔려 있어 의아스럽다. 나만의 느낌이었으면 좋겠다. 

 

영전사 입구 옆집은 10.26 비극의 현장에 있었던 김계원 비서실장의 생가라고 한다. 또한 풍기 인삼에 가려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풍기 특산물의 하나인 인견 공장이 대웅전 뒤에 위치해 있다. 인견에 대한 자료를 가져오니 훗날 님들의 답사 도모시에 견학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 인견이란?
  • 영주(풍기)지역의 특산품으로 주원료는 정제된 낙엽송의 목재 펄프와 면씨앗에서 분리한 잔털의 린터(길이가 짧은 면섬유)가 쓰이며 셀룰로오스 섬유를 원료로 하여 제조한 섬유입니다.
    • 풍기인견의 특징
    • 인견(100% Viscose rayon)은 펄프(나무)에서 추출한 요사(실)로 만든 순수 자연 섬유
    • 풍기인견은 자연섬유라서 가볍고 시원하며 몸에 붙지 않고 통풍이 잘 되며 착용시 촉감이 아주 상쾌합니다.
    • 땀 흡수력이 탁월하며 정전기가 전혀 없는 "냉장고 섬유, 에어컨 섬유"라 불리울 정도로 인기가 높으며,
    • 특히, 식물성 자연섬유로 피부가 여린 간난아기에서부터 알레르기성 피부, 아토피성 피부 등 피부가 약한 사람에게 아주 좋은 섬유
    • 연로하신 노인 분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효도 상품입니다.
    • 풍기인견 연혁
    • 풍기직물(인견)은 1934년경부터 평남 덕천지방에서 명주공장을 설립 운영하던 (족답기 15대 규모) 일부 월남인들이
    • 1938년경 풍기 동부동에 40평 정도 공장 2동 신축 수족기 32대, 족답기 8대로 직조를 시작한 것이 풍기 직물(인견)의 시작입니다.
    • 6. 25 동란 이후 이북 거주 직물공장을 경영하던 월남민들이 대거 풍기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인 가내공업으로 발전 이때부터 풍기를 대표하는 전통산업으로 자리잡고 현재까지 우리나라 인견직 최대 생산지역으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 풍기인견 세탁법
    • 세탁기 사용시 망에 넣어서 세탁하세요.
    • 자연섬유이기 때문에 세탁 후 다림질을 해주면 부드러운 재질과 촉감이 살아닙니다.
    • 섬유유연제를 사용하지 마세요(정전기 없음)  

     

    중정에는 주초. 탑부재 등 석조부재가 널부르져 있다.

     

    절집에 흐르는 기운이 이부재의 출처와 연관이 있는걸까?

     

     

    항마촉지의 석불 수인도 보인다. 

     

     

     안상안에 불상과 향로가 새겨진 팔각 대좌. 풍기 욱금동 전 영전사지에서 금계중학교로 옮겼다가 다시 영전사 풍기포교당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석물의 3단 8각대좌의 지대석으로 추정된다. 향로는 중앙에 큰 향로를 두고 양쪽에 작은 향로를 붙혀 새겼다.

     

    안상 안에 새겨진 불상은 모두 좌상으로 대좌는 연화대좌인 듯 하나 뚜렷하지 않고 둥근 두광에 각기 다른 수인을 하였다. 불상 뒤로 길게 천의 자락이 날리면서 돌아 나가고 있는데 이 자락도 각면이 다르게 조식되었다. 마모가 있지만 세부표현이 상당히 정교하여 영전사 의 다른 석조유물과 함께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고 한다.

     

     

    지대석은  8각 대좌 이며, 초층(?)몸돌에는 양우주가 모각되어 보이고,옥개석 3개가  올려졌다.

       

       

    초층 옥개석은 5단, 2층은 4단, 3층은 3단으로 약화되었다.

     

    낙수면 경사가 심하고, 옥개석은 마모가 심하지만  3층 옥개석은 완전하며 처마 끝으로 반전이 보인다.

      

     

     옥개석 위 상륜에는는 8각의 석등 또는 부도 옥개석이 얹혀 있다.

      

    영전사 석조여래입상

     

    "석조여래입상은 1924년 3월 욱금리 영전마을의 한 주민의 현몽(現夢)으로 땅속에서 발견되어 영전사에 봉안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불상, 광배, 대좌가 모두 한 돌에 조성되어 있었으나, 6·25동란을 전후하여 현위치로 옮겨 모시면서 광배는 모두 유실되었고, 대좌 역시 후반부가 떨어져 나가고, 상호의 코와 이마, 손가락,발등 등에도 일부 손상을 입었다.

     

    전체적인 조형미와 세부 조각수법은 매우 우수한 편에 속하며,원만한 얼굴과 당당한 어깨, 유려한 의문과 옷자락의 원호문, 대좌의 앙련 등 각부의 양식이 통일신라시대 전성기인 8세기경의 조각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이 불상이 출토된 영전마을의 영전사는 의상대사가 3천문도를 거느리고 90일 동안 '화엄대전'을 강의 했다는 소백산 추동(錐洞 : 송곳골)이 바로 이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어칸 문을 열면  정면에 봉안되어 있으며 우측으로아미타를 주불로 지장과 관음을 협시로 모셨다. 약사 여래불로 불리우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왼손,오른손 수인이 바뀐 약사여래불은 처음 접한듯 하다. 후불탱도 약사여래이며 협시보살인 일광월광 보살도 시립해 있다.

     

    영전사 사적기에 의하면 부처님의 출토 당시 이야기가 기록되어져 전해오고 있습니다. 1923년 밤에 영전마을 거주 황영석(黃永奭)씨의 부인 김금강화(金金剛華) (당시 45세)가 꿈을 꾸니 한 분의 노승이 나타나서 이르되


    “소승은 수백년을 지중(地中)에 암매(暗埋)되어 광명을 못 본지 오래이다. 원컨대 나로 하여금 출세(出世)케 할진데 부인의 원(願)을 성취케 하리라.”


    하니 괴이하게만 여기고 있었더니,  3월 13일 밤 꿈에 한 젊은 스님이 말하기를


    “전일 노승의 부탁을 듣지 않는 것은 무슨 연고요?”


    부인이 말하되


    “대사는 어느 절에서 오셨습니까?”


    스님이 답하되,


    “촌후율수(村後栗樹) 아래에 있으니 속히 출세케 하여 주시오.”


    하고 홀연히 사라지자 깨어나서 이상히 생각하고 다음날 아침에 가장되는 황영석씨에게 설명하고 동네 인부와함께  밤나무 밑을 조사하여, 대석불(大石佛)을  발굴하였다.   

     

     

    영전사는 저 어드매쯤일까?   대화합의 길이 분명 있을텐데...

     

    2009.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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