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영주시

영주...소백산 성혈사

임병기(선과) 2018. 7. 3.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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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기록을 보니 2005년에 마지막으로 들렸다.

 

많은 불사가 있었다.

일주문, 루대...

 

아래는 2005년 글이다.

(부끄러움도 나의 이력이다)

당시에는 산신각 지붕이 허물어진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오래전부터 성스런 구멍절집 나한전이 보고 접어서 몸살이 났었다.

성인이 수도했던, 훌륭하신 스님의 참선 도량이던 뭐 중요한가?  聖穴이라도 좋고, 性穴이면 더 좋겠구만...분명 우측에 성혈사 입간판을 보았는데 무엇에 홀린듯이 직진을 하였더니 아~~~~~~ 이런 횡재가 있는가? 잘 단장된 서낭당이 보인다.

 


     성혈사 초입의 서낭당

 

아주 오래전 강원도 태백에서, 몇년전 육사 생가 가는 여정에서 잠시 스쳤지만  이렇게 정성 들여 모셔진 서낭당을 보다니... 나도 몰래 수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가슴이 뛰고 코끝이 시큰해 온다. 이마을 사람들에게 한 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우리 역사, 민속에서 마지막으로 모셔질 성서런 공간이라는 불길한 마음이 자꾸 들어, 참배를 마치고도 계속 직진하였더니 길이 막힌 곳에서 동네어르신들이 사과 선별 작업을 하신다.

 

어르신!! 성혈사 어디로 갑니꺼?

저아래 서낭당 못 미쳐 왼쪽으로 가야하는데 너무 올라왔구먼!!

이상하다 내가 오늘 왜 이러지?

 

'교행이 불가한 좁은 소로 산길, 황톳길이라면 더 좋았을 것을, 차에서 내려 터벅터벅 먼지 삼켜가며 시간을 잊을 수 있게...'라는  이율배반적인 달콤한 상상을 하며 짙은 녹음속을 가리마처럼 가늘게(?) 그려진 길을 올랐더니 텅 빈 절집 마당이다.

 

객도 없고, 승도 보이지 않는다.

혹 혜곡 선생이 말한 스산한 아름다움이 이런 분위기 일까?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자 처럼 갈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중략) 마치 그리움에 지친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택도 없제? 내가 무슨 희한한 아름다움을 알겠는가? 혼자라는 생각에서  공포가 엄습해오고 사람이 그리운 것을, 사무치게(?) 그리운 것을...

 

대웅전도 없고 양반집 사랑채처럼 보이는 주전각은 '큰 법당'이며, 정갈한 절집 마당에 발자욱만이 어지롭고, 큰법당과, 나한전을 에워싼  가지가 많고 솔잎이 복스러운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소나무가 이채롭다.

 

나한전 못미쳐 단칸 산신각이 보인다. 흔히들 볼수 있는 산신과 달리 목조 호랑이를 타고 계신다.

아마 민간신앙 보다는 전세계에 사육사로 부터 추앙받는 산신인가 보다.

또한 산신각에는 가난한 절집에서 칠성을 모실 여력이 없어서인지 목숨을 관장하는 칠성을 대신해 긴 타래실을 모셨다.

허물어져 내리고 있는(현재 진행형이다) 지붕이지만 느낌이 너무 좋다.

아마 오랫동안 이렇게 나를 흡족하게 해 줄 산신각은 만나지 못할 것 같다."

 

 

새롭게 조성한 루대. 전망이 그만이었다.

 

대웅전

 

성혈사聖穴寺

고운사 말사이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상량문에 의하면 신라 때 의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의상은 소백산에 들어와 국망봉 아래 월명봉 동남쪽 기슭에 초막을 짓고 터전을 찾던 중 마침내 봉황산 기슭에 부석사를 창건하였다. 처음 소백산에 와서 초막을 쳤던 자리에도 사찰을 열었는데 이것이 바로 초암사이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의상은 왕명으로 소백산 기슭에 초암(草庵)을 짓고 있었는데, 매일 지붕의 서까래가 없어졌다. 의아하게 여긴 의상이 찾아보니 서까래가 인근 숲 속에 쌓여 있었다. 이에 주위의 풀을 뜯어 초막을 지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본래 초암사가 있었는데 여기서 수도를 하던 의상이 이 절을 창건했다고도 한다. 승전(僧傳)에는 성승(聖僧)이 바윗굴에서 나왔으므로 성혈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현재에도 그 굴이 있다.


『재향지(梓鄕誌)』에 의하면 성혈사는 초암사 동쪽 골짜기에 있는데 초암사와 같은 때 창건했다는 내용을 전한다. 성혈사는 초암사와 부석사의 사이에 있으며 바위굴은 절 아래 30m 지점에 있다. 이 절의 비로자나불상은 9세기 무렵 조성되었다. 한편 조선 중기 이후에 편찬된 문집류에 이 사찰이 언급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황(李滉)과 허목(許穆)의 문집, 특히 조보양(趙普陽)의 『팔우헌집(八友軒集)』과 김진동의 『소암집(素巖集)』, 권정침의 『평암집(平庵集)』에 의하면 성혈사에 승려 와운당(臥雲堂) 신혜(信慧)가 주석하였던 사실을 살필 수 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산신각

 

 

나한전

 

 

석등(1)

귀부,간주석의 용이 이채롭다

하지만, 서로 매치가 되지 않는다.


조성시기가 불분명하다.


 

하대석의 귀부.간주석 용


 

 

 

 

석등(2)

거북 머리가 훼손된 상태이다.


 

 

 

 

 

나한전

보물 832호. 1984년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553년(명종 8)에 창건해 1634년(인조 12) 각용이 중창했고 1742년 7월부터 1746년까지 학순이 중수하였다.

 

정면 3칸, 측면 1칸, 겹처마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정면의 투각된 창살이 아름다움을 더한다.

 

 

정면 창호.

 

 

방풍판,

창방.평방.도리

 

 

 

협칸(좌).

솟을 꽃창살이다.

 

 

모란 꽃 맨위의 새는 무슨 의미일까?

 

 

 

 

어칸

십장생을이 투각되어 있다.

 

아래는 2005년 올린 글이다.

 

"연꽃무늬를 새긴 협칸 문살,가운데 문 두 짝엔 연꽃과 연잎, 학,·구름,동자승,용,물고기,게가, 오른쪽 문은 화려한 연꽃들도 장식돼 있다. 통판에 투조라는데, 본디의 단청이 퇴색된 모습이 참말로 조~오타!  연으로 인해 연화장 세계, 반야용선으로인해 바다속을 상징, 단지 장엄의 의미등 제각각의 해석이 난무하지만 이놈은 민화풍으로 보고 싶다. 

 

세상에서 태어나서  소과, 대과에 연이어 장원급제하여 아들 딸 많이 낳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천수를 다한 후에는 극락왕생하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다음 세계에 태어날 때 연꽃 봉오리에서 태어난다는(심청도 연꽃속에서 환생했다) 불교의 연화화생을 상징하여 '동자(사람)는 이세상에 태어 나서', 쌍어문은 금관가야의 상징문이며 민화에서 다산의 상징 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과거의 소과,대과를 의미하며,' 게는 갑각류이며 갑을 甲으로 해석 제일로 보아서 '장원 급제'를 말한다.(요즘도 이름에 甲자가 들어가는 사람은 100% 맏아들이다)

 

그럼 부귀 영화는 무어냐고? 일찍이 애련설의 주돈이는 모란은 '부귀 영화'요, 국화는 은일이며,연은 군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주돈이는 유교적 해석이지만 , 민화에서도 모란은 부귀,영화를 상징한다. 뿐만 아니라 유유자적하고 있는 새는 솟대의 오리, 물새처럼 이승과 극락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보여 '극락왕생'을 안내하는 메신저로 보인다.'아들, 딸 많이 낳고'라는 의미는 연밥,개구리 알로 추론이 가능하고, '소과,대과 연이어 급제'는 蓮이 連과 같은 발음으로 민화에서 자주 응용되며, 용은 '출세를'상징하는 동물로 등용문 고사에서도 알 수 있다.

 

결국 성혈사 나한전 꽃창살은  나한전 불사때 왕족, 사대부, 신흥 갑부 등 어떤 사람의 큰 시주로 개인의 염원을 빌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근거? 물론 없습니다. 어떤 책에도 이런 해석은 없답니다.

 

아무도 없는 절집인데 소설 한편 탈고하고서는 나한전 법당에 앉아 스님 행세할렸더니 고얀놈의 등장을 알았는지, 아니면 나한전 주인은 자기인 것을 과시할려는지 말벌이 무리지어 머리위를 비행하며 반강제로 밖으로 밀어내더라."

 

 

 

 

 

 

 

 

 

협칸(우)

솟을 꽃창살

 

 

 

 

 

 

나한전

16나한, 주존불을 비로자나로 모셨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연화대좌는 수미단에 가려져 있다.

호분이 입혀져 정확한 본모습은 알 수없으나

나발, 백호가 있고. 법의는 통견이며, 지권인 수인을 결하고 있다.

두손과, 왼쪽 무릎은 보수하였고, 길상좌를 취하고 있다.

9세기 후반에 조성된 불상으로 전한다.


그나저나. 믄화재청 홈페이지에는 2007년도에 07.30일 시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건만 사진도, 글도 아직 준비 중이란다.

 

 

 


조선후기 부도



곰솔


 

201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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