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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완도군

완도...청산진성

by 임병기(선과) 2017.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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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진성靑鎭城

청산도 당리마을 입구 서편제 촬영지 초입 고갯마루 좌측에 축성되어 있다.

 

 

청산도는 한때 왕실의 공도정책에 따라 주민이 거주하지 않았으나  잦은 왜구의 출몰로 1681년(숙종7년) 수군만호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고 한다. 이후 1866년(고종 3) 이곳에 당리진(, 일명 )이 설치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진이 설치된 이후 이곳은 서남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청산도진은 1895년(고종 32)에 가리포진과 함께 폐진되었다.청산진성鎭의 은 15척,10리로 동서남 3문을 두었다. 2010년 흔적만 남아있던 청산진성터가 복원되었으며 성곽에 오르면 당리, 도락리, 서편제 촬영지가 눈앞에 전개된다.


조선왕조실록의 청산진에 관한 내용을 발췌했다.


1.숙종실록 11권, 숙종 7년 1월 3일 정사 2번째기사 1681년 청 강희(康熙) 20년.


민유중(閔維重)이 말하기를, "삼남(三南) 연해(沿海)의 각 고을에 전선(戰船)을 배치한 것은 원래 고제(古制)가 아닌데, 새로 만들거나 고칠 때에 단지 물력(物力)만 허비하고, 완급(緩急)에 쓸만한 가망이 없습니다. 신은 연해(沿海)의 여러 섬 가운데 요해처(要害處)를 가려서 변장(邊將)을 더 설치하여 전선(戰船)을 배치하고, 각 고을의 전선은 마땅히 혁파(革罷)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진(康津)에는 고금(古今)·청산(靑山)의 두 섬이 있는데, 토지가 비옥하고 백성이 많기 때문에,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과 명장(明將) 진인(陳璘)이 유둔(留屯)했던 곳입니다.


고금도(古今島)는 땅이 크니 첨사(僉使)를 설치하고, 청산도(靑山島)는 조금 작으니 마땅히 만호(萬戶)를 설치하여, 각 고을의 전선(戰船) 2척 씩을 옮겨 주어서 능로군(能櫓軍)·사포수(射砲手)를 모두 섬에 사는 백성으로 충정(充定)한다면, 연해(沿海)의 방비(防備)가 가장 착실(着實)해져서 조정(朝廷)에서도 수군(水軍)을 나누어 주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두 섬 외에 또한 진을 설치하기에 합당한 곳이 많지만, 일시에 같이 거행(擧行)할 수는 없으니, 먼저 두 섬을 시험하여 그 성효(成效)를 살펴보고 차례로 설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이상진이 말하기를,

"흥양(興陽)나로도(羅老島)가 또한 진(鎭)을 설치하기에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선 두 곳을 시험해 보도록 명하였다.


2.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8월 10일 병신 3번째기사 1866년 청 동치(同治) 5년


병조(兵曹)에서, 청산도靑山島에 진장(鎭將)을 설치하는 일에 대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올린 별단(別單)으로 계하하여, 고금도(古今島), 신지도(薪智島), 마도(馬島),소안도(所安島)등 4개의 진을 모두 본진에서 관할하도록 하였습니다. 고금도, 신지도, 마도의 가리포 진관(加里浦鎭管)은 청산도 진관으로 고치도록 계하하였습니다만, 별장(別將)은 본래 진관이 없기 때문에 소안도를 청산 진관으로 고치는 것은 계하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슬로길의 구간의 일부이다.

 

 

청산진성이 감싸고 있는 당리마을

멀리 우측에도 복원된 청산진성이 아득하다.

 

 

청산진성에서 바라본 도락리 풍광

 

 

서편제 촬영지

 

도락리 앞마다의 독살이 확연히 드러난다.

 

 

뚜벅이로 성곽을 종주하면서 눈앞에 파노라마로 전개되는 청산도의 풍광을 즐기는 것도 좋을 듯 하다.

 

2017.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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