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원주시

원주...법천사지

임병기(선과) 2016. 10. 1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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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려 앉은 법천사지

가장 최근의 답사가 2002년 이었으니 이렇게 발굴이 진행된 줄도 몰랐다.


 

"법천사에 관하여 남아있는 최초의 기록은 928년(신라 경순왕 2)으로, 신라 하대에 이 지역의 대표적 사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초기 유가종사원으로 금산사와 함께 개성 밖 지방 선종사찰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무신정권 이전까지 법상종의 대표적인 사찰로 왕실과 문벌귀족의 후원을 받아 번성한 사찰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0세기에서 12세기까지 관웅(寬雄), 지광국사(智光國師) 해린(海鱗), 정현(鼎賢), 덕겸(德謙), 관오(觀奧), 각관(覺觀) 등 유명한 승려가 계셨다. 조선 초기 유방선(柳方善1388-1433)은 이 곳에 별서를 만들고 제자를 가르쳤는데 이 때 한명회(韓明澮)․서거정(徐居正)․권람(權擥) 강효문등이 그에게서 배웠다. 1609년 허균(許筠)이 방문했을 때에는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음을 그의 기록을 통해 알수 있다."...디지털문화대전


  

  

사진출처/뉴시스


2014년 11월 문화재청 발표 자료

사적 제466호 '원주 법천사지'에서 금당 터가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발표내용에 따르면 사지에는 탑지 및 금당지, 강당지가 남북 방향으로 일직선 상에 놓여있고 특히 금당지 전면으로 동서에 각 1기의 탑이 배치된 쌍탑 1금당 형식의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가람 구조인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법천사에 들렸던 글을 가져왔다.

(이때는 사진을 직지 않아 지금보다 여유로운 답사길이었는데, 건방진 객기고 보이고...)

 

금바우여정...법천사지

 

원주 고을을 생각하면 
어린이 잡지에서 읽었던 과거 보러가는 유생, 구렁이, 꿩에 관한 전설로 늘 유년의 기억이 새롭다. 

그래서인가? 
원주의 어머니들이 유독이 모성애가 강한 것이 꿩의 속성을 가슴 깊이 품고 살아서라고 설익은 판단을 해 본다. 

혹 본적이 없든가? 
사람과 차량의 통행이 적은 도로 위 꿩 가족의 나들이를? 
절대 뛰지 않는다. 
어미는 새끼의 보폭에 맞춰 걸을 뿐 새끼를 외면하고 도망가지는 않는다. 
그뿐인가 꿩은 알을 품고 있는 동안 산불이 나도 날아가지 않고 알과 함께 불에 타죽으며 둥지를 비운 사이 불이 나도 그냥 둥지로 돌진하여 새끼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지 않는가? 

미물인 꿩도 이럴진데 
오늘의 나를 존재케 한 나는 과연 울 선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법천사지 가는 길 난데 없이 만난 충민공 임경업 장군 추모비 앞에서 초라하고 왜소해져 부끄러움에 숨조차 가눌 길 없다. 
중시조의 탄생지도,제 뿌리도 모르는 넘이 무슨 답사를 다닌다고...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예전에 접했던 최창조 교수의 글에 의하면 이곳의 지형은 옥녀세발형(玉女洗髮形)인지라 1개 면에서 4명의 비와 빈이 탄생한 길지라 말하지 않았든가? 

근데 어찌하여 울선조는 옥녀의 기를 받지 못하고 비운의 장군을 탄생하게 하였는가? 
나의 무지를 원망도 하지만 길 위에서 만난 중시조의 추모비 분명 더운 날 상쾌한 청량제이자 카타르시스가 아닌가? 

작은 공간이지만 허균과 허초희(허난설헌), 균의 형 삼남매의 문재와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손곡 이달의 비와 나란히 조성된 공원이 정겹기 그지 없다. 

아쉬움을 남기고 발굴이라는 미명하에 황량하게 파헤쳐진 법천사지를 들렸지만 텅 비어 있다. 
어지럽게 뒹굴고 있는 석재, 금당터(?), 두신광배, 배례석, 부도비(부도의 주인공이 기억 나지 않는다) 앞에서 난 한편의 소설을 쓰고 있다. 

안내문과 고려 양식의 부도비에 주안점을 두고서, 사상누각일지라도 도편수가 되어 가람을 꾸미고자 달고를 치고 있는 중에 장삼을 걸치고 바랑을 매고 삭발한 콧수염을 기른 스님 한분이 다가와서는 알 듯 모를 듯한 사자후를 토하신다. 

드디어 실타래를 잡은 느낌으로 
반상 위에 무수한 돌을 깔고 무릎을 꿇고서 수담을 청하였지만, 그참 고수가 실수를 남발한다. 
(미륵신앙의 중심지라, 광배는 아미타불의 것이라는 등등) 틈을 노려 겁도 없이 고수의 대마사냥에 나갔지만 기가막혀 유유히 오목을 두는 것이 아닌가? 3.3도 무시하고 때론 알까기를 넘나들고... 

스님 어느 절에 계십니까? 
아주 정중하게 여쭈었더니 동국대, 대학원에서 국사를 전공하고 현재는 일산의 모 사찰에 있으며 신흥사에 승적을 두고 있다면서 바랑 속에서 신문기사가 가득 스크랩 된 바인더를 꺼내고선 전국의 폐사지에 대하여 명강의를 하신다. 

분명 고수인 것 같은데 참 알 수 없다. 

스님 당간지주가 보이지 않는대요? 
내가 여길 3번째 왔는데 당간지주는 없어라고 말씀하시길래, 인사를 여쭙고 먼저 내려와 밭고랑을 매고 계신 촌부에게 물었더니 마을 입구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 스님은 누구일까? 

난 사찰의 뒷꽁무니로 들어와 역으로 답사하고 있다. 
멍청한 중생 득수와 파수도 구분 못하는 반풍수 빙신 쪼다 얼간이... 

빵빵하게 잘생긴 당간지주 알현하고 당산목 같은 나무그늘에 주차한 곳으로 돌아오니 스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여기가 서원 터요 라시며 법천사지의 내력과 연관을 지으신다. 
슬쩍 끼어 들어 소수서원의 숙수사지를 말씀드렸더니 단종 복위와 금성군과 관련 훤히 꿰뚫고 계신다. 

스님이 아니었다면 당산목 밑이 서원터인지도 모르고 갈 뻔 했다. 
거듭 고마움을 느꼈다. 

스님 어디로 가시나요 여쭈었더니 
부론면 소재지에 보따리를 두고 와 거기까지 가자신다. 

부론면 소재지 다방 앞에 내리시고는 계란에, 참기름 동동 띄워 모닝커피 한잔 하자고 붙잡으신다. 

거돈사지, 여주 답사 길이 아니라면 스님과 알까기든 오목이든 도끼자루가 썩거나 말거나 하세월 신선놀음 하고픈 법천사지 답사길 이었다. 

2002.7월 

 

 

 

법천사지 석축

한명회,서거정, 권람,강효문이 새긴 명문은 어디에 있었을까?


 

원주에 부임하는 민정을 보내다... 서거정/한국고전번역원

 

치악산중독서사雉嶽山中讀書寺 치악산 산중에 내 글 읽던 절 있었으니
소류력력기전시少遊歷歷記前時 젊어서 놀던 옛 시절이 역력히 기억나네

법천정하사제탑法泉庭下詩題塔 법천사 뜰아래는 탑에 시를 써 놓았고
흥법대전묵타비興法臺前墨打碑흥법사 대 앞에서는 비문을 탁본했었지 

당일행장려불만 當日行裝驢不滿 당시 행장은 나귀 한 바리도 다 안 찼는데
지금귀로몽선지至今歸路夢先知 지금 돌아가는 길은 꿈이 먼저 아는구나
백두미수중려흥白頭未遂重遊興 백발토록 거듭 놀고픈 흥취를 이루지 못해
送別悠悠攪我思 송별의 마당이 내 생각을 산란케 하는구려


 

 

지광국사 현모탑비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손 꼽히는 부도탑비이다

귀부는 넓은 지대석 위에 놓였고 밑에는 구름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목을  길게 곧추세우고 목에는 비늘을 표현했다. 등에는 귀갑문을 새겼으며 안에 왕王자를 양각했다. 

중앙에는  복련을 새긴 비좌를 마련하고 비신을 세웠다.

이례적으로 비신 상부에 당초문과 봉황, 수미산, 구름, 비천상, 삼족오, 용화수, 토끼 등의 문양을 새겼다. 
왕관 모습의 머릿돌 네 귀에는 귀꽃을 표현하였고, 중앙에는 3단으로 이루어진 연화문을 새겼다.

상륜에는 복발위에 연꽃이 조각된 세 개의 보륜이 올려져 있다


글은 고려 초의 문장가인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가 구양순체로 썼으며

1085년(고려 선종 2)에 조성하였다.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문(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文)...출처/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


시호(贈諡) 지광국사(智光國師) 현묘지탑비명(玄妙之塔碑銘) (題額)
고려국(高麗國) 원주(原州) 법천사(法泉寺) 강진호도(講眞弘道) 명요돈오(明了頓悟) 계정고묘응각(戒正高妙應覺) 탐현도원(探玄道源) 통제연오법동(通濟淵奧法棟) 구행요성도수(具行了性導首) 융소랑철(融炤朗徹) 증시광국사(贈諡智光國師) 현묘지탑비명(玄妙之塔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중대부(中大夫)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同中書門下) 평장사(平章事) 판상서(判尙書) 예형부사감(禮刑部事監) 수국사(修圀史) 겸태자대부(兼太子大傅) 상주국(上柱國) 신(臣) 정유산(鄭惟産)은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승봉랑(承奉郞) 상서도관(尙書都官)낭중(郞中)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안민후(安民厚)는 칙선(勅宣)을 받들어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다.

신(臣)이 듣건대, 구담미(瞿曇彌)께서 묘음(妙音)을 부연(敷演)하시니 삼마지(三摩地)에 뻗쳤으며 소반도(蘇槃度)로써 고론(高論)을 성취하였다. 팔식(八識)의 근원을 궁구하고 알선하여 유식(唯識) 상응(相應)의 진종(眞宗)을 개창하였고 점차 널리 정교(政敎)를 현양(顯揚)하였으니, 이는 아상(我相)과 팔상(人相)을 벌유(筏喩)에서 경계하고 주재(主宰)궤지(軌持)를 나타내었다. 비록 지극한 이치는 허현(虛玄)에 그 근본을 두었으나 평등하여 차별이 없고, 모든 근기(根機)가 영리하고 어리석은 것을 말미암아 깨달음에도 천심(淺深)이 있으니, 우미(愚迷)한 중생을 급인(汲引)함에 있어서는 권실(權實)의 교리(敎理)를 지진(指陳)하였다. 점차 시간이 흘러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더욱 멀어져, 상법시대(像法時代)를 지나 말법기(末法期)에 접어들면서 부처님께서 남기신 유문(遺文)이 점점 무너졌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현장법사(玄奘法師)와 같은 스님이 상속(相續) 출세하여 아수라(阿修羅)의 굴(窟)에 뛰어들어 권권복응(拳拳服膺) 하였으며, 보승(寶乘)을 돈독히 신봉하여 칼날 같은 변재로 널리 홍포(弘布)하였다. 진(晋)나라 때 번역한 경전들의 내용을 승습(承襲)하여 그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고 아울러 무너진 강령(綱領)을 떨쳤으며, 수역(隋譯)된 경전에 따라 그 심오(深奧)함을 끌어내었으니 이는 다 함께 끊어진 단추를 다시 이은 것이다. 동쪽으로 전래된 법(法)이 특이한 것이 아니니 내향자(內向者)의 마음이 그 마음 스스로 통달한 것 뿐이다. 그러므로 간간이 헌걸한 괴웅(魁雄)이 출세하여 선현들의 자취를 밟아 무윤胤)이 되어 그 위명(威名)을 현겁(賢劫)에 떨치고, 계정(戒定) 등의 삼학(三學)을 범제(梵題)에서 연마하였다. 자씨(慈氏)의 신분이 양무제(梁武帝) 때 쌍림부대사(雙林傅大士)로 강림한 것을 본받았으며, 문수보살이 자취를 나투어 서주(西周) 목왕(穆王) 때 중국으로 불교를 전래한 것과 같다고 하겠다.


널리 동국(東國)인 인▨(仁▨)을 교화하되 상(象)·정시대(正時代)의 법(法)을 크게 홍포하고, 성조(聖祚)를 위해 정성껏 기도하며 임금을 도와 홍균(鴻均)을 이루게 한 스님은 오직 우리 국사(國師) 뿐이라 할 것이다. 스님의 휘는 해린(海麟), 자는 거룡(巨龍), 속성은 원씨(元氏), 어릴 때의 이름은 수몽(水夢)이었으며 원주(原州) 출신이다. 고조부와 증조부 때부터 선행을 쌓고 경사스러움을 행하였다. 희역(犧易)과 안정(安貞)의 인요(因繇)를 상고해 보건대, 길(吉)·흉(凶)·회(晦)·린(悋) 중의 회(晦)로 말미암아 밝혔으며, 언승(彦升)이 검소하며 절약하였던 가풍(家風)을 지키고순박한 바탕을 깨뜨리지 아니하였다. 할아버지의 휘는 길견(吉肩)이니, 마음은 서수(筮首)로 점을 쳤으며, 음양(陰陽)을 연구하여 상징을 나타내었으니 어찌 운수가 불길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구차하게 그를 면하려고 하였겠는가! 찬구(鑽龜)타와(打瓦)의 점을 쳐서 그로부터 얻은 조짐으로 의심하였던 운수를 예지하여 세상일로 하여금 미혹함이 없었다.


아버지의 휘는 휴(休)이니 관직은 아관(衙官)이르렀는데, 모든 사람들이 선연(先掾)들보다 뛰어난 관리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일찍부터 훌륭한 상황(床喤)의 아들 낳기를 염원하여 항상 초연(椒衍)의 시(詩) 듣기를 원하였다. 어머니는 이씨(李氏)니 영리함은 제호(提壺)에 계합하고 공손함은 거안(擧案)보다 더 얌전하였다. 끝없는 원력(願力)은 광목부인(光目婦人)과 같고 용모의 아름다움묘안(妙顔)임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성선(聖善)의 태몽에 하해(河海)의 물이 맑게 범렴(泛瀲)하고 정천(井泉)에서는 물이 솟아 올랐다. 이로 인하여 임신하고는 일과로 탄기(呑氣)를 행하여 태아를 교육하였다. 이에 미루어 보면 어찌 발자취를 밟고 잉태하여 태어난 강원(姜嫄)을 부러워하겠는가? 탁태(託胎)할 때에는 그윽히 왕소(王邵)의 경우와 같았다. 이미 만삭이 되어서는 드디어 그 상서(祥瑞)를 발(發)하였다. 옹희(雍熙) 원년(元年) 세재(歲在) 알봉군탄년(閼逢涒灘年) 도월(涂月) 그믐날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어릴 때의 이름은 수몽(水夢)이었다. 옛날 중국에서 주(周)나라 명왕(明王) 24년에 강하(江河)와 천지(泉池)가 홀연히 범람하였으니, 이것이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상서(祥瑞)였는데,이것을 우리 국사의 탄생과 비교하면 그 시종(始終)의 징조가 하나도 다름이 없다. 국사는 일자분정(日蔗分精), 즉 태양의 정기를 타고 났으며, 연꽃과 같은 향기롭고 아름다운 성품을 받아 태어났다. 의지는 탐애(貪愛)를 단제하는데 예리하였고 마음은 색신(色身)과 명예(名譽)를 위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초년(齠年)의 나이에 이르러 이미 학문에 뜻을 두어 이수겸(李守謙)을 찾아가서 학업을 청하였다. 수겸(守謙)이 스님을 보고 특이한 그릇인줄 알고 말하기를, “나는 석학(碩學)이 될 기량(器量)을 지도할 능력이 없으니 너는 마땅히 밝은 스승을 찾도록 노력하라.” 하였다. 어느 날 관상을 잘 보는 한 노인이 있어 스님의 손금을 보고 국사에게 이르기를, “네가 만약 출가하여 스님이 된다면 반드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앞으로 통인달사(通人達士)가 되리라는 말을 듣고 다만 도주(道籌)에 종사할 생각에만 골똘히 잠기고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노장(老莊)의 개설(槪說)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따라서 사대부들의 헌면(軒冕)치수(錙銖)처럼 보고 고량진미(膏粱珍味)를 마치 강비(糠秕)와 같이 여겼다.


급히 서둘러 법고사(法皐寺)의 관웅대사(寬雄大師)의 처소로 가서 수학하던 중 관웅(寬雄)스님이 경화(京華)인 개성으로 떠났으므로 국사도 그 산중(山中)을 하직하고 떠나게 되었다. 관웅대사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오운산(五雲山)을 벗어나자마자 스님은 곧 걸망을 짊어지고 따라갔다. 천리를 멀리 여기지 않고 함께 연하(輦下)로 돌아갔다. 이어 곧 산의 서쪽을 점지(占地)하였는데 해안사(海安寺)와 선접(旋接)한 곳이었다. 준광방장(俊光方丈)에게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수도(修道)하면서 함장(函杖)에게 욕의(縟儀)를 펴고 시봉하기를 희망하며 정성을 다하여 표질(縹帙)을 관화(貫花)에서 연마하였다. 위(魏)나라의 창서(蒼舒)가 코끼리의 무게를 작은 저울로 알아 내던 나이에 이미 불교를 전해 듣고 알았으며, 가위나국(迦衛羅國) 구오사미(驅烏沙彌)의 류(類)와 같은 어린 나이에 이미 모든 사람들이 김공(金公)이라 존칭하였다. 그는 기연(機緣)을 검괄(檢括)하여 종요(宗要)를 격양(激揚)하되, 한가지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달아 진도(進度)의 결과가 그의 엄사(嚴師)보다 배(倍)나 높았다.


양지(兩智)삼명(三明)으로 도덕이 높아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계승하였다. 이와 같이 영특함을 알게 된 웅공(雄公)은 기꺼워하면서 해린(海潾 : 潾은 麟의 오자)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통화(統和) 17년 수하(首夏)의 달용흥사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품수(稟受)하였다. 탐·진·치의 마음을 씻어 그 오염(汚染)을 여의었으니 마치 손으로 공중(空中)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았다. 29살 때 숭교사(崇敎寺)를 창건할 때 감독을 맡았던 은공(恩功)으로 그 절의 초대(初代) 주지가 되었다. 자운사(慈雲寺)에서 거행하는 창살도량(唱薩道場)에 나아가서 부처님께 향을 올려 기도하였다. 어느 날 관웅(寬雄) 스님이 법천사(法泉寺)에서 잠을 자고 있는 동안 꿈에 새매 한 마리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왼쪽 손을 펴서 손바닥에 받들었다. 또 두 마리의 산군(山君)이 절 후원(後園)에 들어와서 서로 뛰고 놀다가 날이 밝아지자 떠나간 일도 있었다. 관웅(寬雄) 스님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음 날 국사께서 본사(本寺)를 찾아왔으니 이것이 바로 그 꿈의 감응(感應)인 것이다. 또 어느 날 꿈에 바닷가에 가서 손으로 직접 작은 고기를 잡아서 삼키고 꿈을 깨었는데, 해몽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어(魚)는 비늘(鱗)을 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린(麟)을 린(鱗)으로 고쳐 해린(海麟)을 해린(海鱗)으로 개명(改名)하고, 자(字)를 거룡(巨龍)이라 하였던 것이다.


나이 21세 때 왕륜사(王輪寺) 대선장(大選場)에 나아가서 담경(談經) 시험을 보았는데, 그의 말은 평범하나 그 뜻은 매우 심오하였다. 시험의 문제는 같았으나 국사의 답안은 다른 사람들보다 특이하였다. 저들 자신의 답안이 틀려서 자신의 소망에 어긋난 자들은 마치 소경이 촛불을 잡은 것과 같았으며, 혹은 시기하여 머트럽게 다투던 자들은 마치 함장(銜杖)한 것과 같이 입을 열지 못하였다. 마음에는 모든 반연을 쉬었으니 감히 파도가 물에 의지한 것을 탄식할 것이며, 진여법(眞如法)은 모든 움직임을 여의었으니 마땅히 탁약(槖籥)가풍(假風)을 비웃을 수 있겠는가. 토의하는 광장(廣場)에서는 주위로부터 집중적인 공세를 받았으나 마치 교범파제(憍梵婆提 : gavāṃpati) 등의 호부장자(豪富長者)들로 구성된 그룹의 첩벽(疊壁)이 무너지고 모두 논리에 강복(降伏)하고 부처님께로 귀화한 것과 같았으며 견고한 인욕의 갑옷이여! 니건자(尼乾子)를 비롯한 외도(外道) 육사(六師)들의 일(一)·이(異)·유(有)·무(無) 등의 교란적인 주장이 부처님 사자후(獅子吼)의 일성으로 말미암아 모두 사라진 것과 같았다.


국사께서 법상(法床)에 앉아 불자(拂子)를 잡고 좌우로 한번 휘두르니 가히 청중들이 많이 모여 앉은 걸상이 부러진 것과 같았다. 임금이 국사의 도덕을 찬양하고 대덕(大德)의 법계를 서증(署贈)하였다. 이 때 스님께서 이르기를, “내가 의룡(義龍)과 서성(瑞聖)인 후배에게는 부끄럽지만 인수(仁獸) 보다는 앞서기를 기대하므로 인자(麟字)를 인(鱗)으로 이름을 고치겠다.”고 하였다. 통화년중(統和年中)에 “강진홍도(講眞弘道)”란 법호를 받았으며, 28년에는 국사께서 법고사(法皐寺)로 돌아가는 길에 도강(都講)인 진조(眞肇) 스님을 만나 동행하다가 진조(眞肇) 스님이 역산(曆算)하는 법을 잘 안다는 말을 듣고 국사께서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는데, 누구나 이를 취하려 하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고, 도모하여 옮기면 밝아서 소경이 눈을 뜬 것과 같이 여용(餘勇)을 보통 무리들에게나 끼쳐주며, 다능(多能)을 비루(鄙陋)한 것을 연구함과 같았다. 통목화(統木禾) 말년은 우리 성고(聖考) 현종(顯宗)께서 보위에 오르신지 5년째 되던 해이다. 특히 현종 임금으로부터 존장(尊獎)하는 은총을 입어 대사(大師)의 법계를 받았다.


대중상부(大中祥符) 10년에는 ‘명료돈오(明了頓悟)’란 법호를 증사(贈賜)받았고, 천희(天禧) 5년 호경(鎬京) 중흥사(重興寺)에서 여름 결제(結制) 중에 강경법회가 있었는데, 국사께서 법을 설하시니, 그 법의 혜택이 화택 중생들에게 두루 미쳐 마치 새벽 기온처럼 청량(淸凉)하게 만들어 주었다. 자비의 등불을 혼구(昏衢)의 밤거리에 비추어 축건(竺乾)의 서래밀지(西來密旨)를 깨닫게 하였다. 국사가 매일 한 번씩 기자(箕子)고도(古都)를 일컬으면 대중은 세 번씩 창송하였다. 그 후 기숙(耆宿)인 선공(先公)의 사회사소(社會詞疏)가 문리(文理)가 맞지 아니함을 보고 고쳐 지어주면서 (결락) 도(道). 지만적(枝蔓的)인 부사(浮辭)는 잘라 버렸다. 스님은 아무렇게나 말을 하여도 곧 훌륭한 문장을 이루게 되었으니, 혜거(惠璩)의 문장력도 혼비백산하였고, 문장을 나누면 척척 음운에 부합하였으니 담빙(曇憑)의 음운학(音韻學)의 실력도 부끄러워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주연(遒姸)하고 민첩함을 누가 능히 그를 적대(的對)할 수 있겠는가! 태평년중(太平年中)에 중대사(重大師)의 법계를 진정(進呈)하고 아울러 ‘계정고묘응각(戒正高妙應覺)’이란 법호를 올리고는 수다사(水多寺)를 맡도록 하였다. 태평(太平) 10년에 이르러 현종이 칙명으로 해안사(海安寺)로 이주하도록 앙청(仰請)하였다. 그 후 덕종(悳宗)이 즉위하여서는 보다 더욱 존중히 모시는 한편 특별히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호를 수정(授呈)하고 아울러 마납(磨衲)으로 만든 법복 한 벌을 증사(贈賜)하였으며, ‘탐현도원(‘探玄道源)’이라는 법칭(法稱)을 첨가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않아 수좌(首座)의 법호를 올리고 겸하여 마납(磨衲) 복전의(福田衣) 한 상자를 하사하였다. (결락) 자심(滋深)하거늘 어찌 우물안 개구리가 바다의 깊음를 측량할 수 있겠는가. 치류(緇流)들이 환희심에 넘친 마름으로 경하(慶賀)하여 하연(廈燕)이 투서(投棲)함을 경멸히 여겼으니, 지광국사(智光國師)는 마치 각왕(覺王)의 출세가 아닌가 하여 의심할 정도였다. 다행히 인주(仁主)와 동시에 출세하여 그의 법음(法音)은 마치 바다를 덮을 정도로 해조음(海潮音)과 같으며, 현하(懸河)와 같은 변재는 그 도도하며 민첩함을 이루 다 형언할 수가 없다.


중희년중(重熙年中)에 ‘통제연오법동(‘通濟淵奧法棟)’이라는 법호를 가상(加上)하였다. 갑자기 어느 날 선조(宣詔)를 보내 궁내로 영입하여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연설토록 하였다. 국사는 궁중의 높은 섬돌밟고 예상(猊床)인 법상에 올라 앉아 법우(法雨)를 내려주어 진리를 표하고 정법(正法)을 나타내었다. 우거(牛車)에 따른 오지(奧旨)의 관기(關箕)를 활짝 열어 무명인 혹(惑)을 전제(剪除)하고 의문(疑問)의 구름을 휘산(揮散)하였다. 맹구우목(盲龜遇木)과 같이 만나기 어려운 묘법(妙法)을 들은 임금은 마음에 크게 감동하였으니, 어찌 귀중한 보배와 사사공양(四事供養)을 하사하는데 인색하였겠는가! 특별히 가는 실로 수를 놓은 당상복(幢相服) 두 벌을 하사하였다. 14년에는 발탁하여 승통(僧統)의 법계를 올렸다. 지금의 임금이신 문종이 즉위하여 하(夏)나라의 정통을 계승하여 국민에 임(臨)하였으며, 마치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은(殷)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을 견제(甄除)하고 인정(仁政)을 펴서 홍업(洪業)은 이미 의삭(懿鑠)에 이르렀으며, 약성(瀹誠)나마(那摩)에 간절하였다. 왕이 국사를 임궁(琳宮)으로 초빙하여 유심(唯心)에 대한 묘의(妙義)를 강설케 하고는 마납(磨衲) 비단으로 만든 승가리 (僧伽梨) 한 벌을 하사하였다.


궁중(宮中)구중(九重)에서부의(負扆)하고 있는 임금께서 친히 상보(象步)하는 용상대덕(龍象大德) 스님들을 영접한 백고좌(百高座)는 모두 용문(龍門)을 뛰어넘는 오도견성(悟道見性)한 도인들이었다. 담수(曇邃) 스님은 북좌(北座)에서 정통(精通)하였음을 부끄러워 했고, 승철대사(僧徹大師)는 편독(篇牘)과 시부(詩賦)에 뛰어나 낙필성장(落筆成章)하는 문호(文豪)이므로 많은 대덕(大德)들을 제치고 왕으로부터 총석(寵錫)받은 것을 사양할 정도였다. 그리고 중희년중(重熙年中)거듭 다시 ‘구행료성도수(具行了性導首)’라는 법호를 첨가(添加)받았다. 또 기원(祇園)의 적손(嫡孫)이니 이는 오직 불교가 중흥할 인유(因由)인 것이다. 척리(戚里)의 신동(神童)들이 예문(禮聞)을 거치지 아니하고 와서 수학하였다. 이로써 작고(作故)하신 수대사(守大師)의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중서령(中書令)을 추증(追贈)받은 장사공(章私公) 이씨(李氏)의 휘는 자연(子淵)이니, 드디어 다섯째 아들을 허락하여 그로 하여금 락발)하고 정성을 다하여 국사에게 구의(摳衣)하고 신족(神足)이 되어 복근(服勤)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국사가 직접 찾아가서 친견하고 찬앙(讚仰)하였으니, 그 분이 누구인가? 지금의 금산사(金山寺) 주지로 있는 삼중대사(三重大師)인 소현(韶顯)이 바로 그 스님이다. 국사는 부모를 하직하고 속가를 떠나 입산(入山)하였다. 음식을 항상 절제하여 묘재(卯齋)인 아침 공양만 먹었다. 초액(椒掖)후비(后妃)를 살펴 보건대 모두가 동기(同氣)이며, 악루(萼樓)의 형제들은 함께 외손(外孫)인 것이다.


이 사람은 도(道)의 극치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유교와 불교를 두루 통달하여 그와 대등한 자가 없었다. 덕행(德行)과 문장(文章)이 노당(魯堂)십철(十哲)을 크게 엄압(掩壓)하였고 자비와 지혜는 위사(魏寺)의 천승(千僧)보다 훨씬 초월하였다. 자질(資質)은 현반(玄班)을 크게 높혔고, 법력(法力)은 온 세상의 중생을 부호(扶護)할 만 하였다. 국사의 문하(門下)가 왕성하고 장려(壯麗)함이 스님보다 더 큰 스님은 없었다. 중희(重熙) 23년 남녀월(南呂月)성칙(聖勅)을 내려 현화사(玄化寺)로 이석(移錫)케 하므로 국사는 고사하였으나 하는 수 없이 마침내 허락하였다. 임금께서 유마(騮馬) 일필(一匹)을 이에 앞서 절에 희사(喜捨)하였다. 갑자기 한 비구가 와서 말을 희사한 데 대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는 잠시 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어 간 곳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는 문수(文殊)의 화현(化現)인 성승(聖僧)의 영험인 것이다. 현화사(玄化寺)에 입사(入寺)한 후 어느 날 후야분(後夜分) 혼허(魂栩)할 무렵, 한 스님과 같이 있었는데, 그 곁에 신인(神人)이 서서 말하기를, “너는 국사(國師)이고, 저는 왕사(王師)이다.”라고 하였다. 잠을 깨었으나, 그가 말한 소리는 아직도 귀에 역력하였다.


아름다운 징조이며 특별한 서록(瑞錄)이라 칭송되어 길음(吉音)환구(環區)인 온 세상에 가득 하였거든, 하물며 국사가 어찌 내종(內宗)에만 편국(偏局)하였겠는가! 또한 외전(外典)도 두루 겸통(兼通)하였다. 날 때부터 이미 여러 가지 묘법(妙法)을 알았을 뿐 아니라, 숙령(夙齡)의 어린 나이에 주발(朱勃)과 같은 천재를 업신여길 정도의 재동(才童)이었다. 아주 많은 서적을 독파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혜초(惠超) 스님을 능가하였다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학사(學士) 뿐만 아니라, 사봉(詞峯)은 태양을 의지하며 필총(筆塚)은 하늘을 받들었다. 경구(警句)를 독실하게 공부하여 거유(鉅儒)로써의 과문(寡聞)한 이에게 영향을 입혔다. 화탕(和湯)개사(開士)벽운시(碧雲詩)의 아작(雅作)을 읊었으니, 이것이 어찌 괴기(瓌奇)한 명문(名文)이 아니겠는가! 이에 비하면 이적선(李謫仙)백설시(白雪詩)의 청음(淸吟)도 진실로 쇄미한 졸작이라 할 것이다. 치소(緇素)의 무리들과 비교하더라도 또한 동년(同年) 선상(線上)에 두고 말할 수 없다. 혹은 유교와 불교를 기빙(期憑), 즉 비교해 보건대, 범복(梵福)이 더욱 수승하였다.


신도(宸圖)께서 정재(淨財)를 기울여 현화사(玄化寺)의 보수공사에 필요한 공사비를 국가에서 부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개필(愷筆)을 불러 수용(睟容)의 탱화를 그리고 한편으로는 부종(鳧鍾)을 주조하며, 일체법구(一切法具)를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보수한 보찰(寶刹)이 그 장려함이 마치 도사다(覩史多)의 천궁(天宮)을 옮겨 놓은 것과 같았다. 금언(金言)인 경전을 판각(板刻)하여 명(名)·구(句)·문(文)인 구나(拘那)의 용궁해장(龍宮海藏)을 담았으니 이것이 이른 바 시단(始檀)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일으켜 마침내 원만하게 성취하고, 임금이 지광국사(智光國師)를 스승으로 모시고 사자(師資)의 큰 인연을 맺었다. 이와 같이 모든 악(惡)은 짓지 아니하는 한편 여러 가지의 선(善)한 일을 봉행(奉行)한 일들을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청녕(淸寧) 2년 1월 일에 임금께서 이르기를, “대붕새도 늙어지면 법(法)이 아니면 그 미혹(迷惑)함을 구제할 수 없고 성스러운 병아리라도 스승이 아니면 법익(法益)을 청(請)할 수 없다.”고 하였다. 진실로 능히 법(法)을 깨달은 이라야 가히 스승이 될 수 있다.


특별히 국서(國書)를 보내 초청하였다. 드디어 공부시랑(工部侍郞) 장중영(張仲英), 상서(尙書) 좌승(左丞) 유신(柳紳)과 예부시랑(禮部侍郞) 김량지(金良贄) 등을 보내되, 세 번이나 되풀이하는 삼반(三反)의 예(禮)를 갖추고는, 이어 다시 중추원사(中樞院事) 이유충(異惟忠)을 보내어 왕이 수결(手結)하고 압인(押印)한 편지와 함께 금계법복(錦罽法服)과 은(銀), 황유(黃鍮)로 만든 기물(器物)향천(香荈) 등을 보냈다. 국사는 굳게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왕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 4일 대가(大駕)가 내제석원(內帝釋院)으로 행행(行幸)하여 예배(禮拜)를 갖추어 왕사(王師)로 추대하였다. 그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가(御駕)에 동재(同載)하고 다녔으니, 마치 강승회(康僧會) 스님이 오왕(吳王) 손권(孫權)의 어가(御駕)에 동승하고 다녔던 것은 모두 스님의 하풍(下風)에 있었기 때문이다. 청녕(淸寧) 3년에 이르러 ‘융소(融炤)’라는 법칭(法稱)을 진정(進呈)하였다. 4년 5월 초하루에 임금께서 스님을 국사(國師)로 책봉코자 하여 친서를 보내 삼청(三請)하였다. 그리하여 그 달 19일 왕이 금가(金駕)를 준비해 봉은사(奉恩寺)로 행행(幸行)하여 우리 해린(海鱗) 스님을 국사로 봉하고, 영통사(靈通寺)의 주승(主僧)인 난원(爛圓) 스님을 왕사)로 책봉하였다. 연진(涓辰)을 택하여 아울러 위대한 칭호(稱號)인 법칭(法稱)을 봉정(奉呈)하였으니, 양상(兩相)이 부합되었다. 같은 날에 두 스님이 함께 지총(摯寵)을 받았으므로 이미(二美)가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그 까닭을 살펴보니 미증유(未曾有)의 희유(希有)한 일이라고 찬탄하고도 남음이 있다. 전일의 꿈에 신인(神人)이 “너는 국사(國師)이고 저는 왕사(王師)이다.”라고 한 예언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때 꿈에 동유(同遊)하던 스님은 영통사(靈通寺)의 주지인 난원(爛圓)이 바로 그 스님이다. 5년 양월(陽月) 8일 국사께서 왕궁 내전(內殿)에 나아가서 백고좌회(百高座會)제일설법주(第一說法主)가 되었다. 겨우 반게송(半偈頌)을 설하자마자 청법대중이 사방(四方)으로부터 거듭거듭 모여들어 큰 성왕(盛旺)의 상서를 나타냈다. 왕이 다시 ‘낭철(朗徹)’이라는 법칭(法稱)을 진정(進呈)하였다. 함옹(咸雍) 3년 2월 일에 국사께서 법천사(法泉寺)에 돌아가 안주(安住)코자 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모치(暮齒)의 탄식을 일으키며, 누차 임금께 사퇴(辭退)할 것을 고진(告陳)하여 세번이나 거듭 수두(需頭)의 주청(奏請)을 올려 간절한 사의(辭意)가 확고함을 알렸다. 문종은 하는 수없이 윤허(允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9월 22일 왕이 현화사(玄化寺)에 행행(幸行)하여 합원승재(闔院僧齋)를 베풀고 겸하여 국사를 석별하는 인전연(寅餞筵)도 마쳤다. 임금은 양반의 관솔(官率)을 거느리고 국사에게 하직 인사를 한 다음, 좌승선(左承宣)이며 중서사인(中書舍人)인 정유산(鄭惟産)을 파견하여 수결(手結)을 찍은 조서(調書)와 차(茶), 약(藥), 보화(珤貨) 등을 정상(呈上)하였는데, 그 이름과 수가 너무 많아 산제(刪除)하고 싣지 않는다. 국사는 이 달 27일 출발하여 본산(本山)인 법천사(法泉寺)로 떠났다.


임금이 태자(太子)에게 명하여 제왕백료(諸王百僚)를 거느리고 남교(南郊)까지 가서 전별(錢別)케하고 특별히 도속(道俗)의 관원(官員)을 보내어 본사(本寺)까지 호송(護送)토록 하였다. 국사께서 본산(本山)인 법천사(法泉寺)에 돌아간 후, 3년 만인 중하지월(仲夏之月)성상(聖上)이 연덕궁(延德宮)의 제6왕자로서 체발(剃髮)하고 스님이 되어 현화사(玄化寺)에 있게 하였다. 이전에는 봉천원(奉天院)에 주석하다가 특히 수좌(首座)의 법계를 증수(贈授)받았으니, 이는 국사의 주변에 있으면서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이 해 10월 23일 편안히 우협(右脇)으로 누워 취침하였다. 이날 밤에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국사께서 잠을 깨어 가부좌(跏趺坐)를 맺고 앉아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결락) 바깥 날씨가 어떤가?”하니 대답하기를, “이슬비가 내리고 있읍니다.”라는 대답을 듣고서 곧 입적하였다. 옛적 추자(鶖子)가 입적(入寂)함에 당하여 무색계(無色界)의 제천(諸天)이 흘린 바 눈물이 마치 봄에 내리는 이슬비와 같았으니, 지금 국사께서 시화(示化)하던 오늘밤에 내린 비인들 어찌 제천(諸天)이 흘린 눈물이 아니겠는가.


오호 애재(哀哉)라! 세수는 87세요, 승랍은 72세였다. 입적(入寂)하던 전날 밤에 등불 만한 크기의 두개의 별이 나타났고, 또 두 줄기의 큰 무지개가 섰는데, 마치 두마리의 적룡(赤龍)이 나란히 누워 있는 것과 같았다. 이것은 (결락) 국사께서 입적(入滅)하실 조짐을 보인 것이다. 문인(門人) 수좌(首座)인 법령(法靈)과 삼중대사(三重大師)인 소현(韶顯) 등이 가슴을 치며 발을 구르면서 부음(訃音)을 동폐(彤陛)에 주문(奏聞)하였다. 부음을 들은 문종(文宗)은 크게 진도(震悼)하시고 곧 좌가승록(左街僧錄)인 숭연(崇演)과 보장정(保章正)전삼린(全參藺) 등을 파견하여 장사(葬事)를 감호하도록 하였으며, 이어 전개(專介)인 특사를 보내서 빈당(殯堂)에 가서 조문토록 하되 정중한 탁제(卓祭)를 치르도록 하는 한편, ‘지광(智光)’이라는 시호를 증정(贈呈)하고 아울러 다향(茶香)과 유촉(油燭)을 하사하였으며, 또 원주(原州) 창고에 있는 양곡으로써 발천위락(拔薦爲樂)의 법요식(法要式)에 필요한 경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1월 9일 법천사(法泉寺)의 명봉산(鳴鳳山) 동쪽 승지(勝地)를 선택하여 다비(茶毗)의 예를 거행하였다. 이 때 인간과 영기(靈祇)가 비통하며 슬퍼하고, 천지(天地)가 캄캄하며 새·짐승들은 슬피 울고, 봉만(峰巒)은 처참하게 나열(羅列)되었으니,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등이 모두 국사의 도덕이 끝남에 대하여 슬퍼한 것인저!


임금께서 아름다운 궤범(軌範)을 추모하여 감히 제액(題額)을 표(標)하지는 못하지만, 황견유부(黃絹幼婦)인 절묘호사(絶妙好辭)의 명문(名文)을 새겨 정민(貞珉)을 세워 국사의 위적(偉跡)이 영원히 썩지 않게 함이다. 적자(赤髭)와 같은 위대한 행적을 빛나게 할 뿐 아니라 역대(歷代)에 유전되어 영원히 남아 있게 하고자 하여, 이에 추유(鯫儒)에게 명하시어 국사의 홍대(鴻大)하고 탁렬(卓烈)한 위업을 밝히라고 하셨다. 그러나 신(臣)의 식견(識見)은 우잠(牛涔)으로 토해(兎海)의 물을 측량하는 것과 같아서 불가능한 일이라고 사양하였지만 어찌 할 수 없었다. 그릇 윤선(綸宣)을 받드는 것은 도저히 더 이상 사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사의 가풍(家風)에 따라 그의 도덕을 기록하였다. 비록 견고하나 돌과 같이 궁구는 마음은 아니며 학문은 부수(膚受)이고 재조(才操)는 졸재(拙才)이다. 스스로 수중에는 한푼의 돈도 없음을 부끄러워 하면서도 문득 광비(狂斐)의 명문(名文)을 지으려고 다만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다. 삼가 이상의 탁적(卓跡)을 명(銘)으로 칭송(稱頌)하노라.

무상심심(無上甚深) 미묘법(微妙法)은 석가(釋迦)가 시조(始祖)!
사십구년(四十九年) 고구정녕(苦口叮寧) 설(說)하신 내용
서건(西乾)에서 시작하여 천년후에야
가엽축법(迦葉竺法) 두스님이 동전(東傳)하였네!
일체법장(一切法藏) 진속(眞俗)으로 갈라졌으니
근기(根機)따라 설법하신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미(迷)한 중생(衆生) 제도코자 정법(正法)을 보여
실상법(實相法)을 기본(基本)하고 권법(權法) 설했네! (其一)
무상대교(無上大敎) 그 진리를 널리 펴시니
십이부류(十二部類) 중생들이 서열(胥悅)하도다.
자성천(自性天)의 혜일광명(慧日光明) 두루 비추니
언덕마다 골짝마다 밝아졌었네!
자비하신 구름으로 윤택케 하되
쑥과 난초(蘭草) 차별 없이 적셔주었다
불타(佛陀)께서 열반하신 시대가 멀어
남겨주신 그 유풍(遺風)이 멸절(滅絶)해 가네! (其二)
이심전심(以心傳心) 그 혜명(慧命)을 누가 이을까?
지광(智光)국사 스님 만이 감당할걸세.
여러 생(生)에 혁기(赫氣)모아 태어났으니
단적(端的)으로 밝은 시대 만났도다.
양친부모(兩親父母) 하직하고 애정(愛情)을 끊어
속가(俗家) 옷인 소의(素衣) 벗고 치의(緇衣)를 입다.
고상함은 석림중(釋林中)에 악봉(萼鳳)이시고
신령(神靈)함은 상서로운 시귀(蓍龜)와 같네! (其三)
지극하신 정성으로 발심(發心)하였고
입으로는 발원(發願)하고 반야(般若)를 닦았다.
안으로는 팔만장경(八萬藏經) 연구하면서
밖으로는 유교(儒敎)사상 공부하였다.
품계(品階)로는 삼현(三賢)아닌 십지(十地)이시고
거룩하신 그 칭송(稱頌)은 천하에 떨쳐
복(福)과 지혜(智慧) 함께 구족(具足) 양족(兩足)하시어
일체세간(一切世間) 살펴봐도 견줄 자 없네! (其四)
계현논사(戒賢論師) 화현(化賢)으로 다시 오신 듯
무착보살(無着菩薩) 도생위(度生爲)해 거듭 나투다.
반야덕(般若德)의 병(甁) 속에는 진리 가득히
거울같이 밝은 마음 더욱 밝도다.
모든 상문(桑門) 수행자(修行者)엔 표본이 되고
예달(蘂闥)까지 그 이름이 가득하였다.
요황(瑤皇)께서 초빙하여 법문(法門) 들었고
보세(寶世)에는 수도대중(修道大衆) 번영하였다. (其五)
스님께선 덕이 높아 국사(國師)되셨고
모든 일은 평범하게 처리하였다.
자나깨나 국민 위한 일념(一念) 뿐이며
영원토록 큰 원력(願力)을 굳게 가지다.
세상만사 모든 것은 점위(阽危)한 것 뿐.
환봉(圜封)속에 갇히어서 이미 늙었네!
여산(廬山)같은 본산(本山)으로 되돌아가서
정진(精進)하고 기도하여 고년(高年)을 바라네. (其六)
몸은 비록 건강하여 새지 않지만
이 생명은 멀지않아 끝날 것일새
아름다운 제호(醍醐) 맛도 맛을 잃었고
향기롭던 담복향(薝蔔香)도 향기가 없네!
대소관원(大小官員) 전재(筌宰)들은 여탄(茹歎)하였고
오장육부(五臟六腑) 오려내듯 슬퍼하였다.
여이(黎夷)들도 너나 없이 애통함이여!
부모잃은 아이처럼 통곡하도다. (其七)
슬퍼하는 제자들은 봉둔(蜂屯)과 같고
그 유언에 감동함은 적자(赤子)와 같네!
북수(北首)하고 입적(入寂)하니 세우(細雨) 내리고
남(南)을 향해 비를 세워 표본(標本)을 삼아
바닷물을 막으려는 짧은 지혜(智慧)로
새사람이 나타난들 고인(故人) 당할까?
맑은 덕과 그 웅명(雄名)은 위업(偉業) 보인 것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영원하소서. (其八)
비서성(秘書省) 배융교위(陪戎校尉) 신(臣) 이영보(李英輔)대장(大匠)장자춘(張子春) 등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새기다.


【裏面】
고(故) 법천사주(法泉寺主) 지광국사(智光圀師)의 비명음기(碑銘陰記)는 좌(左)와 같다.
현화사주(玄化寺主)이며 승통(僧統)인 소현(韶顯)과 속리사주(俗離寺主)이며 왕자로써 승통(僧統)인 석탱(釋竀)이고, 수좌(首座)는 경현(慶玄)이며, 삼중대사(三重大師)는 석▨(釋▨)이고, 중대사(重大師)는 관운(灌雲)·홍체(弘諦)·점영(占穎)·융보(融保)·숭간(嵩幹)·계상(繼相)·승개(僧鎧)·진소(眞召)·상현(尙賢)·승각(承覺)·동수(同壽)·우상(祐翔)·쌍소(雙炤)·수영(秀穎)·석칭(釋稱)·정신(定神)·각명(覺明)·관승(冠僧)·원약·우현(右賢)·정여·석상(釋翔)·각지(覺支)·상지(尙之)·석운(釋雲)·방란(邦蘭)·보현(甫賢)·석림(釋琳)·증상(證祥)·석인(釋因)·품종(稟宗)·우승(祐承)·진령(眞領)·진감(眞鑑)·세량(世粱) 등 103명이요, 대사(大師)인 현개(賢盖)·충약 등 17명이며, 대덕(大德)인 정지(定支)·진보(眞保) 등 22명은 가르침을 받아 계승한 자들이다.


 ▨▨▨ 승록(僧錄)인 선량(先亮)과 중대사(重大師)는 현점(玄占)·혜종(慧宗)·양제(梁濟)·광석(廣碩)·경충(慶忠)·염충(念忠)·심월(心月)·응서(應諝)·민성(敏成)·경조(慶調)·원숭(元崇)·원석(元釋) 등 28명이며, 대사(大師)는 의운(義雲)·석승(釋升)·위호(爲顥) 등 23명이고, 대덕(大悳)인 숭기(崇器)·섬월(暹月)·홍학(弘學)·균선(均善) 등 25명은 직책(職責)에 따라 법계(法階)를 첨가(添加) 받은 자이며, 중직(重職)·혜등(惠燈)·홍범(弘範) 등 1,100여 명은 국사의 도덕을 흠모하여 귀화(歸化)한 자들이요, 수좌(首座)는 석규(釋虬)와 법령(法靈)이며, 삼중대사(三重大師)는 점선(占先)·위현(爲現)·성광(宋光)이요, 중대사(重大師)는 승소(昇炤)·성현(成現)·계언(繼言)·안예(安銳)·도생(道生)·강운(講雲)·이진(利眞)이며, 대사(大師)는 섬현(暹現)·주현(周現)·신창(神暢)·관성(貫成)이고, 대덕(大德) 주란(周蘭)·수기(秀㞯)·단직(單職)·진각 등 52명은 국사를 전후하여 입적(入寂)한 자들이다. 우건(右件) 문도(門徒)의 개좌(開座)와 직명(職名)을 새겨서 후세에 전하도록 한다.


승봉랑(承奉郞) 상서도관랑중(尙書都官郞中)이며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안민후(安民厚)는 글씨를 쓰고 대안원년(大安元年) 세재(歲在) 을축년(乙丑年) 중추월(中秋月)일(日)에 세웠으며, 신(臣) 이영보(李英輔)와 신(臣) 장자춘(張子春) 등은 글자를 새기다.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2】(1995)〕

 

 


이수 


 

 

 

 

 


귀부

 

 


귀부 후면

 


귀부 측면

 

 

 

 


지광국사현모탑.

경복궁에서 찍은 사진으로 현재는 전면 해체 보수에 들어 갔다



"기단은 하층 기단 하대석이 3단으로, 제1단은 4매로 층단과 같은 낮은 면에 하대, 우주와 탱주, 갑석을 모각한 후 각 면에 귀꽃이 솟은 안상을 조각하였으며 위로 낮은 1단의 괴임이 있어 상층이 올려져 있다. 네 모서리에는 용의 발톱 같은 것으로 덮여 지대석까지 이어지며 탑을 지면에 안착시키는 듯하다. 제2단도 4매로, 측면 중앙에 귀꽃이 솟은 연판을 2중으로 장식하였으며 윗면에는 각, 호의 윤곽을 둘러 윗단을 받고 있다. 제3단은 하층 기단 중대 면석이 함께 조출된 4매의 석재로 구성되었는데 우주와 탱주가 모각된 3단의 면석, 각, 호, 각의 괴임대, 역시 우주와 탱주가 각출된 하층 기단 중석이 차례로 표현되었다. 3단 면석에는 국화문이, 하층 기단 면석에는 구름과 화염 속의 보주가 조각되었다. 하층기단 갑석은 1석으로 측면에 장막을 표현하는 2단의 횡선문과 연주문이 있으며 상면에는 3중의 연화가 둘러져 있으며 4귀퉁이에는 사자가 안치되었던 2개의 원공이 있다. 하면에는 낮은 부연을 두고 상층 탑신을 받치는 곳에는 호형의 윤곽이 둘러져 있다.


상층기단 면석은 1석으로, 탑신석과 같이 높으며 각 면에는 2개의 장방형의 액자와 같은 공간을 만들어 남쪽 사리봉송장면, 북쪽 산수문, 동서쪽에 운룡문과 신선문을 새겼다. 갑석은 상단 네 귀퉁이가 살짝 올려져 반전하고 있으며 측면에는 2단의 장막과 연화를 장식하였는데 상단 장막은 횡선과 연주문으로, 하단은 걷어 올려 끈으로 묶어 늘어진 모습이다. 갑석 위로는 1매의 괴임석을 두어 탑신석을 받치고 있다.


탑신은 1석으로 밑에는 탑신 받침이 모각되었는데, 측면은 작게 구획하여 귀꽃이 있는 작은 안상을 돌리고 위로는 3중의 연꽃을 새겼다. 면석에는 3개의 대나무로 표시된 우주를 새기고 남·북면은 문비를, 동·서면은 2구씩의 창을 모각하였는데, 문과 창은 모두 첨형 아치 형태이며 위로 영락이 늘어져 있다.

옥개석도 1석으로 전체 모습은 우동마루가 표현된 일반 석탑의 옥개석 형태이나 천개 모습의 처마에는 네 모서리의 가릉빈가를 비롯하여 보주, 불상, 비천 등이 가득 장식되었으며 밑으로 영락이 늘어진 휘장이 장식되어 있다. 상단에는 낮은 괴임을 두어 상륜을 받치고 있다.상륜은 낮은 받침, 팔메트형 앙화, 복발, 보륜, 옥개석과 유사한 천개 형태의 8각형 보개, 2중의 연화 받침대에 올린 보주 등 완전한 모습을 지키고 있다. 상륜부의 잘 보이지 않는 보개 하단에도 연화를 새기는 등 각 부재에 빠짐없이 문양을 장식하였다."...디지털문화대전




전?

 


부도 전각?

 


 우물터



유법천사기遊法泉寺記...허균(1569~1618)

 

원주의 남쪽 50리쯤 되는 곳에 산이 있는데 비봉산飛鳳山이 있다. 그리고 그 산자락에는 신라의 고찰인 법천사가 있다. 예전에 들으니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 선생이 이 절 아래에 살았다고 하고, 길창군吉昌君 권람權擥,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 진일재 성간成侃 등이 모두 이 절에 가서 그에게서 학업을 익혔다고 한다. 이떤 이는 문장으로 세상을 울렸고 어떤 이는 공업을 세워 나라를 안정시켰다. 절 이름이 이로 말미암아 드러났으니, 지금도 사람들은 그곳을 이야기한다.


 내 돌아가신 어머님을 그곳에서 북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장사지냈다. 이 때문에 매해 한 번씩 성묘를 가지만 법천사라는 곳을 아직 가지는 못하였다. 금년 가을 휴가를 얻어 이곳을 찾았는데 조금 틈이 있었다. 마침 지관智觀이란 스님이 묘소에 있는 절로 나를 찾아 왔다. 그는 기축년(1589) 법천사에 한 겨울 주지로 있었다고 말하였다. 노닐고 싶은 흥취가 드디어 솟구쳤다. 이에 스님을 끌고 이부자리서 밥을 먹고 일찌감치 출발하였다.


험준한 골짜기를 따라 고개를 넘어 이른바 명봉산鳴鳳山에 이르렀다. 산은 그다지 높지 않다. 네개의 봉우리가 서로 마주 선 모습이 새의 날개와 같다. 두 갈래 시내가 동과 서에서 흘러나와 동구에서 합쳐 하나가 되는데, 절은 바로 그 한가운데 자리하여 남쪽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난리에 불타서 무너진 주춧돌만이 토끼가 놀고 사슴이 뛰노는 길 사이에 흩어져 있다. 


비석 하나가 절반이 동강난 채 풀더미에 묻혀 있었다. 살펴보니 고려의 승려 지광智光의 탑비塔碑였다. 그 심오한 문장과 굳센 필치가 누구의 솜시인지 다 알 수는 없지만 실로 오래되고 기이한 물건이다. 나는 한참을 어루만지며 탁본을 할 수 없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스님은 말하였다.


"이 절은 대단히 커서 당시 이 절에 사는 이가 수천이었지만, 지금은 제가 살던 선당곳조차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서로 한참을 탄식하였다. 절 동편에 석상과 작은 비석이 있었다. 살펴보니 묘가 셋인데, 모두 표석表石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본조本朝의 정승 이원李原 모친의 분묘요, 다른 하나는 태재 유방선의 묘인데, 승지를 지낸 그의 아들 유윤겸柳允謙이 뒤에 묻혀 있다.


내가 말하였다.


"이원의 부인은 곧 나의 선조이신 야당埜堂(허금許錦)의 딸이시지요. 내가 들으니 정승께서 처음 그 모친을 장사지낼 때 풍수장이가 그 땅이 왕이 나올 기운이 있어 끝내 이 때문에 죄를 입을 것이라 하였지만, 자손들이 감히 좇지 않았다고 하오. 태재는 곧 사위인데 그가 이곳에 산 것도 이 때문이었고 마침내 곤궁하게 살다가 죽었지요. 점쾌에 한 것이라 하겠지만 연대가 오래되어 알 수는 없지요."


인하여 배회하며 하늘과 땅을 바라보았다. 옛 일을 주문하는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스님에게 말하였다.


"사람이 곤궁하고 영달하며 성대하고 쇠미하는 것은 진실로 운명이지요. 그리나 이름이 썩지 않는 것은 여기에 달려 있지 않답니다. 이원은 좌명훈신佐命勳臣으로 지위가 재상에 이루러 부귀와 총애가 일시에 떠들석했지요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며 좇았지만, 끝내 이 때문에 시기를 받아 폐치되어  죽었지요.


그러나 유윤겸은 장헌대왕莊憲大王을 섬겨 유악 帷幄의 신하가 되어 궁궐에 출입하였지요. 성은을 깊이 입어 결국 승지가 되어 왕명을 출납하였으니 귀하게 되었다 하겠지요. 이에 비하여 태재는 학문과 덕행을 지니고도 집안의 환란으로 인하여 그 자신도 금고가 되었다오. 한참 곤궁할 때에는 베옷이 몸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였고, 날마다 끼니를 걸렀으며, 도톨밤을 주워 먹으면서 산중에서 곤궁하게 지내다가 여생을 마쳤지요. 지금 그의 시를 보면 중국의 맹교孟郊나 가도賈島와 같으니, 얼마나 곤궁함이 심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저 이원, 유윤겸 두 사람의 영욕과 비교해 본다면 어떠한가요? 그러나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 사람들은 그의 글을 외우며 그 인품을 상상해 마지않습니다. 심지어는 나지막한 산과 시골의 절간 일 뿐 기이하고 화려한 볼거리도 있는것도 아니건만, 또한 세상에 소문이 나고『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전하게까지 되었지요. 저 두 사람의 화려하고 드날리던 모습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비단 그 육신이 땅에 파묻혔을 뿐 아니라, 그 이름을 말해도 사람들은 어느 시대 사람인지조차 알지 못한다오. 그렇다면 일시에 이득을 누리는 것이 만대에 이름을 전하는 것과 어찌 같겠소?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선택하게 한다면 이쪽이겠소, 저쪽이겠소?" 


스님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공의 말씀이 옳습니다. 다만 천년 만년 이름을 날리는 것은 죽은 다음의 적막한 일이요, 고인古人은 이름도 누로 여겨 남들에게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으니, 이것이 유독 무슨 마음에서였겠습니까?"


 내가 껄걸 웃으며 말하였다.


"이는 자네들의 불법일세."


곧 말고삐를 잡고 돌아왔다. 기유년(1609) 9월 28일 적는다.



출처...누워서 노니는 산수

(조선시대 산수유기 걸작선)[태학사/이종묵 편역] 104쪽


***허균이 법천사에 들렸을때도 이미 폐사가 되었다.


 


법천사지 수습 유물 

 

 광배


 


석불좌상.부도 탑신?

 

배례석 

답도석踏道石? 

 

 

 


당간지주

기둥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으며,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고 있다.

기둥사이에는 당간을 꽂아두기 위한 받침돌을 둥글게 다듬어 마련해 놓았다.

두 기둥의 윗부분은 모서리를 깍아 둥글게 다듬어 놓았고,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간공이 있다.

 

 

 

 

 


치열한 열정들이다.

불치의 병이 깊어진.... 


201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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