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원주시

원주...거돈사지

임병기(선과) 2016. 10. 1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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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리에서 황학산 오른편 산길로 잠자울 고개를 너고 학고개를 너머서면 작은 골짜기너머로 정산면 담안리가 있는데 그 윗터에 한계산 기슭을 안고 펼쳐진 절터이다. 이 절터 남쪽사면으로 흐르는 한줄기가 남한강으로 이어진다. 발굴조사 결과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처음 지어져 고려 초기에 확장·보수되어 조선 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밝혀졌다. 절터에는 중문터, 탑, 금당터, 강당터, 승방터, 회랑 등이 확인되었다.


거돈사는 고려 초기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의 주요 사찰이었으나 고려 중기 천태종이 유행하면서 천태종 사찰로 흡수된 거돈사는 신라말 고려초의 절터로서 보기 드문 일탑식 가람으로 주목할 만한 곳이다."...디지털원주문화대전



현재는 금당 앞 삼층석탑과, 금당터 위에  불대좌, 원공국사 부도비, 다양한 형태의 석조부재와 폐교된 정산초교에 미완성의 당간지주 한짝이 남아 있다.

  

원공국사 부도비

고려 원공국사(, 930∼1018) 부도비로 현종 16년(1025)에 조성되었다.

비문은 최충()이 지었으며, 김거웅()이 전액을 쓰고 비문은 해서로 썼으며, 승려 정원()·계상()·혜명()·득래()·혜보() 등  여러 사람이 새겼다고 전한다.


본래 위치는 아니라고 한다.


  

달넘새님의

뛰어나고 쉬운 해설이 이어지고,,,



비신은 가늘어 날씬한 편인데, 귀부와 이수는 꽤 큰 편이어서 다소 무거운 느낌을 주지만 조각기법은 매우 생동감이 있다. 거북등은 겹테의 정육각형문 안에 불()자와 만()자, 연꽃무늬를 교대로 새긴 점이 독특하다. 용머리 형태의 거북머리는 옴츠린 목에 입을 꽉 다문 것이 귀여운 괴수형이다. 등 위로 비좌의 사면에는 안상을 새겨 돌리고 비신을 안치한 다음 이수를 얹었다. 이수에는 구름 속에서 노니는 용이 꿈틀거리는 듯 사실적이다...네이버


 

 

발찌


 

  

 


비좌 측면 안상속에 귀꽃이 피어있다.



이수의 커튼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

(출처...장달수의 한국학카페 http://cafe.daum.net/_c21_/home?grpid=1WDnJ)

 

강원도 원주시 거론면 정산리 거돈사 터에 있는 고려 전기의 선승 원공국사 지종(圓空國師 智宗 : 930, 태조 ~1018, 현종 9년)의 비. 고려의 명망 있는 문신 최충(崔沖)이 짓고 김거웅(金巨雄)이 써서 정원(貞元), 계상(契想), 혜명(惠明), 혜보(惠保), 득래(得來) 등이 새겨 1025년(현종 16)에 세웠다. 비는 현재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귀부와 이수를 갖춘 거대하고 당당한 비로서 보물 제 78호로 지정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원공국사가 태어나 사나사에 있던 인도 홍범에게 출가하여 수학하고 광종 때 실시한 승과에 급제하였으며 955년에 오월(吳越)에 가서 영명연수(永明延壽)에게서 법을 전해 받고 국청사에서 정광(淨光)을 만나고 법화를 강론하는 등 활동하다 962년에 고려에 돌아와 광종과 경종·성종·목종·현종 대대로 우대를 받았으며 1013년(현종 4)에 왕사에 책봉되어 거돈사에서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증시원공국사승묘탑비명(贈諡圓空國師勝妙之塔碑銘)(題額)

 

고려국(高麗國) 원주(原州) 현계산(賢溪山) 거돈사(居頓寺) 고왕사(故王師) 혜목광천편조지각(慧月光天 遍照至覺) 지만원묵(智滿圓黙) 적연보화(寂然普化) 대선사(大禪師) 증시진공국사(贈諡圓空國師) 승묘탑(勝妙塔) 비명(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중추원직학사(中樞院直學士) 선양랑(宣議郞) 상서(尙書) 사부(吏部)랑중(郎中) 지제고(知制誥) 겸사관(兼史舘) 수찬관(修撰官)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최충(崔冲)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짓고,

조청랑(朝請郞) 예빈승(禮賓丞) 비어대(緋魚袋)를 받은 신(臣) 김거웅(金巨雄)은 왕명(王命)에 의해 비문(碑文)과 전액(篆額)을 쓰다.

 

공손히 듣건대 불도(佛道)는 깊고 깊으나 일심(一心)을 깨달으면 바로 그것이 불도(佛道)요, 선(禪)의 근원은 담적하나 제법(諸法)과 더불어 초연하다. 그 경지를 터득한 자는 권(權)과 실(實)을 모두 잊고, 그 세계를 관찰하는 이는 색(色)과 공(空)을 함께 없앤다. 그러나 중생들이 망견(妄見)에 국집하여 천만 가지의 차별심을 일으키므로 계위(階位)를 가져 점수(漸修)하지 않고는 그 몽매함을 벗어 나지 못하며, 방편(方便)을 빌리지 않고는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영양(靈羊)을 쫓을 때 뿔을 나무가지에 걸고 있으면 그것을 찾아내기 어려운 것이 마치사자(獅子)가 기지개를 켤 때 반드시 방편(方便)을 요(要)하는 것과 같다. 무(無)라고 한 이치와 유(有)라고 하는 진리를 듣지 않고서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가엽(迦葉)은 억측으로 서건(西乾)을 대하였고, 달마는 선맥(禪脈)을 동진(東震)에 전하였다. 부처님은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법의(法衣)를 분부하시고 자리를 나누어 앉았다. 혹자는 관중(觀衆)들에게 신(信)을 보이되 곡척(曲尺)과 가위 등으로써 나타냈으며, 혹은 모든 사람을 지도하기 위해 굳이 명상(名相)을 들어 보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대대로 스승과 스승이 비밀리 전수하여 사자(師資) 간에 그 뜻이 부합하였고, 역대(歷代) 조사가 서로 계승하여 법인(法印)을 이어 받아 그 법통이 단절되지 아니하였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때가 더욱 멀어지고 광영(光靈)이 점점 쇠잔해져 먼저 깨달은 선배는 후배들이 바라는 여망에 부응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뒤를 따라 오는 후배들은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흔히 언덕을 파서 물을 구하되,아우달지(阿耨達池)인 근원을 전혀 알지 못하고 늪과 수렁으로 빠져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였다.

 

스스로 공문(空門)의 바른 수행자와 말세(末世)의 특출한 사람이 아니면, 장차 어떻게 뜻을 부처님의 유언(遺言)에 두어 능히 그 묘리(妙理)를 터득할 수 있겠는가. 중생들의 근기에 응하여 적절히 변화하는 방편(方便)이 한결같지 아니하다. 해이해진 대음(大音)의 음조(音調)를 잘 조절하며, 퇴폐한 큰 교망(敎網)을 제대로 정돈할 수 있는 자가 그 누구이겠는가! 오직 우리 스님만이 능히 할 수 있다고 하겠다. 스님의 휘(諱)는 지종(智宗)이고, 자(字)는 신측(神則)이며, 속성(俗姓)은 이씨(李氏)로 전주(全州) 출신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행순(行順)이니, 항상 의리를 품고 어진 마음을 가지며 겸손하고 욕심이 없었으니 마치 개제(愷悌)한 군자(君子)가 항상 복을 구하되 자신에게 돌리지 아니하며, 마음이 영화(榮華)에 유혹되지 않는 구루장인(痀僂丈人)이 스스로 정신을 응집(凝集)하여 도덕이 높았으니 그 사람과 같았다. 어머니는 김씨(金氏)니 그 칭송 받음이 양홍(梁鴻)의 처(妻)와 같고, 그 명망은 노래자(老萊子)의 부인과 같았다.

 

부부간의 금실은 그 아름다움이 봉점(鳳占)에 나타났고, 자손의 번연(蕃衍)함은 그 경사스러움이 초영(椒詠)을 표하였다. 일찍이 어느 날 밤 금찰(金刹)의 한 간주(竿柱)의 끝 아득히 높은 하늘 구름 속에 백설(白雪)과 같은 흰 눈썹을 가진 스님이 손을 들어 가리키며, “이는 대위덕명왕(大威德明王)이니 너는 이를 몸에 잘 모시라.”고 하는 꿈을 꾸고서 그로 말미암아 곧 임신하였다. 그 후 해산할 때까지 불전에 부지런히 기도하였을 뿐 아니라 오신채(五辛菜)와 고기는 일체 먹지 않으면서 태교(胎敎)를 하였으며, 산기(産期)가 되어 탄생하였으니 그 자태(姿態)는 기의(岐嶷)함을 드러냈고 성품 또한 영특함을 타고났다. 강보(襁褓) 중에 있을 때부터 이미 그 뜻은 풍진(風塵) 밖에 있었으니, 마치 직경 한 치의 소나무만 보아도 이미 그가 큰 집을 짓는데 필요한 재목이 될지 안 될지를 알 수 있으며, 남상(濫觴)의 물줄기를 두고 마침내 허공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양이 될지를 알 수 있는 것과 같았다.

 

나이 여덟살 때 타고 놀던 죽마(竹馬)를 훌쩍 던져버리고 진승(眞乘)을 탐구하려는 마음만이 있었으니, 홀연히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세상에서 살 생각을 단념하고 불교를 탐구할 생각을 굳혔다. 그 때 마침 인도의 홍범삼장(弘梵三藏)이 사나사(舍那寺)에 와서 있었으므로 그를 찾아가 스승이 되어 달라고 간청하였고, 마침내 허락을 받아 삭발하고 득도(得度)하였다. 그 때부터 스님을 시봉(侍奉)하면서 바야흐로 경(經)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얼마를 지나 홍범(弘梵)이 바다를 건너 중인도(中印度)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따라가지 못하고 처소를 옮겨 황화사(廣化寺) 경철화상(景哲和尙)을 모시면서 부지런히 수업하였다. 그 배우는 바가 남들보다 뛰어나 공부의 진취가 배나 되어 다른 사람이 십분(十分)을 하면 스님은 천분(千分)을 넘었으니, 마치 푸른색이 쪽풀에서 나왔으나 그 빛이 쪽보다 더 푸르며, 돌을 물에 던지면 쉽게 그 깊은 밑바닥에 이르는 것과 같았다.

 

많은 사람이 스님을 보고 나이 들어 성숙한 사람이라 하였으니 누가 그를 유학(幼學)이라 하겠는가. 개보(開寶) 3년에 영통사 관단(官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 유리와 같이 청정하게 계행을 가져 삼업이 이미 청정하였고,연꽃 같은 지혜스러운 마음은 육진(六塵)에 더럽히지 않았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신사(神社)에 들러 인사를 하였다. 이 때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점심을 준비하면서 내육궤 중에 담았던 쌀로 밥을 지어 올렸는데, 갑자기 동자(童子)가 스스로 거꾸로 쓰러지면서 광란(狂亂)을 일으켰다.이 때 동자의 귀에 들리기를, “나는 산신(山神)으로써 이 큰 스님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너는 어찌하여 경솔한 마음으로 불결한 것을 공양으로 올렸는가.”라 꾸짖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면서 서로 다투어 더욱 공경하였으니, 그의 영험이 대개 이러한 것들이 많았다.

 

광순(廣順) 3년 희양산(曦陽山) 초선사(超禪師)를 찾아갔는데, 그 때 마침 시자(侍者) 스님이 있어 법당을 청소하던 중 일부분의 땅에는 물을 뿌리지 않았다. 초선사(超禪師)가 시자(侍者)에게 묻기를, “물이 뿌려지지 않은 곳이 있으니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니 시자승(侍者僧)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이 때 스님이 대신 대답하기를, “다시 더 뿌릴 필요가 없으니 시자(侍者)가 소지하는대로 일임(一任)하십시오.”라 하였다. 초공(超公)이 이를 듣고 마음에 부합하여 도(道)가 깊은 줄 알고 말하기를, “너는 종멸(鬷蔑)의 일언(一言)과 완첨(阮瞻)의 삼어(三語)와 같다.”하면서 게송(偈頌)을 지어 그의 뛰어남을 칭송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더욱 존경을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모두 감탄해 마지 않았다. 현덕(顯德) 초년(初年)에 광종대왕(光宗大王)이 왕위에 올라 크게 불교를 숭앙하였으며, 설영(雪嶺)의 선(禪)을 밝혀 하여금 신통묘용(神通妙用)을 펴되 단하(丹霞)의 진불(眞佛)을 찾아내기 위하여 승과(僧科)를 명시하였다. 스님은 당당하게 의논의 광장에 들어가 중론(衆論)을 꺾고 앞장서 진리의 세계를 탐색하였으며, 또한 여러 가지의 뛰어난 예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높은 도덕으로 그 이름이 더욱 빛났다.

 

때마침 광종(光宗)은 중하(中夏)의 문명제도(文明制度)를 도입하여 크게 개혁하되 정신과 생활문화를 하나로 통일시켰고, 가까운 데로부터 점점 먼 곳에 이르기까지 서로 앞을 다투어 한만(汗漫)의 자취를 따랐으니, 이렇게 같은 시대에 많은 스님들이 중국인 서국(西國)에 가서 유학하였으나 스님만이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것에 만족하였다. 이러한 생각으로 호계(虎溪) 밖을 나가지 않고 우후(牛後)가 되는 것처럼 나타나지 않고 숨어 정진하였다.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이미 열반하신 증진대사(證眞大師)가 꿈에 나타나 이르기를, “동산(東山)에 올라서지 않고서 어찌 노(魯)나라가 작다고 느낄 수 있으며, 바다의 넓음을 보지 않고 어찌 황하(黃河)의 협소함을 알겠는가.”라 하면서 “실로 이미 이와 같으니, 너는 하루속히 중국으로 구법(求法)의 길을 떠나라.”고 격려하였다.

 

스님은 꿈을 깨고 나서 말하기를, “옛날 상제보살(常啼菩薩)이 동방(東方) 묘향성(妙香城)에서 신육(身肉)을 베어 제석천(帝釋天)에 공양하면서 청(請)한 것은 신인(神人)에게 법문을 듣기 위한 것이고,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남방(南方)으로 가서 법을 구한 것도 오로지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하기 위함이었다. 그와 같이 지금 또한 그러한 때이므로 시기를 놓치지 말라 하였으니, 이치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부합하였다. 비록 중국으로의 구법(求法)의 길이 멀고 험하더라도 어찌 감히 남들이 말린다고 하여 그만둘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광종(光宗) 6년 여름 곧바로 곡하(轂下)에 이르러 왕에게 구법(求法)을 위해 출국할 시기를 고(告)하려 하였다. 광종(光宗)이 개성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공손한 마음으로 맞이하여 미(郿)땅의 십(什)이란 곳에 전별연(錢別筵)을 베풀고 송별(送別)의 시(詩)를 읊으면서 서로 헤어짐을 아쉬워하였다.144.)

 

이에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면서, 날개로 바닷물을 치고 구만 리를 나는 대붕새의 날개가 하늘을 가로지르고 아득한 삼천리의 광야(廣野)를 달리는 준말 앞에 어떠한 장애도 없듯 씩씩하게 구법(求法)의 길에 올랐다. 어느 덧 오월국(吳越國)에 도착하여 먼저 영명사(永明寺) 연수선사(延壽禪師)를 친견하니, 연수선사가 묻기를, “법(法)을 구하러 왔는가, 일을 보러 왔는가?”하고 물었다. 스님께서 대답하기를, “법(法)을 구하러 왔습니다.”하니 연수스님이 말하기를, “법(法)은 본래 둘이 없어서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세계에 두루하거늘 어찌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왔는가?” 스님이 대답하기를, “이미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세계에 가득하다면 여기까지 찾아온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 하였다.

 

이 때 연수스님은 반가워하는 마음으로 눈을 크게 뜨고 마치 황두(黃頭)를 만난 것과 같이 우대하였다. 연수는 계주(髻珠)를 풀어 신인(心印)과 함께 전해 주었다. 친근함을 허락받은 후 부지런히 번뇌를 대치함에 때때로 닦아 제호(醍醐)를 배불리 마신 다음에는 다시 다른 음식은 먹지 않았고, 날마다 오직 담복향(薝蔔香)만 맡을 뿐 다른 잡된 향내는 맡지 아니하였으며, 묵묵히 현동(玄同)한 이치를 알아 그 깊은 진리를 일조(一朝)에 확찰대오(廓徹大悟)하였다.

 

준풍(峻豊) 2년에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다가 국청사(國淸寺)에 이르러 지성으로 정광대사(淨光大師)를 친견하였는데, 정광스님 역시 연탑(連榻)에 내려와 반가이 맞이하였다. 정광은 자주 법회를 주도하므로 매우 바쁜 실정이었다. 그리하여 스님으로 하여금 우리나라 불교를 그 곳에 전하고자 건의하는 편지를 왕에게 올리고 허락을 빌었다. 왕은 그 뜻을 윤령(尹令)에게 명하여 대정혜론(大定慧論)으로써 천태종지(天台宗旨)를 가르치는 교수사(敎授師)로 추대하였다. 스님은 윤리(倫理)의 표본이고 교훈(敎訓) 바로 그 자체였다. 끊는 듯 가는 듯함이거니 어찌 8월의 봄날처럼 순간적이겠는가. 마치 구년(九年)의 묘(妙)와 같이 한결 같다는 말이다. 스님은 이전에 이미 깊이 깨달은 바가 있으나 계속 부지런히 닦았다.

 

개보(開寶) 원년 연말에 승통(僧統)이며 내도량(內道場)의 공덕사(功德事)를 맡은 찬영(贊寧) 스님과 천태현재(天台縣宰)인 임식(任埴) 등은 스님의 정미롭게 연마한 지혜의 칼날이 예리하여 족히 용(龍)을 도살할 만하며 민첩하게 현기(玄機)를 발명하여 이미 중곡(中鵠)의 이치를 감당할 수 있음을 알아 모두가 이구동음(異口同音)으로 높은 산처럼 숭앙하여 의적(義寂)이 그의 사가(私家)를 희사하여 절을 만든 전교원(傳敎院)으로 초청하여 대정혜론(大定慧論)과 법화경(法華經)을 강설하게 하였다. 스님은 가볍게 그 청을 받아 들여 좋은 일에 대하여 사양하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하므로써 행상인(行商人)들이 권태를 느끼면 화성(化城)을 보여 주어 용기를 내게 하고, 방랑하는 탕자(蕩子)가 의심을 일으키면 모름지기 보장(寶藏)을 개시(開示)하여 곧바로 성취하게 하였으며, 칼이 거울로 말미암아 또 하나의 거울에 나타나는 것과 같았다.

 

상보(象步)로 천천히 예대(猊臺)에 올라 잠깐만이라도 불자(拂子)를 휘두르면서 설법하면 삼근(三根)에 대하여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 육혜(六慧)를 논(論)함에는 위력을 떨쳐 족히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둥근 담장처럼 모여 들어 우러러보며, 청중이 많아 상탑(牀榻)마저 부러졌다. 형저(荊渚)에서 구순(九旬) 동안의 강의로 큰 바람을 떨쳤고 남서(南徐)에서의 백일법문(百日法門)은 그 가르침이 매우 심오하여 곡진(曲盡)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꿈을 꾸었는데, 본국(本國)에 보탑(寶塔)이 공중에 높이 솟아 있어 밧줄에 매달려 당기는 대로 부앙(俯仰)하였다. 또 증진대사(證眞大師)가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너는 능히 소기(所期)의 목적을 성취하였거늘 어찌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움직임에 있어서는 인연을 따라 순리대로 살아가고 부도덕하게 생활하여 냄새나는 오명(惡名)을 남기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만약 식미(式微)의 경계를 깨달았으면 곧 불계(不係)의 길을 돌이키도록 하라.” 하였다.

 

준풍(峻豊) 3년에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귀국길에 올라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으니 이미동쪽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뜻을 바꾸었다. 사람들은 원공국사(圓空國師)를 보고 높은 자리에 있을 재목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광종(光宗)은 마치 구마라습이 진(秦)나라로 가고, 마등법사가 한(漢)나라에 들어오는 것과 같이 여겨 현인(賢人)을 우대하는 뜻을 더욱 두텁게 하고, 선인(善人)을 권장하는 인(仁)을 보다 돈독히 하였다. 처음으로 대사(大師)의 법계(法階)를 서사(署賜)하고 청하여 금광선원(金光禪院)에 주석하게 하였다. 말년에는 중대사(重大師)의 법계를 첨가하고 마납가사(磨衲袈裟)를 헌증하였다. 그로부터 대중들의 첨앙(瞻仰)한 바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점점 많은 중생을 구제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현현(玄玄)한 종취(宗趣)에 있어서는 도리무언(桃李無言)이나 하자성혜(下自成蹊)와 같이 법문 듣고 공부하기 위해 굳은 신심(信心)을 가진 무리들이 도마(稻麻)처럼 열(列)을 이루었고, 고매한 그 이름은 험준한 산보다 높았으며 영예로움은 공동(崆峒)의 아름다움보다 더하여 역대(歷代)로 보배처럼 귀중하게 여겨 다른 사람들이 모두 스님을 본받았다. 그러므로 경종(景宗)이 천조(踐祚)함에 이르러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증사(贈賜)하고 수정염주(水精念珠)를 하사하였다. 성종조(成宗朝) 때 적석사(積石寺)에 천주(遷住)하게 하고 법칭(法稱)을 혜월(慧月)이라 하였다. 순화연중(淳化年中)에 특히 지조(芝詔)를 보내 예궁(蘂宮)으로 영접하고 법문을 청하여 심묘(深妙)한 법의 뜻을 듣고자 하였으니, 어찌 숭산(嵩山) 소림굴(少林窟)에서 관벽(觀壁)하는 참선을 본받았으랴! 이는 선실(宣室)에서 왕과 함께 대화함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임금의 마음을 깨닫게 하였으니 왕으로부터 융숭한 총황(寵貺)와 마납음척(磨衲蔭脊)를 받았다.

 

목종(穆宗)이 선왕(先王)의 뜻을 받들어 불교에 귀의하고, 스님과 사자(師資)의 승연(勝緣)을 맺고 학의(鶴儀)를 보살펴서 잠시도 흠모(欽慕)하지 않는 때가 없으며, 해마다 스님에게 홍패(鴻霈)한 정성을 드리우지 않는 해가 없었다. 또한 ‘광천편소지각지만원묵선사(光天遍炤至覺智滿圓黙禪師)’라는 법칭(法稱)을 첨가하고 수놓은 가사를 하사하는 한편 불은사(佛恩寺)의 주지를 겸하게 하였다. 그리고 호국사(護國寺)·외제원(外帝院) 등도 주지를 역임한 사원들이다. 금상(今上)이신 현종(顯宗)이 신라 천년사직(千年社稷)의 창성했던 운(運)에 응하여 신도(神圖)를 이어받아 나라를 다스리며, 십이행법륜(十二行法輪)을 전하여 크게 불교를 넓혔다. 따라서 의용(義龍)을 소집하여 구름처럼 뛰게 하고 율호(律虎)를 불러 바람과 같이 날도록 불교중흥을 위해 맹활약을 하도록 격려하고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제수하고는 청하여 광명사(廣明寺)에 주석하게 하고 법칭(法稱)을 적연(寂然)이라 진납(進納)하였다.

 

개태(開泰) 2년 가을 조칙(詔勅)을 내려 이르기를, “짐(朕)이 들으니 위로 헌황(軒皇)으로부터 아래로 주발(周發)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보(師保)의 도움을 받아 그 법력(法力)으로 나라를 복되게 하였으니, 이는 덕이 높은 중현(衆賢)을 존숭하는 것이며, 또한 감히 그 하나는 의지하고 그 두 가지는 경만(輕慢)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대선사(大禪師)를 보니 지식은 무리에서 뛰어났고, 마음은 환중(環中)인 허공 밖에 초출(超出)하여 감로수(甘露水)를 경전(敬田)에 뿌리며 보광(葆光)을 실제(實際)에 융합하고 지극히 오묘한 진리를 총괄하여 중생들의 미혹(迷惑)을 깨우쳐 주시는 분이니, 짐이 어찌 스승으로 모시지 않겠는가.”라 하니, 군신(群臣)들 중에 아무도 이의(異議)하는 이는 없고, 모두 가(可)하다면서 왕의 뜻을 따랐다. 그리하여아상(亞相)인 유방(庾方)과 밀사(密使)인 장연우(張延祐), 집헌(執憲)인 이방(李昉) 등이 계속 구중(九重)의 명 받들어 스님이 계신 곳에 찾아갔고 세 번이나 왔다갔다 하면서 강장(絳帳)을 열어 주시길 간청하였다. 스님은 한 달이 지나도록 그 사양함이 견고하였으나, 천자(天子)의 마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찌 도(道)를 숨기고 이름이 없이하려 하였으나, 다만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겠는가.’라는 마음으로 드디어 응락(應諾)하였다. 임금이 직접 찾아가서 절하고 왕사(王師)로 추대하고는 금은(金銀) 실로 짜서 만든 계금법의(罽錦法衣)·기구(器具)·차(茶)와 향 등을 봉헌(奉獻)하였으나, 가지 수가 많아 모두 기재(記載)하지 않는다. 이렇게 융숭한 예를 갖추어 지극한 정의(情誼)로 존숭(尊崇)하였으니 바야흐로 청익(請益)의 정성을 다하였으며 스님은 물어옴에 해박하게 대답하였다. 날마다 고치고 달마다 변화하므로 이러한 일들이 모든 스님들에게 들렸다.

 

기침하는 일음(一音) 중에 만행(萬行)을 제섭(提攝)하였으니, 마치 종틀에 걸려 있는 큰 범종(梵鍾)이 치기를 기다려 울린 메아리가 인연이 있는 곳에는 모두 응(應)하며, 밝은 거울이 경대 위에 놓여 있어 모든 것을 비추어 주되 쉬는 것을 잊어서 비추고 통철함이 걸림이 없는 것과 같았다. 선정(禪定)의 물을 떠서 임금의 혜택(惠澤)을 돕고 진공(眞空)을 확철(廓徹)이 깨달아 황제의 덕풍(德風)을 인도하니, 그 이익됨의 황박(廣博)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함은영유(靈裕)스님이 국통(國統)에 오른 것을 원공국사에 비하면 참으로 사소한 것이며, 혜종(慧宗)을 두타행(頭陁行)의 으뜸이라 일컬은 것도 구구(區區)하다 할 것이므로 스님과 비교하면 같다고 할 수 없다.

 

개태(開泰) 2년에서 3년을 지난 후,법호(法號)를 보화(普化)라고 첨가하였으니, 모두가 이른바 대덕(大德)을 가진 이라야 반드시 그런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얼마가 지난 후 홀연히 풍병(風病)에 걸려 기운과 얽혀 떠나지 않았다. 많은 제자들이 참청(參請)하므로 병을 앎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고인이 남길 유훈(遺訓)의 말씀을 전해주었다. 만승천자(萬乘天子)인 임금께서도 오랫동안 스님의 병에 대해 걱정하여 자주 약을 보냈다. 어떤 친환(親串)이 스님에게 말하기를, “대저병을 앓게 되면 비록 성현(聖賢)일지라도 불안하고 서서(栖栖)한데, 스님은 노년(老年)에 병까지 겸하였으니 어찌 도읍(都邑)을 가까이할 수 있겠는가. 연로(年老)하고 병까지 겹쳤으니 마땅히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에만 극진히 하십시오.”라고 청하였다. 스님은 이 말을 듣고 빙그레 웃으면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안도선생(安道先生)이 명기(命期)가 되고서야 비로소 떠나갔음을 알 것이며, 정명거사(淨名居士)가 중생들 때문에 병을 앓고 또 그들을 근심한 것이니, 진실로 바쁜 길을 당하지 않고서 어찌 멈춘 발걸음을 바삐 서두르겠는가! 너는 내가 도읍(都邑)에 있는 것을 자리(自利)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오직 이타(利他)를 위한 때문이라.”라고 하였다.

 

천희(天禧) 2년 초여름, 수도(修道)와 홍도(弘道)하는 것이 거의 끝날 때가 된 후, 거돈사(居頓寺)로 떠나려고 석장(錫杖)을 짚고 궁중으로 가서 왕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장삼을 떨치면서 먼 거리인 사주(沙洲)로 빠르게 걸어가니, 모래 위에 한 마리의 백로(白鷺)가 높이 날아 구름 덮인 하늘로 들어가고, 고운(孤雲)이 아득하여 허공을 돌아 동학(洞壑)을 찾는 것과 같았다. 원주(原州) 현계산(賢溪山) 거돈사(居頓寺)에 멈추어 “바야흐로 한가하게 연좌(宴坐)하다가 협진(浹辰)도 못되어 사람이 태어날 때는 기운이 한 곳에 모였지만 이제 나는 곧 무물(無物)로 되돌아 가려 한다.”고 하였다. 이 달(음력 4월) 17일에 병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조용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대중들에게 이르시기를, “옛날 여래께서는 대법안(大法眼)으로써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이와 같이 전전(展轉)히 사자상승(師資相承)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내 이제 이 법을 가져 너희들에게 부촉(付囑)하니 너희들은 잘 호지(護持)하여 혜명(慧命)으로 하여금 단절됨이 없도록 하라. 또한 상부(喪訃)를 임금께 주달(奏達)하여 국가의 의전규정(儀典規定)을 어렵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끝나자마자 열반에 드셨으니, 세수는 89세요, 법랍은 72였다.

 

 날 아침 태양은 처참하게 안개에 덮여 있었고, 구름은 수심에 잠겨 암담하였으며, 맹수의 무리들은 산초(山椒)에서 울부짖고, 새들은 바위구멍에서 슬피 울고 있었을 뿐 아니라 모든 자연들이 삽연(颯然)히 변화를 나타냈다. 이 모두가 스님의 서법(逝去)에 대한 슬픔을 보인 것이다. 문도(門徒) 경충(慶充) 등은 벽용(擗踊)하면서 호곡하여 오장(五臟)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열반의 락(樂)을 묻지 말라. 속결 없이 취굴(聚崛)의 향기를 속였으며 백학(白鶴)처럼 시든 숲을 보였도다. 조용한 숲 속에 풍수지리(風水地理)에 의해 승지(勝地)를 잡아서 비궁(閟宮)을 세웠으니, 곧 그 달 22일 거돈사(居頓寺) 동남(東南) 문방(間方)에 장사를 지냈다. 장사가 끝나고 예의로 임금께 진문(奏聞)하니, 왕이 스님의 유점(遺占)었다는 말을 듣고 애도하면서 “스님의 열반이 어찌 그리 빠르신가.”하고 오랫동안 진도(震悼)함을 잊지 못하였다.

 

특히 신신(藎臣)에 명(命)을 내려 장례의 조문(弔問)을 대행(代行)하도록 하고, 이명(易名)의 의전(儀典)을 거행하되 광명을 전법(傳法)의 문(門)에 비추어 국사의 시호를 원공(圓空)이라 하여 드디어 승묘지탑(勝妙之塔)을 세우도록 하고 수유(豎儒)에게 명하여 스님의 휘열(徽烈)을 선양(宣揚)하도록 하라 하셨다. 그러나 신(臣)은 문사(文詞)가 각로(刻騖)에 부끄러우며 학문은 요계(溲鷄)에게 사양해야 하며, 성품은 족포(族庖)와 같아서 근본 자질은 발연(發硎)의 예리함이 궁핍하고, 공부는 대장(大匠)이 아니어서 본 바탕이 상수지기(傷手之譏)를 근심하였으나, 이미 반선(頒宣)을 받들었으니 겸손하고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글을 펴고 보니 서로 질박(質樸)하여 다투어 부(賦)와 객(客)의 말이 부합하였다. 골짜기를 변하여 육(陵)을 만들었으니, 큰스님의 자취가 길이 이어지기를 바라며, 그 아름다움이 서소(西笑)와 같아 남간(南刊)을 본받고자 삼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심성(心性)을 깨달으면 부처님이고

분별망상(分別妄想)을 잊는 것은 선(禪)이다.

무미(無味) 담담한 본분(本分)의 그 경계(境界)는

언어문자(言語文字)와 분별상(分別想)을 떠났다.

헤아릴 듯하나 헤아릴 수 없네.

현묘(玄妙)하고 또 현묘(玄妙)한 그 진리가

노끈을 보고 뱀으로 착각하듯

눈먼 소경이 만진 코끼리 일정하지 않네. (其一)

가엽(迦葉)은 정확하게 터를 잡았고

달마(達磨)는 터를 닦아 집을 지었네.

묵묵히 전해지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여기에서 비로소 성취하였네.

역대조사(歷代祖師) 모두가 선양(宣揚)하였고

사사(師師)가 전해받은 열반묘심(涅槃妙心)을

부처님 가신 때가 멀고 멀어서

받은 법(法)에 오류가 점성(漸盛)하였네. (其二)

무너진 강령(綱領) 회복할 자 누구인가.

여기 원력(願力)으로 태어난 이 있으니

하늘의 일월정기(日月精氣)를 이어 받았고,

지기(地祗)의 모든 영명(靈明) 한 몸에 지녀

고고(孤高)한 그 성품 세속(世俗)을 뛰어났고

위대한 그 도량(度量) 만류(萬類)에 초출(超出)했네.

쌍상투를 여미는 총각 때부터

불교를 흠모해 출가(出家)를 결심하였네. (其三)

오폐(杇廢)한 속가(俗家)엔 살기를 단념하고

삭발염의(削髮染衣)로 교학(敎學)을 연마하고

계율(戒律)을 생명처럼 굳게 지켰네.

변재(辯才)는 무애하여 부루(富樓)와 같고

도덕은 점고(漸高)하여 날마다 새롭도다.

마음은 이미 깨달은 바 있다지만

도업(道業)을 닦고 닦아 중단함이 없고

견고한 그 신념 갈수록 확고하네. (其四)

멀고 먼 바다 건너 회해(淮海)를 지나

곧 바로 오월국(吳越國)을 찾아 갔도다.

연수(延壽)스님 회상(會上)에 이름을 걸고

경창(經窓) 옆에 마주 앉아 법(法)을 물었네.

첨예한 질문에도 막히지 않고

심오한 그 경지 비길 곳 전혀 없네.

삼승(三乘)의 교리를 두루 통달하였고

모든 불자(佛子) 스승으로 섬기었도다. (其五)

구법(求法)의 길을 돌려 귀국하시니

영주(靈珠)가 합포(合浦)로 돌아옴과 같도다.

구마라습이 진(秦)에 옴과 같으며,

공자(孔子)가 되돌아옴과 다름 없도다.

불법(佛法)을 온 나라에 크게 드날려

홀로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시어

그 덕화(德化) 하늘까지 가득하시고

어지심은 온 나라에 충만하도다. (其六)

우담바라(優曇鉢花) 그 단상(瑞祥) 재현하였고

지혜의 밝은 거울 거듭 비추네.

오조(五朝)의 임금 스님 앞에 경청하였고

이 같이 여러 임금 존경하였네.

공덕(功德)은 도탄구제(塗炭救濟)에 두루하였고

심미(深微)한 진리를 확철(廓徹)히 깨달았도다.

말년에는 범범(汎汎)하게 물러 나셔서

척연(倜然)하게 거돈사(居頓寺)로 돌아 오시다. (其七)

첩첩 산중 구름 속에 누워 있으며

졸졸 흐른 시냇물에 양치질하도다.

원숭이와 학(鶴)들이 따라 다니고

호중건곤 세진(世塵)과는 동떨어졌네.

마음은 언제나 한적(閒寂)에 두었으며

세월은 무상(無常)하여 모두가 변하네.

생명도 허부(虛浮)하여 풍전등화(風前燈火)이지만

유유히 관찰하여 자적(自適)하도다. (其八)

멸(滅)할 것이 아니건만 멸(滅)하여지고

종말이 없건만은 종말이 있네.

교종(敎宗)은 쇠잔하여 멸망에 가깝고

선종(禪宗)의 숲은 말라 공산(空山)이 되고

구비(龜碑)도 파손되어 없어질지라도

이 승묘탑(勝妙塔)만은 영원히 남아 있어

수 없이 성(成)·주(住)·괴(壞)·공(空) 반복할지언정

스님의 높은 바람 널리 펴지소서. (其九)

태평기력 세재 전목적분약(太平紀曆 歲在 旃蒙赤奮若)

추(秋)7월 27일 세우고, 신승(臣僧)인 정원(貞元), 계상(契想), 혜명(惠明), 혜보(惠保), 득래(得來) 등은 글자를 새기다.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2】(1995)〕 
 

 

원공국사 복제부도

 

 

원공국사 부도...중앙박물관


 

팔각원당형의 탑에, 목조건축의 지붕을 연상케 하는 팔각 지붕돌이 부드럽게 치켜올려져 경쾌한 맛을 준다. 전면에 새겨진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은 오히려 웅혼한 맛을 감하지만, 전체적으로 조형의 비례가 흠잡을 데 없어 중후한 품격이 느껴지는 뛰어난 작품이다.

하대석엔 안상이, 상면에는 복련이 조각되어 있다. 팔각의 중대석 각 면에는 간단한 안상을 두고, 그 안으로 팔부중상()3)을 한 구씩 조각하였으며, 상대석은 탐스런 앙련을 돌려 피게 했다. 팔각의 몸돌은 앞뒤 양면에는 문과 자물쇠, 좌우 양면에는 창을 냈으며, 나머지 네 면에는 사천왕입상을 조각하였다. 팔각의 지붕돌은 추녀가 얇고 귀퉁이의 반전이 뚜렷해 경쾌하다. 상륜부는 팔각의 보개가 얹혀 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부도비와 함께 1025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2.68m이고, 보물 제190호이다.


2002년 거돈사지 글이 보인다.

(참고로 등장하는 여인은 당시 다음/칼럼 섬진강편지 동호회원으로, 현재 우리카페 농부님.빈지게님.장돌뱅이님이 회원 이었다)

금당터 뒤 요사와 전각이 있었을 절터 위에 피어난 들꽃을 가리키며 원주에서 만나 동행한 여인이  묻는다.

-. 저 꽃 이름 아세요?
(뭐하나 잘 아는 것이 없지만 "나"는 꽃 이름에는 특히 맹물이다)
-. 노란 꽃
-. 달맞이 꽃입니다.

-. 저 꽃은 요?
-. (우리 고향에 지천으로 늘린 꽃인데) 하얀 꽃
-. (웃음 지으며) 개망초입니다.

사람 꼴이 엉망진창이 되는구먼!!!

-. 저 꽃은? (그만 했으면 좋으련만...)

보자보자 하니 저 아짐씨 넘 하구만 나도 해바라기 장미 등 많이 아는데...

-. (자랑스럽게 큰소리로) 나팔꽃이잖아요!!!!!!!!!!
-. (소리내어 웃으며) 메꽃입니다.

참말로 요상허네???
경상도에선 분명 나팔꽃이라 하는데 강원도에선 메꽃이라니?????

제법 수령이 오래된 거돈사지 입구의 느티나무에 눈길 떼지 못 하고, 여주로
맘을 향했다.

2002.7월  

 

 

금당터 불대좌.

금당은 거돈사의 중심 건물로, 초석의 배열간격으로 보아 중심에 있는 어칸의 길이가 협칸보다 길게 되어 있고, 부처님을 모시던 불상 대좌가 있다. 대좌에 초석이 있고 그 밑에 적심석이 있다. 그리고 사방에 지대석을 돌린 것으로 보아 불상은 이미 금당이 짓기 전에 먼저 불상을 조성한 후 금당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불상의 크기가 일반 단층목조 건축으로는 불상 높이를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므로 2층 내지는 3층 구조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거돈사 옛 절터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형태로, 기단을 이루는 밑돌·가운데돌·맨윗돌이 각각 4매로 이루어진 특징이 보인다. 위층 기단은 남·북쪽에 무늬없는 긴 돌만 세우고 동·서면에는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돌을 끼워 맞춘 방식이다. 즉, 남·북쪽에서 보았을 때 동·서면에 세운 석재의 두께가 자연스럽게 기둥 모양으로 보이도록 한 것이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였다. 5단의 밑받침을 둔 지붕돌은 두꺼우면서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곡선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직선을 이루는데 끝부분에서의 들림이 경쾌하여 통일신라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는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고, 그 위에 놓여진 연꽃 모양의 보주(寶珠)는 최근에 얹어 놓은 것이다...문화재청

 

 


배례석.

면석에 안상을 새기고, 상부에 연꽃을 조식하였다.

 


 

 


절터 좌측, 사지에서 수습한 석조부재들을 모아 놓았다.



당간지주

거돈사터 느티나무 건너편 폐교 된 정산초등학교 교정에 위치한다.



당간지주 아랫부분(사진 좌측 하단)에 원공이 있으나, 여타의 장식은 없어 미완성 처럼 보인다.


 

달빛에 물든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옛날에 남매 장사가  잘 다듬어진 당간지주 하나를 옮겨 온 후에 남동생이 죽어  당간지주는 미완성으로 남았으며, 하나는 현계산 동남쪽에 있다고 한다.


2016.09.25

 

디지털원주문화대전.문화재청.장달수의 한국학카페.다음,네이브 백과사전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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