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법사지 역시 2006년 3월 마지막으로 들렸었다. 그때의 답사기를 본문 아래 부분에 덧붙인다.
"절터 서쪽 영봉산(靈鳳山)의 아랫자락에 있는 흥법사가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興法寺址는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 있는 寺址로 1984년 6월 2일에 文化財資料 제45호로 지정되었다.적연국사(寂然國師) 영준(英俊)이 932년(태조 15)에 이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이 곳에 있었던 진공대사 탑비에서 진공대사가 940년(태조 23)에 이 곳에서 돌아가셨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신라말에 거대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은 고려 태조가 흥법선원(興法禪院)을 만들어 진공대사에게 교화를 맡기자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인근의 정산리 거돈사, 여주 고달사 등과 더불어 고려 전반기의 선종계 절로서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의하면 흥법사는 신라 때부터 고려시대까지의 거찰이었으며 『동국여지승람 』이 편찬된 1480년경(조선 성종 11)에도 흥법사는 폐사(廢寺)되지 않았고 진공대사탑비(眞空大師塔碑)도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흥법사가 폐사된 것은 명확한 자료가 없다.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시대 전기까지 절과 진공대사 탑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1693년(숙종 19) 이 곳에 도천서원(陶川書院)을 건립하였다가 1871년에 폐지하였다"...디지털원주문화대전
그 절터에는 삼층석탑 비신이 결실된 진공대사 부도비 귀부와 이수 석등대좌 숱한 인연들이 스쳐간 와편과 도자편 석축의 흔적들... 만행에 오른 부도와 비편
다녀간 님들의 글 서거정,이색,김구용.원천석
원주에 부임하는 민정을 보내다... 서거정/한국고전번역원
치악산중독서사雉嶽山中讀書寺 치악산 산중에 내 글 읽던 절 있었으니 법천정하사제탑法泉庭下詩題塔 법천사 뜰아래는 탑에 시를 써 놓았고 당일행장려불만 當日行裝驢不滿 당시 행장은 나귀 한 바리도 다 안 찼는데
삼층석탑
기단부 귀꽃과 안상
전각의 반전은 희미하다.
상륜과 탑신 노반석.탑신의 양우주 4단의 층급, 절수구, 낙수면의 깊은 물매
진공대사 부도비 비신의 일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다.
비신이 결실된 상태이다.
위에서 인용한 조선초 서거정(1420~1488)의 한시를 보면 비신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비문을 읽은 소회를 시로 남기기도 했다.
讀原州興法寺碑...서거정 당 태종의 글씨는 용이 꿈틀거린 듯하고 唐宗宸翰動龍螭
부도비문 고려국(高麗國) 원주(原州) 영봉산(靈鳳山) 흥법사(興法寺) 왕사(王師) 진공지탑(眞空之塔). 대개 들으니 부처님은 미언(微言)으로 교를 세워 비로소 취령(鷲嶺)에서 말씀을 열었으며, 가섭은 묘지(妙旨)로 심인(心印)을 전해 받고는 마침내 계족산(鷄足山)에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갔다. 비록 말로는 교리(敎理) 밖에 별도(別途)로 전하였다고는 하나, 그윽이 생각건대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을 함께 품수(禀受)하였다. 경희(慶喜)는 가섭의 제자가 되었고, 상나화수(商那和修)가 아난(阿難)의 법을 전해 받아 제3조(祖)가 되었다. 그로부터 제12조(祖)인 마명(馬鳴)에 이르러 아름다운 자취를 계승하면서 묘법(妙法)을 삼승(三乘)에 드리웠고, 제14조(祖)인 용수(龍樹)는 꽃다운 향기를 드날리면서 (결락) 보았다. 그가 주창한 법(法)은 즉상(卽相)이나 이상(離相)이며, 몸이 아니나 곧 몸인 것이다. 강급(降及)(결락) 처음으로 원각대사(圓覺大師)가 중국의 양조(梁朝) 때 들어왔고, 비로소 대홍(大弘)을 만났다. 달마는 양무제를 만난 다음, 북쪽 위(魏)나라로 가서 효명제(孝明帝)를 만났다. 그리하여 대조(大祖)인 혜가(慧可)를 만나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계합(契合)하여 동풍(同風)을 부촉하였다. 그로부터 조법(祖法)을 상승(相承)하되 심등(心燈)을 계승하여 대대로 이어져 단절되지 아니하였다. 그런 까닭에 일화(一花)가 훌현(欻現)함에 육엽(六葉)이 거듭 무성하였다. 근래 강서(江西 : 馬祖道一)로부터 해예(海裔)까지 흘러 들어왔다. 따라서 봉림가(鳳林家)의 제자요, 장경(章敬)의 증손인 우리의 진공대사(眞空大師)가 다시 선종을 천양하였다.
대사의 법휘는 충담(忠湛)이요, 속성은 김씨며, 그의 선조(先祖)는 계림(鷄林)의 관족(冠族)이고, 토군(兎郡)의 종지(宗枝)로서 분파(分派)되어 영광을 누렸으며, 상진(桑津)에 의해 별파(別派)로 갈라졌다. 원조(遠祖)는 다(多) (결락) 도잠(陶潛) (결락)이 벼슬에 얽매어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겠다 하였고, 가후(賈詡)와 같은 공을 세우기를 희망하였으나, 이것이 어찌 녹위(祿位)를 귀함이겠는가. 그러므로 고반(考盤)과 같이 도(道)를 즐겼다. 일찍부터 『장자』와 『열자』 등의 서적을 전공하였고, 초야에 살면서 은사(隱士)를 불러 같이 노래를 읊으며 시정(市井)과 조정(朝廷)의 명예를 피하였다. 모어(母於) (결락) 현지자(賢之子)이니 어찌 성선(聖善)의 마음을 닦음이 없었으랴! 이러한 영기(靈寄)로운 태몽을 감득하고는 훌륭한 아들을 낳기를 희망하던 중 함통(咸通) 10년 1월 1일에 탄생하였다. 대사는 나면서부터 남다른 특수한 모습을 가졌고, 어려서부터 농담은 전혀 하지 않았다. (결락) 초인적(超人的)인 영특한 성품(性品)을 가졌으며 신비한 지혜는 따를 자가 없었다. 괴시(槐市)에서 경을 배웠고, 행원(杏園)에서 과거(科擧)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부모가 관상 보는 사람을 불러 관상을 보였더니 “감라(甘羅)가 입사(入仕)하던 나이에 이르면 이름을 떨침이 헤아리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가의(賈誼)가 박사(博士)되던 나이에 (결락) 부모가 모두 사망하여 대사는 의지할 곳이 없는 고아(孤兒)가 되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장순선사(長純禪師)가 절로 데리고 가서 상좌를 삼아 득도(得度)시켜 사미계를 받게 하였으니, 이전부터 장순(長純)은 대사의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였다. 대사(大師)는 장순장로(長純長老)를 따라 거처를 얻어 (결락) 속진(俗塵)을 여의고 공문(空門)에 들어가 바야흐로 승위(僧位)에 올라 부지런히 정진 수도하여 승당도오(昇堂覩奧)하므로 입실건당(入室建幢)하게 하여 전법제자를 삼았으니, 이심전심한 사자(師資)의 정이 마치 고리처럼 연결되어 돈독하였다. 후배들이 빠른 걸음으로 뒤쫓아 와서 뒤에 출발하였으나,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적지 아니 하였다고 하였으며, 각(覺)의 지파(枝派)가 계속 이어지면서 먼저 시작하여 늦게 이룩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선림(禪林)에서 지내면서 (결락) 우유(優遊)하였다. 인도에서 발상한 불교를 거듭 중흥하여 마침내 계계승승의 법맥(法脈)을 이었다.
능가(楞伽)인 선종이 재흥(再興)할 기회를 엿보면서 발원하여 오다가 용기 원년(龍紀 元年)에 무주(武州) 영신사(靈神寺)에서 비구계를 받고, 이어 법상종(法相宗)과 율장(律藏)을 연구하였다. (결락) 종지(宗旨)를 들어 도(道)를 토론하면서 학인(學人)들에게 이르되, “처마에서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도 계속 떨어지면 능히 돌을 뚫으며, 두 사람의 마음이 굳게 합쳐지면 능히 쇠도 끊을 수 있다”라 하였다. 이와 같이 불을 붙이려고 나무와 나무끼리 마찰하는 것과 같이 계속적인 노력과 병에 물을 쏟아 붓는 것과 같은 달통(達通)을 얻게 된 그 원인은 모두 적미(積微)와 같은 작은 일도 쉬지 아니하며,비록 규보(跬步)라도 계속 전진(前進)한 탓으로 마침내 학해(學海)의 공을 이룩하고, 길이 빛나는 (결락) 성취하였다. 석자(釋子)인 천일(天日)선사가 당시 전후 현실인 흉년과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산야(山野) 곳곳에 말라 흩어진 폭골(曝骨)과 아직 썩지 아니한 시신이 낭자한 광경을 보고 생각하되 “다른 산중(山中)들은 조용한 곳이 많으니 어찌 피난할 곳이 없겠는가. 이곳은 위험한 곳이므로 오랫동안 거주(居住)할 생각은 없었다.” (결락) 지화(之華) (결락) 자(者)와 같이 배를 타고 가서 피안(彼岸)에 도착하였다.
이 때 그 길로 곧바로 운개사(雲蓋寺)를 찾아가서 부원대사(淨圓大師)를 친견하였다. 대사(大師)는 구름 덮인 산골에 살면서 석상(石霜)의 법인(法印)을 전해 받고 학인을 지도하고 있었다. 지(知) (결락) 대사가 원이(遠離) (결락) 원남(圖南)의 웅지를 품고, 분지를 발하여 구름을 덮을 수 있는 날개를 펴고 견성성불하여 광도중생(廣度衆生)하려는 서원이 날로 향상하여 불일(拂日)하는 예장나무 가지를 높이 흔들 것을 알았다. 어느 날 대사가 이르되 “네가 이곳에 와서 유학(遊學)하되 마치 천우교목(遷于喬木)과 같이 다시 정진할 원력을 세워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 곳인 보소(寶所)를 떠나지 아니하고 (결락) 그 후 하동(河東)으로 가서 자악선원(紫嶽禪院)에 입방하여 처음부터 성전(聖典)을 연구하고 다시 우혈(禹穴)지방을 탐방하고, 그로부터 영적(靈跡)을 답사하는 행각을 시작하고서야 비로소 연대(燕臺)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천우(天祐) 15년 6월에 (결락) 이르러 귀국하게 되었다. (결락) 학인(學人)들이 함께 와서 친견하고 환희에 가득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손뼉을 치면서 앙모하였다. 그리하여 수월(數月) 동안 선(禪)을 논하고 수년간(數年間) 법문을 물어 왔다. 마치 미천(彌天)이 입을 벌리고 이왈(離曰)이 입술을 놀리는 것과 같아서 어로(語路)의 발단을 헤아리며, 언어(言語)의 단서를 잘 짐작하였다. 이 때 양지(兩地)에서 지난날의 자취를 생각해 보니, 마음이 (결락) 지광(之光). 갑병(甲兵)의 빛이 나타남을 걱정하다가 홀연히 김해를 떠나 옥경(玉京)을 향해 여러 날 만에 서울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마치 마륵(摩勒)이 다시 퍼진 것과 같을 뿐 아니라, 또한 우담바라가 한 번 나타난 것과 같았다. 공손히 내전(內殿)으로 맞이하여 모시고 (결락) 모든 중신과 궁내인(宮內人)들이 법문을 청함에 스님은 법상에 올라앉아 상왕(象王)의 설(說)을 토(吐)하니, 거듭 경의를 표하며, 제자(弟子)의 예의를 펴고, 들은 법어(法語)를 낱낱이 기록한 다음, 왕사(王師)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결락) 청정한 정려(精廬)로 옮겨 모셨다. (결락) 어느 날 다시 단겸(丹慊)을 떠나 경기(京畿)에 도착하였으므로 왕은 별도로 옥당(玉堂)을 꾸며서 승탑(繩榻)에 오르시게 하고 대사(大師)에게 묻되, “과인(寡人)이 어려서부터 위무(威武)는 숭상하였으나, 학문에는 힘을 쓰지 아니한 탓으로 선왕(先王)의 법도를 알지 못함이니, 어찌 (결락) 존망(存亡)의 뜻을 (결락)를 분별하겠습니까?”
기쁘게 여기는 바는 명제(明帝)가 꿈을 꾸고 노력한 것과 같이 노력하지 않고도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마치 한(漢)나라 명제(明帝)인 세종(世宗)이 마등과 법란을 만남과, 또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보지공(寶誌公)스님을 만난 것도 이와 비교할 수 없다. 세세생생에 영원히 향화(香火)의 인연을 맺고 자자손손(子子孫孫)이 길이 부처님을 받들어 모시는 지극한 신심(信心)을 표했다. 그리하여 흥법선원(興法禪院)을 중건하고 스님을 여기에 주지(住持)토록 하였다. 이와 같은 길상지(吉祥地)가 오히려 지난날의 미덕(美德)을 논하게 되니, 복을 맞이하는 명당(明堂)임을 알게 되었다. 스님은 이곳을 세상을 마치려는 종신지지(終身之地)로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에 선원을 크게 확장한 후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구름과 같고, 배우는 사람들이 날로 진취됨이 마치 안개와 같았다. 의구(依舊)히 유리 (결락) 어국(於國) (결락) 모두가 불법 중흥주라는 말씀은 들었지만, 직접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어느 절에 가도 거절되고 더불어 말조차 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룻밤의 유숙도 허락받지 아니 하였으니, 어찌 대사(大師)가 평소에 이러한 편벽된 생각이 있었겠는가. 덕의 부유(富有)함은 (결락) 좌품(座品)의 (결락) 과 달랐다. 천복(天福) 5년 7월 18일 이른 아침, 문인들에게 이르되 “만법(萬法)은 모두 공(空)한 것이다. 나는 곧 세상을 떠나려하니 너희들은 일심(一心)을 근본 삼아 부지런히 정진하라”하고, 적연(寂然)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얼굴빛은 생전(生前)과 다름이 없었다. 세속 나이는 72세요, 승랍은 (결락) 이었다. 땅은 진동하고 산은 무너지며, 구름은 수심에 잠기고 해는 처참하였다. (결락) 그리하여 산곡(山谷)에는 애도와 슬픔이 가득하였고 사부대중(四部大衆)과 천인(天人)들은 모두 절학(絶學)의 슬픔을 더하였으니, 어찌 뼈에 사무치게 애통하지 아니하랴! 제방(諸方)의 사서(士庶)들은 모두 스님의 열반에 대해 울면서 통곡하였다. 따라서 과인(寡人)도 갑자기 열반 소식을 듣고 애통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간절히 스님의 크신 덕을 추모하여 마지못했다. 특히 종림(宗林)의 선백(禪伯)이고, 말세(末世)의 고황(古皇)으로 (결락) 긴 수명을 누리지 못하시고 뭇 중생의 우러름을 어겼도다.
지금 비록 스님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그 진실인 법체(法體)는 길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먼저 물이 고이니, 고기가 찾아옴을 기꺼워했고, 뒤에는 숲이 없어지니 새가 날아가는 것을 슬퍼하도다. 바라는 바는 조속히 명체(明禮)를 갖추어야 할 때가 다가왔다 하고, 시호를 진공대사(眞空大師), 탑호를 (결락) 지탑(之塔)이라고 추증하였다.
대사(大師)는 설산(雪山)에서 성도하고, 연동(煙洞)에서 마음을 증득하여 18대(代)의 조종(祖宗)을 전하였고, 3천년의 선교(禪敎)를 통괄하였으니, 말세의 중생을 크게 교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광범하게 교화한 공적을 열거한다면 비록 황여(黃輿 : 地球)라고는 하나, (결락) 모든 향기는 사라지고, 문득 호접(胡蝶)의 마음을 끌어 일으키니, 수(水) (결락) 망기(忘機) (결락) 생전(生前)에 스님과 과인(寡人)은 마치 압구(狎鷗)처럼 친했던 감회를 일으키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교화(敎化)와 도덕이 무한(無限)함을 나타내고자 하니, 참으로 신독(身毒)의 풍속을 드날리고, 축건(竺乾)의 법을 부연한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문도 제자 5백여 명이 (결락) 신지속(身之贖). 높고 푸른 산이 깊은 골짜기로 변하고, 넓은 발해 바다가 (결락) 전답(田畓)으로 변할까 염려되어 나에게 진정(陳情)하여 비석을 세우려고 비문(碑文)을 주청하였다. 이어 여러 차례 상소하여 마침내 나는 윤허(允許)를 받았으니, 바라는 바는 스님의 무위덕화(無爲德化)를 나타내어 마치 물과 구름처럼 영원(永遠)히 썩지 않게 하려고 금석(金石)에 새기는 것이다. 애통한 마음으로 가능한 데로 제구(虀臼)를 지어 문인(門人)을 위로하고, 민(閔) (결락) 지심(之心). 아름다움을 백대(栢臺)로 돌리고, 국사(國士)들이 스님을 추모하는 뜻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에 명(銘)을 지어 가로되, (결락) (결락) (결락) 소인기(蘇認己)
원주 투데이(2005.03.21)...박 형 진(전 원주문화원장)
**조정호 관찰사의 기록에 따르면 1636년에는 이미 비신이 깨어지고 망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진공대사 부도...국립중앙박물관
부도는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기본적인 형태로, 기단(基壇)의 아래와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다. 북모양을 하고 있는 가운데받침돌 표면에는 웅장한 구름과 함께 뒤엉켜 있는 용의 몸체를 생동감있게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의 모서리마다 꽃무늬가 장식되어 독특하고, 앞뒤 양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이 각각 새겨져 있다. 그 위로 얹혀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과 2중으로 된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다. 경사가 완만한 낙수면은 8각의 모서리선이 굵게 새겨져 그 끝에는 높이 솟아있는 꽃조각이 달려있다. 특히 낙수면에는 기와를 입힌 모양의 기왓골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처마 끝에 이르러서는 암막새, 수막새까지도 자세히 조각됨으로써 밑면의 서까래와 함께 당시 목조건축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꼭대기에는 8각의 작은 지붕모양의 머리장식인 보개(寶蓋)가 있다.
진공대사 부도 석관...국립중앙박물관
운곡행록...운곡 원천석 (출처:http://blog.naver.com/sik6644/50047955083)
흥법사(興法寺) 대선사(大禪師) 성진(省珍)이 조계(曺溪) 행각(行脚)인 문진(文軫)과 사근(斯近) 두 사람이 지은 시 한 축(軸)을 사람을 시켜 내게 보내면서 시를 청하기에 차운하여 부침
경계가 고요하니 마음도 멀어지고 사람이 한가하니 도(道)도 더욱 높아지네. 두 사람이 뛰어남을 분명히 알면서도 가는 세월에 맡겨 몇 해를 보냈던가. 소나무 달 사이로 서늘한 밤 기운이 흩어지고 강물과 구름 사이에 봄 그림자 일렁이는데, 손님이 찾아와 좋은 시를 지으니 길게 읊조리면서 황혼에 서 있네.
온 강의 바람과 달빛이 솔문에 이어지고 만 골짜기 구름과 안개가 한 골로 모여들었네. 우뚝한 (불)상을 외로운 동산에 세우고 장엄한 불탑은 뜨락에 솟았네. 조계(曺溪)의 두 손님이 우연히 찾아왔으니 등 넝쿨 푸른 빛도 그대들 위해 움직이네. 주인과 나그네가 웃고 이야기하니 한가롭고도 담박하기가 구름 같구나. 만약 술을 사려면 도연명(陶淵明)을 끌어오고 셋이 웃으며 즐겁게 논다면 나도 함께 하리라. 이제부터 한 평생 숨은 이들을 사모하면서 그곳 향해 밤마다 맑은 꿈을 꾸리라.
201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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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시내를 벗어나도 눈은 그칠 줄 모른다. 그렇게 소망하던 눈내리는 겨울 폐사지를 만날 수 있음에도 즐거움 보다는, 가슴이 답답해 오니 야릇한 심사다. 얼마나 들리고픈 흥법사지 였던가. 거돈사지, 법천사지, 여주 고달사지와 더불어 남한강 유역 폐사지 답사의 메카이건만 이제서야 산문을 열어준다.
김제남 신도비를 거쳐 모퉁이를 지나니 멀리 삼층탑이 길손에게 손을 내민다. 폐사지는 여유롭게 멀리서 가능한 멀리서 바라보아야 하거늘 달구지는 거침없이 삼층탑까지 달려, 고려 태조 왕건의 지원으로 진공선사가 중건한 흥법사지 중정(?)에 이르니 눈발이 그쳐 눈 내리는 폐사지 정경은 또다시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원주 흥법사지
금당터 자리에는 허물어진 가옥이 황량함을 주지만 멀리 뒷산을 바라보니 허허롭던 절터가 금방 빛이 나는 까닭은 산봉우리가 본존불과 좌우 협시불인 삼존불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임란, 병란 을 거치면서 파괴된 절집이 숙종조에 도천서원이 자리했다니 파괴의 정도는 능히 짐작이 가고 남는다.
태조 왕건은 무엇때문에 심심산골 절을 지원했을까? 혹 불완전한 통일, 지방호족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이었거나, 선종 세력의 확대로 선종 가람과 손을 잡으려는 목적은 없었겠는가?
신라 유민 위무, 국가 통치 철학인 불교 단체 지원 등, 태조 왕건으로서는 일석삼조 유형의 효과를 기대하고 남한강변 사찰을 육성했다고 보는 것은 나만의 근거 없는 논리일까?
흥법사지 삼층탑
이중기단의 신라계 석탑으로, 기단 면석에는 안상속에 꽃이 만개해 있고, 1층 몸돌에 비해 2,3층 몸도 체감이 급격하며 상륜부에는 노반만 보인다. 삼층탑만 보아도 흥법사지의 창건연대 추론이 가능할 정도로 옥개석 받침, 탱주가 줄어 들었다. 흥법사지 석축
흥법사지 주추
서원 창건, 일반 민가에 제짝이 팔려갈 때도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안으로 안으로 슬픔을 삭였겠지. 진공대사 부도비 귀부, 이수
부도, 부도비는 일반적으로 사찰 서쪽에 조성되는데 진공대사 부도비는 가람 중앙지점에 현존하는 것으로 미루어 제위치가 아닐 것이다.귀부는 삼국통일 후 무열왕릉비에서 처음보이고, 고려에 이르면 용의 모습이며, 후에는 거돈사지 귀부처럼 아가미도 표현된다.
여의주를 입에 물고, 등에는 육각형 무늬 만(卍), 연꽃이 보인다,이수 중앙 제액에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주위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네마리 용을 조각하였지만, 어찌 내 눈에는 어지럽게 보이는지...
정지된 시간 속에서 떠남이 아쉽지 않은 폐사지 답사는 언제쯤 가능할지...
2006.0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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