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원주시

원주...흥법사지

임병기(선과) 2016. 10. 16.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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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법사지

역시 2006년 3월 마지막으로 들렸었다.

그때의 답사기를 본문 아래 부분에 덧붙인다.

 

 

"절터 서쪽 영봉산(靈鳳山)의 아랫자락에 있는 흥법사가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興法寺址는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 있는 寺址로 1984년 6월 2일에 文化財資料 제45호로 지정되었다.적연국사(寂然國師) 영준(英俊)이 932년(태조 15)에 이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이 곳에 있었던 진공대사 탑비에서 진공대사가 940년(태조 23)에 이 곳에서 돌아가셨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신라말에 거대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은 고려 태조가 흥법선원(興法禪院)을 만들어 진공대사에게 교화를 맡기자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인근의 정산리 거돈사, 여주 고달사 등과 더불어 고려 전반기의 선종계 절로서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高麗史) 』  세가(世家) 태조(太祖) 23년조에 「秋七月王師忠湛死樹塔于原州靈鳳山興法寺王親製碑文」이라고 하여 940년(고려 태조 23)에 이미 흥법사(興法寺)라는 절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어 이는 흥법사가 신라 때에 세워진 사찰임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권46 원주목(原州牧) 불우조(佛宇條)에는 “흥법사는 건등산(建登山)에 있다. 절에 고비(古碑)가 있는데 고려 태조가 친히 글을 짓고 최광윤(崔光胤)에게 명하여 당(唐) 태종(太宗)의 글씨를 모아서 모각(模刻)하였다.”라 하였고, 조선초의 문장가인 서거정(徐居正)의 시(詩)에는 「법천정하시제탑(法泉庭下詩題塔) 흥법대전묵타비(興法臺前墨打碑)」라 하였다.

 

이에 의하면 흥법사는 신라 때부터 고려시대까지의 거찰이었으며 『동국여지승람 』이 편찬된 1480년경(조선 성종 11)에도 흥법사는 폐사(廢寺)되지 않았고 진공대사탑비(眞空大師塔碑)도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흥법사가 폐사된 것은 명확한 자료가 없다.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시대 전기까지 절과 진공대사 탑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1693년(숙종 19) 이 곳에 도천서원(陶川書院)을 건립하였다가 1871년에 폐지하였다"...디지털원주문화대전

 

 

그 절터에는

삼층석탑

비신이 결실된 진공대사 부도비 귀부와 이수

석등대좌

숱한 인연들이 스쳐간 와편과 도자편

석축의 흔적들...

만행에 오른 부도와 비편

 

다녀간 님들의 글

서거정,이색,김구용.원천석

 

 

원주에 부임하는 민정을 보내다... 서거정/한국고전번역원

 

치악산중독서사雉嶽山中讀書寺 치악산 산중에 내 글 읽던 절 있었으니
소류력력기전시少遊歷歷記前時 젊어서 놀던 옛 시절이 역력히 기억나네

법천정하사제탑法泉庭下詩題塔 법천사 뜰아래는 탑에 시를 써 놓았고
흥법대전묵타비興法臺前墨打碑흥법사 대 앞에서는 비문을 탁본했었지 

당일행장려불만 當日行裝驢不滿 당시 행장은 나귀 한 바리도 다 안 찼는데
지금귀로몽선지至今歸路夢先知 지금 돌아가는 길은 꿈이 먼저 아는구나
백두미수중려흥白頭未遂重遊興 백발토록 거듭 놀고픈 흥취를 이루지 못해
送別悠悠攪我思 송별의 마당이 내 생각을 산란케 하는구려

 

 

삼층석탑

 

 

 

 

기단부 귀꽃과 안상

 

 

전각의 반전은 희미하다.

 

 

상륜과 탑신

노반석.탑신의 양우주

4단의 층급, 절수구, 낙수면의 깊은 물매

 

 

 

진공대사 부도비

비신의 일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다.

 

 

 

비신이 결실된 상태이다.

 

위에서 인용한 조선초 서거정(1420~1488)의 한시를 보면 비신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비문을 읽은 소회를 시로 남기기도 했다.

 

讀原州興法寺碑...서거정

당 태종의 글씨는 용이 꿈틀거린 듯하고 唐宗宸翰動龍螭
여 태조의 문장은 유부의 말과 흡사하네 麗祖奎章幼婦辭
오늘날엔 누가 그 탁본을 세상에 전해서 今日誰敎傳墨本
만지는 순간 귀밑털이 흰 걸 느끼게 할꼬 摩挲不覺鬢成絲

 

 

부도비문

고려국(高麗國) 원주(原州) 영봉산(靈鳳山) 흥법사(興法寺) 왕사(王師) 진공지탑(眞空之塔).
(결락) 신(臣) 최광윤(崔光胤)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당태종(唐太宗)이 짓고 왕희지(王羲之)가 쓴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새기다.


대개 들으니 부처님은 미언(微言)으로 교를 세워 비로소 취령(鷲嶺)에서 말씀을 열었으며, 가섭은 묘지(妙旨)로 심인(心印)을 전해 받고는 마침내 계족산(鷄足山)에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갔다. 비록 말로는 교리(敎理) 밖에 별도(別途)로 전하였다고는 하나, 그윽이 생각건대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을 함께 품수(禀受)하였다. 경희(慶喜)는 가섭의 제자가 되었고, 상나화수(商那和修)가 아난(阿難)의 법을 전해 받아 제3조(祖)가 되었다. 그로부터 제12조(祖)인 마명(馬鳴)에 이르러 아름다운 자취를 계승하면서 묘법(妙法)을 삼승(三乘)에 드리웠고, 제14조(祖)인 용수(龍樹)는 꽃다운 향기를 드날리면서 (결락) 보았다. 그가 주창한 법(法)은 즉상(卽相)이나 이상(離相)이며, 몸이 아니나 곧 몸인 것이다.

강급(降及)(결락) 처음으로 원각대사(圓覺大師)가 중국의 양조(梁朝) 때 들어왔고, 비로소 대홍(大弘)을 만났다. 달마는 양무제를 만난 다음, 북쪽 위(魏)나라로 가서 효명제(孝明帝)를 만났다. 그리하여 대조(大祖)인 혜가(慧可)를 만나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계합(契合)하여 동풍(同風)을 부촉하였다. 그로부터 조법(祖法)을 상승(相承)하되 심등(心燈)을 계승하여 대대로 이어져 단절되지 아니하였다. 그런 까닭에 일화(一花)가 훌현(欻現)함에 육엽(六葉)이 거듭 무성하였다. 근래 강서(江西 : 馬祖道一)로부터 해예(海裔)까지 흘러 들어왔다. 따라서 봉림가(鳳林家)의 제자요, 장경(章敬)의 증손인 우리의 진공대사(眞空大師)가 다시 선종을 천양하였다.

대사의 법휘는 충담(忠湛)이요, 속성은 김씨며, 그의 선조(先祖)는 계림(鷄林)의 관족(冠族)이고, 토군(兎郡)종지(宗枝)로서 분파(分派)되어 영광을 누렸으며, 상진(桑津)에 의해 별파(別派)로 갈라졌다. 원조(遠祖)는 다(多) (결락) 도잠(陶潛) (결락)이 벼슬에 얽매어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겠다 하였고, 가후(賈詡)와 같은 공을 세우기를 희망하였으나, 이것이 어찌 녹위(祿位)를 귀함이겠는가. 그러므로 고반(考盤)과 같이 도(道)를 즐겼다. 일찍부터 『장자』와 『열자』 등의 서적을 전공하였고, 초야에 살면서 은사(隱士)를 불러 같이 노래를 읊으며 시정(市井)과 조정(朝廷)의 명예를 피하였다. 모어(母於) (결락) 현지자(賢之子)이니 어찌 성선(聖善)마음을 닦음이 없었으랴! 이러한 영기(靈寄)로운 태몽을 감득하고는 훌륭한 아들을 낳기를 희망하던 중 함통(咸通) 10년 1월 1일에 탄생하였다. 대사는 나면서부터 남다른 특수한 모습을 가졌고, 어려서부터 농담은 전혀 하지 않았다. (결락) 초인적(超人的)인 영특한 성품(性品)을 가졌으며 신비한 지혜는 따를 자가 없었다. 괴시(槐市)에서 경을 배웠고, 행원(杏園)에서 과거(科擧)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부모가 관상 보는 사람을 불러 관상을 보였더니감라(甘羅)가 입사(入仕)하던 나이에 이르면 이름을 떨침이 헤아리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가의(賈誼)가 박사(博士)되던 나이에 (결락) 부모가 모두 사망하여 대사는 의지할 곳이 없는 고아(孤兒)가 되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장순선사(長純禪師)가 절로 데리고 가서 상좌를 삼아 득도(得度)시켜 사미계를 받게 하였으니, 이전부터 장순(長純)은 대사의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였다. 대사(大師)는 장순장로(長純長老)를 따라 거처를 얻어 (결락) 속진(俗塵)을 여의고 공문(空門)에 들어가 바야흐로 승위(僧位)에 올라 부지런히 정진 수도하여 승당도오(昇堂覩奧)하므로 입실건당(入室建幢)하게 하여 전법제자를 삼았으니, 이심전심한 사자(師資)의 정이 마치 고리처럼 연결되어 돈독하였다. 후배들이 빠른 걸음으로 뒤쫓아 와서 뒤에 출발하였으나,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적지 아니 하였다고 하였으며, 각(覺)의 지파(枝派)가 계속 이어지면서 먼저 시작하여 늦게 이룩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선림(禪林)에서 지내면서 (결락) 우유(優遊)하였다. 인도에서 발상한 불교를 거듭 중흥하여 마침내 계계승승의 법맥(法脈)을 이었다.

 능가(楞伽)인 선종이 재흥(再興)할 기회를 엿보면서 발원하여 오다가 용기 원년(龍紀 元年)무주(武州) 영신사(靈神寺)에서 비구계를 받고, 이어 법상종(法相宗)율장(律藏)을 연구하였다. (결락) 종지(宗旨)를 들어 도(道)를 토론하면서 학인(學人)들에게 이르되, “처마에서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도 계속 떨어지면 능히 돌을 뚫으며, 두 사람의 마음이 굳게 합쳐지면 능히 쇠도 끊을 수 있다”라 하였다. 이와 같이 불을 붙이려고 나무와 나무끼리 마찰하는 것과 같이 계속적인 노력과 병에 물을 쏟아 붓는 것과 같은 달통(達通)을 얻게 된 그 원인은 모두 적미(積微)와 같은 작은 일도 쉬지 아니하며,비록 규보(跬步)라도 계속 전진(前進)한 탓으로 마침내 학해(學海)의 공을 이룩하고, 길이 빛나는 (결락) 성취하였다. 석자(釋子)인 천일(天日)선사가 당시 전후 현실인 흉년과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산야(山野) 곳곳에 말라 흩어진 폭골(曝骨)아직 썩지 아니한 시신이 낭자한 광경을 보고 생각하되 “다른 산중(山中)들은 조용한 곳이 많으니 어찌 피난할 곳이 없겠는가. 이곳은 위험한 곳이므로 오랫동안 거주(居住)할 생각은 없었다.” (결락) 지화(之華) (결락) 자(者)와 같이 배를 타고 가서 피안(彼岸)에 도착하였다.

이 때 그 길로 곧바로 운개사(雲蓋寺)를 찾아가서 부원대사(淨圓大師)를 친견하였다. 대사(大師)는 구름 덮인 산골에 살면서 석상(石霜)의 법인(法印)을 전해 받고 학인을 지도하고 있었다. 지(知) (결락) 대사가 원이(遠離) (결락) 원남(圖南)의 웅지를 품고, 분지를 발하여 구름을 덮을 수 있는 날개를 펴고 견성성불하여 광도중생(廣度衆生)하려는 서원이 날로 향상하여 불일(拂日)하는 예장나무 가지높이 흔들 것을 알았다. 어느 날 대사가 이르되 “네가 이곳에 와서 유학(遊學)하되 마치 천우교목(遷于喬木)과 같이 다시 정진할 원력을 세워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 곳인 보소(寶所)를 떠나지 아니하고 (결락) 그 후 하동(河東)으로 가서 자악선원(紫嶽禪院)에 입방하여 처음부터 성전(聖典)을 연구하고 다시 우혈(禹穴)지방을 탐방하고, 그로부터 영적(靈跡)을 답사하는 행각을 시작하고서야 비로소 연대(燕臺)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천우(天祐) 15년 6월에 (결락) 이르러 귀국하게 되었다. (결락) 학인(學人)들이 함께 와서 친견하고 환희에 가득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손뼉을 치면서 앙모하였다. 그리하여 수월(數月) 동안 선(禪)을 논하고 수년간(數年間) 법문을 물어 왔다. 마치 미천(彌天)이 입을 벌리고 이왈(離曰)입술을 놀리는 것과 같아서 어로(語路)의 발단을 헤아리며, 언어(言語)의 단서를 잘 짐작하였다. 이 때 양지(兩地)에서 지난날의 자취를 생각해 보니, 마음이 (결락) 지광(之光). 갑병(甲兵)의 빛이 나타남을 걱정하다가 홀연히 김해를 떠나 옥경(玉京)을 향해 여러 날 만에 서울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마치 마륵(摩勒)이 다시 퍼진 것과 같을 뿐 아니라, 또한 우담바라가 한 번 나타난 것과 같았다.


공손히 내전(內殿)으로 맞이하여 모시고 (결락) 모든 중신과 궁내인(宮內人)들이 법문을 청함에 스님은 법상에 올라앉아 상왕(象王)의 설(說)을 토(吐)하니, 거듭 경의를 표하며, 제자(弟子)의 예의를 펴고, 들은 법어(法語)를 낱낱이 기록한 다음, 왕사(王師)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결락) 청정한 정려(精廬)로 옮겨 모셨다. (결락) 어느 날 다시 단겸(丹慊)을 떠나 경기(京畿)에 도착하였으므로 왕은 별도로 옥당(玉堂)을 꾸며서 승탑(繩榻)에 오르시게 하고 대사(大師)에게 묻되, “과인(寡人)이 어려서부터 위무(威武)는 숭상하였으나, 학문에는 힘을 쓰지 아니한 탓으로 선왕(先王)의 법도를 알지 못함이니, 어찌 (결락) 존망(存亡)의 뜻을 (결락)를 분별하겠습니까?”

 

 

 기쁘게 여기는 바는 명제(明帝)가 꿈을 꾸고 노력한 것과 같이 노력하지 않고도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마치 한(漢)나라 명제(明帝)인 세종(世宗)이 마등과 법란을 만남과,양(梁)나라 무제(武帝)가 보지공(寶誌公)스님을 만난 것도 이와 비교할 수 없다. 세세생생에 영원히 향화(香火)의 인연을 맺고 자자손손(子子孫孫)이 길이 부처님을 받들어 모시는 지극한 신심(信心)을 표했다. 그리하여 흥법선원(興法禪院)을 중건하고 스님을 여기에 주지(住持)토록 하였다. 이와 같은 길상지(吉祥地)가 오히려 지난날의 미덕(美德)을 논하게 되니, 복을 맞이하는 명당(明堂)임을 알게 되었다. 스님은 이곳을 세상을 마치려는 종신지지(終身之地)로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에 선원을 크게 확장한 후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구름과 같고, 배우는 사람들이 날로 진취됨이 마치 안개와 같았다. 의구(依舊)히 유리 (결락) 어국(於國) (결락) 모두가 불법 중흥주라는 말씀은 들었지만, 직접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어느 절에 가도 거절되고 더불어 말조차 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룻밤의 유숙도 허락받지 아니 하였으니, 어찌 대사(大師)가 평소에 이러한 편벽된 생각이 있었겠는가.


덕의 부유(富有)함은 (결락) 좌품(座品)의 (결락) 과 달랐다. 천복(天福) 5년 7월 18일 이른 아침, 문인들에게 이르되 “만법(萬法)은 모두 공(空)한 것이다. 나는 곧 세상을 떠나려하니 너희들은 일심(一心)을 근본 삼아 부지런히 정진하라”하고, 적연(寂然)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얼굴빛은 생전(生前)과 다름이 없었다. 세속 나이는 72세요, 승랍은 (결락) 이었다. 땅은 진동하고 산은 무너지며, 구름은 수심에 잠기고 해는 처참하였다. (결락) 그리하여 산곡(山谷)에는 애도와 슬픔이 가득하였고 사부대중(四部大衆)과 천인(天人)들은 모두 절학(絶學)의 슬픔을 더하였으니, 어찌 뼈에 사무치게 애통하지 아니하랴! 제방(諸方)의 사서(士庶)들은 모두 스님의 열반에 대해 울면서 통곡하였다. 따라서 과인(寡人)도 갑자기 열반 소식을 듣고 애통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간절히 스님의 크신 덕을 추모하여 마지못했다. 특히 종림(宗林)의 선백(禪伯)이고, 말세(末世)의 고황(古皇)으로 (결락) 긴 수명을 누리지 못하시고 뭇 중생의 우러름을 어겼도다.


대사(大師)는 설산(雪山)에서 성도하고, 연동(煙洞)에서 마음을 증득하여 18대(代)의 조종(祖宗)을 전하였고, 3천년의 선교(禪敎)를 통괄하였으니, 말세의 중생을 크게 교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광범하게 교화한 공적을 열거한다면 비록 황여(黃輿 : 地球)라고는 하나, (결락) 모든 향기는 사라지고, 문득 호접(胡蝶)의 마음을 끌어 일으키니, 수(水) (결락) 망기(忘機) (결락) 생전(生前)에 스님과 과인(寡人)은 마치 압구(狎鷗)처럼 친했던 감회를 일으키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교화(敎化)와 도덕이 무한(無限)함을 나타내고자 하니, 참으로 신독(身毒)의 풍속을 드날리고, 축건(竺乾)의 법을 부연한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문도 제자 5백여 명이 (결락) 신지속(身之贖). 높고 푸른 산이 깊은 골짜기로 변하고, 넓은 발해 바다가 (결락) 전답(田畓)으로 변할까 염려되어 나에게 진정(陳情)하여 비석을 세우려고 비문(碑文)을 주청하였다. 이어 여러 차례 상소하여 마침내 나는 윤허(允許)를 받았으니, 바라는 바는 스님의 무위덕화(無爲德化)를 나타내어 마치 물과 구름처럼 영원(永遠)히 썩지 않게 하려고 금석(金石)에 새기는 것이다. 애통한 마음으로 가능한 데로 제구(虀臼)를 지어 문인(門人)을 위로하고, 민(閔) (결락) 지심(之心). 아름다움을 백대(栢臺)로 돌리고, 국사(國士)들이 스님을 추모하는 뜻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에 명(銘)을 지어 가로되,
(결락)
(결락)

 (결락) 소인기(蘇認己)
보배를 감추고 법인(法印)을 알았네.
자비의 그 배는 풍랑(風浪)에 빠졌고
지혜의 등불은 그 빛을 잃었네.
은빛 난 석등(石燈) 불 영원히 비추리.
【陰記】
영봉산(靈鳳山) 고국사(故王師) 진공대사탑음(眞空大師碑陰)
대개 듣건대 은(殷)나라 탕왕(湯王)은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멸망시키고, 마침내 그물을 여는 것과 같은 인정(仁政)을 베풀었고, 양(梁)나라의 무제(武帝)는 (결락) 서축(西竺)에서 발상한 불교가 중국에 전래(傳來)된 이후, 유일(唯一)한 호법왕(護法王)일 뿐만 아니라 보지공(寶誌公)스님을 친견하고 마주 앉아 동방(東方)의 풍속을 이야기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불교가 널리 홍포되기 시작하였다. 위(魏)나라 손권(孫權)은 조신(朝臣)들을 모아 거마(車馬)로써 강승회(康僧會)스님을 맞아들여 존경하여 왕과 함께 동울(東菀)에서 놀았으며, 또한 같은 여(輿)를 타고 함께 다니기도 하였다. (결락) 우리나라에서도 삼한(三韓)이 각립(角立)하여 아직 누가 승리할 것인지 진위(眞僞)를 구별할 수 없었으나, 이젠 고려 일국(一國)이 웅비(雄飛)하여 문득 전쟁의 우열을 가렸고, 멀리에서 성덕(聖德)을 입고, 널리 (결락) 대사(大師)께서 표를 올려 아뢰기를, 전하는 정기가 사유(四乳)와 같고, 눈에는 두개의 눈동자가 빛납니다. 그러므로 이찰(梨察)은 원황(元皇)의 자리에 있었음이 마치 불도징(佛圖澄)이 후조의 고조인 석륵(石勒)의 귀의를 받음과 같다 하겠다. 그러나 오히려 (결락) 스님들은 시정(市井)에 내주(來往)하기를 싫어하고, 뜻이 산가(山家)의 울창한 숲 속에서 수행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도인(道人)은 곧 해국 해국(海國)의 고요한 곳에 주(住)하게 되었으니, 질질(秩秩)한 군자들이 불교에 귀의하기를 희망하였다. 련기(憐其) (결락) 대사께서는 이제 낙토(樂土)를 버리고, 깊은 산으로 들어가고자 커다란 일축의 글을 구중(九重)의 궁궐로 보내왔다. 과인(寡人)이 대사와 더불어 정(情)의 깊음이 아교와 칠보다 더하였고, 의리는 (결락) 동국을 불국화(佛國化)하려는 서원이었다. 흥법선원이 비록 고사(古寺)이긴 하나, 오히려 동방(東方)에 있어서 화상(和尙)의 생전(生前)에 길이 중생을 교화할 곳을 삼았던 절이다. 대사의
재가제자(在家弟子) (결락) (以下는 『金石苑』에 의함).
주반(州官)
통현상좌(通玄上座)
낭중(郞中)민회타(旻會朵) 광휴장로(廣休長老) 김순타(金舜朶)
시랑(侍郞)흥림타(興林㭐) 혜태장로(惠泰長老) 수영타(秀英㭐)
상타(上㭐) 신희타(信希㭐)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

 

 

원주 투데이(2005.03.21)...박 형 진(전 원주문화원장)

불타 없어진 흥법사는 오랜후에 도천서원(陶川書院)이 되었으나 불상(佛像)과 경당(經幢)이 아직도 계체와 진망(榛莽)사이에 있었으며 귀부(龜趺)외, 이수가 왜연(矮然)이 독립하고 있어 이끼를 제거하니 전액(篆額)이 완연(宛然)하여 가히 볼수가 있었다. 비석과는 관련없이 다만 진공대사(眞空大師)라고만 씌여 있었고 우거진 풀속에서 비를 찾아 보려 방황하였으나 끝내 그 비석의 소재는 알 수 없었다.

병진년(1856) 전국에 유명하다고 일컬어지는 이 비를 탁본하러온 오경석 선비는 “이 비석은 임진왜란의 난리에 왜구(倭寇)가 동쪽으로 수레에 싣고 갔는데 지금 원주에 잔석(殘石) 두편이 있다”고 하였다. 다음날 원주목치(原州牧治)에 이르러 학성관(鶴城館)의 동쪽에 있는 단석(斷石) 두편을 보았고 또 거민(居民)이 빨래하는 돌로 사용하는 작은 한편을 보았으나 마륵(磨勒)됨이 많았다. 애석하게도 한 관장(官長)이 함께 애호(愛護)함을 알지 못하니 매우 가히 개탄스러 웠다고 했다.

사가집(四佳集)에 독원주흥법사비(讀原州興法寺碑:원주의 흥법사 비를 읽고)를 보면,
당 태종의 글씨는 용과 이무기 움직이는 듯 고려 태종 문장은 묘한 말씀일세. 오늘에 누구로 하여금 글씨체 전할꼬. 어루 만지며 쓸쓸한 감회 깨닫지 못하네. 송제집(松薺集)에 원주흥법사비에는 옛절에 배를 골짜기에 감추었는데 누가 밤중에 도둑질 하였나.

이엉이 덮이지도 못하였고 바람과 비에 어렵게 버려졌네
천자(당태종)의 글씨 이무기와 용이 울고 임금의 글을 은하수를 근심하네. 동선(銅仙)은 일찍이 눈물이 있었으나 오직 장강 물에는 뿌리지 못하였네.


숭정(崇禎) 9년(1636) 조선 인조 14년에 강원관찰사로 부임한 조정호가 기록한 바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이 서예를 즐겼기에 체격과 기상이 화합하고 과법(필법의 하나)이 완연하여 순화첩등의 전하는 바와 서로 같아서 다름이 없으니 가령 중국의 금석문 중에 둘것 같으면 구양씨와 조명성 무리가 그 버릴 것인가.

대저 익재의 논평이 나오니까 나라 사람들의 청탁으로 고을에서는 탁본하느라고 분잡함을 견디지 못하였다. 서사가의 시에 “흥법대 앞에 먹으로 탁본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어떤 관리가 탁본하느라고 왕래하는 것을 귀찮게 여겨서 고을 관아에 옮겨 놓았는데 근년에는 무인이 이 고을에 영장으로 와서 곁에다 대장간을 설치하고 그 위에 쇠를 단련하니 돌이 깨어져 조각이 나고 글자가 또 깎이고 망가져서 온전치 못하였다.

역산의 백성들이 불을 놓아 진나라의 비석을 태운것과 함께 사문의 유한이 된다. 올해년 가을에 내가 강원도에 부임하여 이돌을 돈을 주고 찾았는데 간혹 주춧돌이나 담장 밑돌이나 다듬잇돌로 쓰는 것을 구했는데 크고 작은 것이 여덟조각이고 중앙에 두 조각은 끝내 구하지 못하여 고인으로 하여금 모양을 만들어서 그글로 대강은 읽을 수가 있었다. 나는 세월이 오래 갈수록 더욱 산실될까봐 두려워하여 객관 모퉁이에 조그만한 비각을 짓고 그 수를 기록하니 훗날 사람들이 오래도록 전하리라고 생각한다. 때는 숭정 9년 병자 4월이다.

 

**조정호 관찰사의 기록에 따르면 1636년에는 이미 비신이 깨어지고 망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진공대사 부도...국립중앙박물관

 

부도는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기본적인 형태로, 기단(基壇)의 아래와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다. 북모양을 하고 있는 가운데받침돌 표면에는 웅장한 구름과 함께 뒤엉켜 있는 용의 몸체를 생동감있게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의 모서리마다 꽃무늬가 장식되어 독특하고, 앞뒤 양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이 각각 새겨져 있다. 그 위로 얹혀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과 2중으로 된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다. 경사가 완만한 낙수면은 8각의 모서리선이 굵게 새겨져 그 끝에는 높이 솟아있는 꽃조각이 달려있다. 특히 낙수면에는 기와를 입힌 모양의 기왓골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처마 끝에 이르러서는 암막새, 수막새까지도 자세히 조각됨으로써 밑면의 서까래와 함께 당시 목조건축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꼭대기에는 8각의 작은 지붕모양의 머리장식인 보개(寶蓋)가 있다.

한편 탑의 왼쪽에 따로 놓여 있는 돌로 만든 함에는 불교경전과 함께 관련된 유물을 담아두었는데, 뚜껑까지 완전하게 남아있어 그 가치를 지닌다. 지붕의 윗부분을 수평으로 자른 듯한 뚜껑돌과 긴 상자 모양의 몸통으로 이루어진 이 함은 거의 완전하며 온화한 품위를 보여주고 있다. 두 유물의 조성연대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고려사』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 태조 23년(940)으로 추측된다...출처 문화재청 

 

 

 

 

진공대사 부도 석관...국립중앙박물관

 

 

운곡행록...운곡 원천석

(출처:http://blog.naver.com/sik6644/50047955083)

 

흥법사(興法寺) 대선사(大禪師) 성진(省珍)이 조계(曺溪) 행각(行脚)인 문진(文軫)과 사근(斯近) 두 사람이 지은 시 한 축(軸)을 사람을 시켜 내게 보내면서 시를 청하기에 차운하여 부침

 

경계가 고요하니 마음도 멀어지고

사람이 한가하니 도(道)도 더욱 높아지네.

두 사람이 뛰어남을 분명히 알면서도

가는 세월에 맡겨 몇 해를 보냈던가.

소나무 달 사이로 서늘한 밤 기운이 흩어지고

강물과 구름 사이에 봄 그림자 일렁이는데,

손님이 찾아와 좋은 시를 지으니

길게 읊조리면서 황혼에 서 있네.

 

온 강의 바람과 달빛이 솔문에 이어지고

만 골짜기 구름과 안개가 한 골로 모여들었네.

우뚝한 (불)상을 외로운 동산에 세우고

장엄한 불탑은 뜨락에 솟았네.

조계(曺溪)의 두 손님이 우연히 찾아왔으니

등 넝쿨 푸른 빛도 그대들 위해 움직이네.

주인과 나그네가 웃고 이야기하니

한가롭고도 담박하기가 구름 같구나.

만약 술을 사려면 도연명(陶淵明)을 끌어오고

셋이 웃으며 즐겁게 논다면 나도 함께 하리라.

이제부터 한 평생 숨은 이들을 사모하면서

그곳 향해 밤마다 맑은 꿈을 꾸리라.

 

201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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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시내를 벗어나도 눈은 그칠 줄 모른다. 그렇게 소망하던 눈내리는 겨울 폐사지를 만날 수 있음에도 즐거움 보다는, 가슴이 답답해 오니 야릇한 심사다. 얼마나 들리고픈 흥법사지 였던가. 거돈사지, 법천사지, 여주 고달사지와 더불어 남한강 유역 폐사지 답사의 메카이건만 이제서야 산문을 열어준다.

 

김제남 신도비를 거쳐 모퉁이를 지나니 멀리 삼층탑이 길손에게 손을 내민다. 폐사지는 여유롭게 멀리서 가능한 멀리서 바라보아야 하거늘 달구지는 거침없이 삼층탑까지 달려,  고려 태조 왕건의 지원으로 진공선사가 중건한 흥법사지 중정(?)에 이르니 눈발이 그쳐 눈 내리는 폐사지 정경은 또다시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원주 흥법사지

 

금당터 자리에는 허물어진 가옥이 황량함을 주지만 멀리 뒷산을 바라보니 허허롭던 절터가 금방 빛이 나는 까닭은 산봉우리가 본존불과 좌우 협시불인 삼존불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임란, 병란 을 거치면서 파괴된 절집이 숙종조에 도천서원이 자리했다니 파괴의 정도는 능히 짐작이 가고 남는다.

 

태조 왕건은 무엇때문에 심심산골 절을 지원했을까? 혹 불완전한 통일, 지방호족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이었거나, 선종 세력의  확대로 선종 가람과 손을 잡으려는 목적은 없었겠는가?

 

신라 유민 위무, 국가 통치 철학인 불교 단체 지원 등, 태조 왕건으로서는 일석삼조 유형의 효과를 기대하고 남한강변 사찰을 육성했다고 보는 것은 나만의 근거 없는 논리일까?

 

흥법사지 삼층탑

 

이중기단의 신라계 석탑으로, 기단 면석에는 안상속에 꽃이 만개해 있고, 1층 몸돌에 비해 2,3층 몸도 체감이 급격하며 상륜부에는 노반만 보인다. 삼층탑만 보아도 흥법사지의 창건연대 추론이 가능할 정도로 옥개석 받침, 탱주가 줄어 들었다.

흥법사지 석축


국보, 보물보다 못할 게 뭐냐? 튼실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랑스런 모습인 것을...


흥법사지 주추


부서지고 깨어지고 불에 타버린 기둥을 지켜보았을 주추는 그냥 말이 없다.

서원 창건, 일반 민가에 제짝이 팔려갈 때도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안으로 안으로 슬픔을 삭였겠지.


진공대사 부도비 귀부, 이수


왕실소속 장인의 작품이 분명한 진공대사 부도비 귀부, 이수는 힘이 있어 보이지만 여타 답사기에서 묘사한 아름다움을 못 느껴도 부끄럽지 않으니 건방이 극에 달했음이 분명하다. 

 

부도, 부도비는 일반적으로 사찰 서쪽에 조성되는데 진공대사 부도비는 가람 중앙지점에 현존하는 것으로 미루어 제위치가 아닐 것이다.귀부는 삼국통일 후 무열왕릉비에서 처음보이고, 고려에 이르면 용의 모습이며, 후에는 거돈사지 귀부처럼 아가미도 표현된다.

 

여의주를 입에 물고, 등에는 육각형 무늬 만(卍), 연꽃이 보인다,이수 중앙 제액에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주위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네마리 용을 조각하였지만, 어찌 내 눈에는 어지럽게 보이는지...

 

정지된 시간 속에서 떠남이 아쉽지 않은 폐사지 답사는 언제쯤 가능할지...

 

2006.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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