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원주시

원주...김제남 신도비

임병기(선과) 2016. 10. 15. 17:47
728x90

 

 

2006년 3월

당시에는 신도비를 거쳐 흥법사지로 진입하였으나 현재는 도로가 새로 개설되어 있었다.

 

 

 

신도비

귀부를 거의 180도 돌려 비석을 향하고 있다.

거북이 바라보는 방향은 김제남의 묘소라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답사에 동행한 어떤 분의 가정이 재미 있었다.

즉, 목을 쭉 빼내어 조성 하였을 경우와 비교하여, 공기가 단축되며, 경비도 절감될 것이라고 했다.

 

다른 분은

비두리 귀부와 연결하여 당시 원주지역의 트렌드로 추정하기도 했다.

 

인문학적 측면, 경제적 측면, 미술사적 측면....

 

이 또한 답사의 맛 아닐까?

 

 

 

 

신도비문 해석...출처/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http://cafe.daum.net/_c21_/home?grpid=1WDnJ)

 

유명 조선국 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행보국숭록대부영돈영부사연흥부원군 증시 의민공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行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延興府院君 贈諡懿愍公神道碑銘幷序)

 

숭록대부행이조판서겸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신 신흠이 명을 받들어 짓고

(崇祿大夫行吏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臣申欽奉敎撰)

숭록대부행호조판서 신 심열이 명을 받들어 쓰고(崇祿大夫行戶曹判書臣沈悅奉敎書)

숭정대부행지돈녕부사 신 김상용이 명을 받들어 전액하다(崇政大夫行知敦寧府事臣金尙容奉敎篆)

 

신(臣) 흠이 이미 교지(敎旨)를 받들어 공의 신도(神道)에 명(銘)을 하였는데, 그후 얼마 안 되어 또 공의 수도(隧道)에 지(誌)하기를 명하시므로, 삼가 그 가장(家狀)을 인하여 다음과 같이 편차한다.

 

공은 김씨(金氏)로 휘는 제남(悌男), 자는 공언(恭彦)인데, 신라(新羅)의 종성(宗姓)에서 나왔다. 그 선대는 직간(直諫)을 한 이가 있어 직간을 하다가 시염성(豉塩城)에 유배되었는데, 시염은 곧 연안부(延安府)이므로 자손들이 인하여 이곳을 관적(貫籍)으로 삼았다.

휘 섬한(暹漢)은 고려를 섬겨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었고, 그 후 4대에 이르러 도(濤)는 이색(李穡)에게서 배워 문과에 급제하고 원(元) 나라의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였으며, 자호(自號)한 나복산인(蘿葍山人)이란 네 글자를 공민왕(恭愍王)이 손수 써서 주기까지 하여 총애하였는데, 마침내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있다가 억울한 죄에 걸려 처형당했으므로, 사론이 그를 슬퍼하였다. 이분이 자지(自知)를 낳았는데, 자지는 개성부유후(開城府留後)를 지냈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이분이 해(侅)를 낳았는데, 해는 내자시 윤(內資寺尹)을 지냈고 찬성(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이분이 우신(友臣)을 낳았는데, 우신은 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호간(胡簡)이다.

 

이분이 전(詮)을 낳았는데, 전은 의정부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며, 깨끗한 지조가 있었는 바, 이분이 바로 공에게 증조가 된다. 조 휘 안도(安道)는 현령을 지냈고 찬성에 추증되었으며, 고 휘 오()는 사정(司正)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영의정이 두 번 장가들어 두 부인이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는데, 공은 두 번째 부인 권씨(權氏)의 소생이다.

가정(嘉靖) 임술년(1562, 명종17)에 공을 낳았는데, 공은 천품이 단정하였고 어릴 적부터 이미 뛰어나게 두각을 나타내어, 능히 스스로 뜻의 향할 곳을 변별하여 스승을 찾아가 배웠다. 남과 함께 거처할 적에는 온화하고 공손하고 신중하고 과묵하며, 여간한 일로 낯빛을 변치 않았고 칼로 찔러도 피부가 끄떡하지 않을 만큼 의지가 강하였으므로, 동료들의 추중을 받았다.

 

을유년에 진사가 된 후 10년 동안이나 문과 급제를 못하다가, 갑오년에 의금부 도사에 선수(選授)되고 이어 공조 좌랑에 승진되었다. 병신년에는 연천 현감(漣川縣監)이 되었는데, 때마침 왜적에 대해 경계할 일을 만나 명 나라의 장수와 사졸들이 줄을 이어 왕래함으로써 제군(諸郡)이 물품 징발로 인해 몹시 지쳐 있었는데, 공은 일을 처리하는 데 법도가 있어, 비록 급한 상황이었지만 공만은 여유 있게 처리하되, 공탕(公帑)에서 공급하지 못한 숫자를 사재(私財)로 보충하였다. 공은 또 검약으로 몸을 단속하고 하리들을 엄격하게 다스리니, 창고가 항상 가득 차고 호령이 막힘 없이 시행되었다.

 

정유년에 문과 별시에 급제하였는데, 공을 천거하여 대각(臺閣)으로 끌어들이자는 시의(時議)가 있었으나, 공이 남의 매개로 인해 진출하는 것을 싫어함으로써 공을 그 자리에 등용하지 못하였다. 이윽고 병으로 현감직을 해면하기를 청하고 돌아오려 하니, 백성들이 길을 막고 가지 못하게 만류하였다. 경자년에 체직되어 돌아오니, 이민(吏民)들이 공을 추모하여 비석을 세워서 덕을 칭송하였다. 신축년에는 사간원 정언ㆍ헌납, 사헌부 지평, 이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임인년에는 선조대왕이 공의 둘째 딸을 맞아 계비(繼妃)로 삼고, 공을 돈령부 도정에 초수(超授)하였다. 이 해 가을에 책례(冊禮)가 이루어지자, 품계가 보국숭록(輔國崇祿)에 올라 연흥부원군에 봉해지고 영돈령부사가 되었다. 그러자 공은 삼가고 두려워하고 겸손하여 마치 감히 감당치 못할 것처럼 하였다. 그 후 공주(公主)와 대군(大君)이 태어남에 미쳐서는 공이 더욱 존귀해졌으나 평소의 조행을 조금도 변치 않았고 외인과의 사귐을 단절하여 스스로 몸을 단속하고 입을 굳게 다물어 조정의 정사를 말하지 않았다.

 

공이 사귀던 사람들은 모두 한 시대의 청류(淸流)였는데, 공이 국구(國舅)가 된 이후로는 모두 사절하여 보냄으로써 누구도 공을 알현하러 내왕하지 못했다. 오직 친족들과 화목을 돈독히 하여 간소한 주연을 베풀고 청담을 나누면서 화락하게 서로 즐기기를 마치 포의(布衣) 시절과 같이 하였다. 그리고 혹 공을 인연하여 관록(官祿)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공이 그의 인품에 따라 천거하였고, 혹 천거를 안 해준다 하여 불만스럽게 여기는 자가 있으면 공이 문득 억제하여 말하기를 “예전에 귀척(貴戚)이 제멋대로 벼슬을 함으로 인하여 불초한 자제들이 제 선조에게 누를 끼친 일이 많았으니, 내가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 항상 말하기를 “청백(淸白)은 우리 집안의 세업(世業)이니, 내가 비록 불초하지만 혹시라도 감히 청백을 떨어뜨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므로 공가(公家)의 재물을 전혀 간섭한 바가 없었고, 전후로 직무를 이행하는 데 있어서는 시종 게으름 없이 한 마음으로 하였다.

 

공은 3세 이전에 부친을 여의고 종조모(從祖母) 강씨(姜氏)에게서 양육을 받았으므로, 공이 강씨 섬기기를 마치 모친 섬기듯이 하였고, 강씨가 별세하자 상제(喪制)를 깍듯하게 준행하였다. 모부인이 질병을 앓을 적에는 공이 울면서 음식을 먹지 않았고, 상을 당해서는 지나치게 슬퍼하다 몸이 몹시 야위어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설 수 있었으며, 여묘살이 3년 동안에 게으른 태도를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비록 피란 중에 있을 때라도 제사지내는 일을 더욱 중히 여겨, 근심하고 불안해하며 삼가고 정성스러운 태도를 법도와 같이 하였고, 휘일(諱日)을 만날 때마다 그달 초하루부터 주육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귀하게 되어서는 좋은 음식과 거처로 부모를 봉양할 수 없게 된 것을 몹시 슬퍼하여 항상 어린애처럼 부모를 사모하였다.

 

형과 손윗누이를 섬기는 데 있어서는 한결같이 하여 간격이 없게 하였고, 분가(分家)할 적에는 형과 누이의 하는 대로만 따랐을 뿐 자신은 관여하지 않았다. 남매들끼리 항상 한 솥에 밥을 지어먹고 한 집에 거처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갈라 먹고 사소한 것도 나누어 먹었으며, 차마 혼자만 배부르게 먹지 않았다. 누이의 병이 위독했을 적에는 공이 분주하게 간호하느라 자신의 발이 갈라져 피가 흐르는 줄도 몰랐다. 공의 아들들이, 공이 밤새도록 병 간호하는 것을 보고는 자기들이 대신하기를 청하자, 공이 이르기를 “나와 누이가 다 노쇠하였으니, 비록 길이 누이를 모시고자 한들 그렇게 되겠느냐.” 하였다. 또 한 누이가 남편과 함께 병화(兵禍)에 죽었으므로 고아들을 어루만져 기르되 할 수 있는 데까지 마음을 다하였고, 여러 조카들을 시집보내고 장가들이는 데 있어서도 넉넉하고 모자람을 불문하고 모두 자신이 주선하여 처리하였다.

 

나라에서 받은 봉록은 친구들에게 두루 나누어 주었고, 친구들의 상을 만났을 경우에는 마치 미처 하지 못할 것처럼 허둥지둥 급히 달려가 돌보아주곤 하였다. 그리고 자제들에게 경계하기를 “모든 사람의 교만하고 사치하는 것은 대부분 부귀로 말미암은 것이니, 높고 탁 트인 고대 광실에 거처하는 것을 마치 오막살이에 사는 것처럼 여기고, 가볍고 따뜻한 갖옷 입는 것을 마치 솜둔 베옷을 입은 것처럼 여겨서 행여 이런 것으로 남에게 교만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공은 평소에 굵은 베로 지은 순색(純色) 옷을 입기 좋아하였고, 주색(酒色)ㆍ성기(聲妓)ㆍ완호(玩好)ㆍ구마(狗馬)와 진기하고 호사스럽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마음에 둔 적이 없었으며, 수레와 의복과 저택은 그런대로 갖춘 정도일 뿐이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당(堂) 하나를 집 뒤에 짓고 혼자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서(圖書)와 화죽(花竹)을 보며 담박하게 지냈다.

 

만력(萬曆) 정미년(1607, 선조40)에 선조대왕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간신(奸臣) 이이첨(李爾瞻)이 정인홍(鄭仁弘)을 사주하여 소장을 올려 조정에 불화의 단서를 만들었는데, 무신년에 선조대왕이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여서는 이이첨의 간악한 꾀를 써서 큰 옥사를 일으켜 동기간들을 죽였다. 계축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영창대군(永昌大君)까지 핍박하여 죽이고, 공은 하옥된 지 1개월을 넘어서 사사(賜死)되었으며, 모후(母后 인목대비(仁穆大妃))는 감금한 채로 폐출(廢黜)하자는 의논이 결정되었다. 병진년에는 공의 무덤을 파헤쳐 저자에서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고, 공의 부인은 탐라(耽羅)에 구류하여 8년 동안 위리안치(圍籬安置)시켰다.아, 공이 화를 당한 때가 이해 6월 1일이었는데, 나이는 52세였다. 공의 부인 노씨(盧氏)는 광주(光州)의 대성(大姓)으로 아무개[某]의 딸인데, 순수한 덕과 유순한 의용이 있었다.

 

3남 2녀를 길렀다. 장남 내(琜)는 청주 목사(淸州牧使)이고, 차남 규(珪)는 진사였는데, 계축년에 모두 옥중에서 죽었다. 장녀는 현감 심정세(沈挺世)에게 시집갔는데 먼저 죽었고, 그 다음이 바로 우리 왕대비로서 정명공주(貞明公主)와 영창대군을 길렀다. 목사는 군수 정묵(鄭黙)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주륙(周六)ㆍ주칠(周七)이고, 장녀는 김광찬(金光燦)에게, 차녀는 최여량(崔汝良)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진사는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다. 현감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남은 진(榗)이고, 여는 백홍일(白弘一)에게 시집갔다. 내외 증손 남녀가 몇 명 있는데, 모두 어리다. 집안 사람들이 처음에 공을 아무 고을 아무 언덕에 장사지냈다가 이때에 이르러 아무 고을 아무 언덕에 옮겨 안장하였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전하께서 어지러움을 평정하여 바른 세상으로 회복시킨 다음 가장 먼저 모후(母后)를 복위시키고 원흉을 죽여 없앴으며, 억울하게 죄 입은 사람들을 신설시키고 공의 관작을 복구하였으며, 예에 따라 공을 개장(改葬)시키고 공의 부인을 탐라에서 맞아와 광산부부인(光山府夫人)으로 봉하였다. 비색한 운수가 극에 달하면 다시 형통한 운수가 오고 박(剝)이 다하면 복(復)이 오는 법이기에, 천지의 귀신이 묵묵히 도와주고 조종(祖宗)의 영혼이 은연중에 돌아보아줌으로써 하늘의 떳떳한 이치가 수립되고 사람의 윤기가 이어지게 되었으니, 이 또한 천도가 변하지 않는 증험이리라. 다음과 같이 명한다.

 

 

인자하고 성실한 성품이며 /子諒之性

어질고 후한 자질로 / 仁厚之質

피아의 간격을 두지 않았고 / 去畦與畛

성실과 순일함에 심신을 붙였네 / 宅乎誠一

복을 얻는 것이 당연하거늘 / 得福爲恒

그것이 도리어 재앙의 매개가 되었더니 / 而福之媒

천리는 본디 정해짐이 있고 / 天固有定

세상 운수는 순환하는 것이라 / 世運環回

성스러운 임금이 나시어 / 聖人有作

강상을 다시 이으실세 / 綱常復續

벼슬 복구시키고 예로 장사지냈으니 / 官復葬禮

성상의 돌보심이 이에 도타우셨네 / 睿眷斯篤

행실이 시법에 응하리니 / 行應名法

이는 오직 성상께서 명하시리라 / 惟上有命

우선 이렇게 광중에 기록하여 / 誌之於幽

후손들에게 고하노라 / 詔此來姓

 

1625년(인조 3) 9월 일 에 세우다

 

金悌男神道碑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行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延興府院君 贈諡懿愍公神道碑銘幷序

 

崇祿大夫行吏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臣申欽奉敎撰

崇祿大夫行戶曹判書臣沈悅奉敎書

崇政大夫行知敦寧府事臣金尙容奉敎篆

 

臣欽旣奉敎銘公神道矣。未幾。又命欽誌公幽隧。臣欽謹因其家狀而次之曰。公金氏。諱悌男。字恭彥。出自新羅宗姓。其先有直諫者謫豉鹽城。豉鹽卽延安府也。子孫仍籍焉。有諱暹漢。事高麗爲國子博士。四代而濤學於李穡。擢文科。登元朝制科。自號蘿葍山人。恭愍王手書以寵之。竟以密直提學。坐非辜伏法。士倫哀之。是生自知。開城府留後。諡文靖。是生侅。內資寺尹。贈贊成。是生友臣。知中樞府事。贈領議政。諡胡簡。是生詮。議政府領議政。諡忠貞公。有淸操。於公爲曾祖。祖諱安道。官縣令。贈贊成。考諱祦。司正。贈領議政議政。娶再室。俱封貞敬夫人。公後夫人權氏出也。嘉靖壬戌生公。公稟質端方。自稚歲已嶄然見頭角。能辨志就學。與人處。溫恭愼默。不失色。不膚撓。爲儕流所重。乙酉。進士。滯於公卓者十載。甲午。選授義禁府都事。陞工曹佐郞。丙申。出監漣川。時當倭警。天朝將士絡屬。諸郡疲於徵發。公乃處之有方。雖在倉卒。獨能靜暇。公帑所不給者。取私藏以補之。約以持己。嚴以馭吏。稟庾充實。號令不閡。丁酉。捷文科別試。時議有欲尉薦援置臺閣者。公不喜媒進。不果用。俄以病丐解。民遮道留之。庚子遞歸。吏民追思。豎石頌德。辛丑。司諫院正言獻納。司憲府持平。吏曹佐郞。壬寅。宣祖大王聘公第二女爲繼妃。超授公敦寧府都正。秋。冊禮成。進階輔國崇祿封延興府院君領敦寧府事。公兢兢退遜。如不敢當。及公主大君生。公益尊貴。而素履不少渝。絶外交目守。杜口不言朝政。公之所與交。皆一時淸流。而自爲國舅皆謝遣。未嘗造請來往。唯與親族修睦。淸談少酌。衎衎相樂如布衣時。其有夤緣干祿者。公隨其人品薦之。或有不滿。公輒抑之曰。前世貴戚。妄官不肖子弟。累其先祖者多矣。吾何可不愼。又恒言淸白吾家世業。吾雖不肖。敢或闕墜。故公家羨餘。一無所問。前後莅職。一心不懈。公孤未三歲。養于從祖母姜氏。公事之如事母。姜氏歿。克遵喪制。母夫人疾病。公涕泣不食。遭喪致毀。杖而後起。廬墓三年。未見有惰容。雖在避兵中。尤重祀事。悒怏虔愨如度。每遇諱日。自月朔不御酒肉。旣貴。痛鼎茵不逮。常爲孺子慕焉。事兄事姊。一而無間。其析著也。聽兄姊之爲。己無與焉。同爨而食。同室而居。折甘分少。不忍獨飽。姊病。公奔救。不覺折趾流血。公之諸子。見公終夜侍疾。請身代之。公曰。吾與姊俱衰矣。雖欲長侍姊得乎。復有姊與夫歿於兵禍。撫養其孤。無不至。諸姪嫁娶。無問饒乏。悉經紀之。所捧秩祿。遍分親故。如値死喪。匍匐如不及者。誡諸子曰。凡人驕侈。鮮不由富貴。居高明如茅茨。被輕暖如縕袍。愼無以是驕人。平生好服大布純色衣。酒色聲伎玩好狗馬奇奢華美。無所留心。車服垣屋。苟完而已。搆一小堂於宅後。獨處其中。圖書花竹。淡如也。萬曆丁未。宣祖大王疾革。有孼臣李爾瞻者。嗾鄭仁弘上章搆釁朝廷。戊申。宣廟棄群臣。光海嗣位。用爾瞻奸計。起大獄戮同氣。至癸丑。遂及永昌大君逼殺之。公下獄逾月論死。幽母后定廢黜之議。丙辰。發公藏。肆諸市。錮公夫人于耽羅。栫之以棘者八年。嗚呼。公之遇禍。是年六月一日也。年五十二。公夫人盧氏。光州大姓。某之女。有純德婉儀。育三男二女。男長曰琜。淸州牧使。次曰珪。進士。癸丑。俱歿於獄中。女長適沈挺世。先歿。次卽我王大妃。育貞明公主,永昌大君。牧使娶郡守鄭默女。生二男三女。男曰周六,周七。女長適金光燦。次適崔汝良。次未行。進士娶達城尉徐景霌女。生一男。縣監生一男一女。男曰榗。女適白弘一。內外曾孫男女若干人幷幼。家人初葬公於某邑某原。至是遷厝於某邑某原。恭惟我主上殿下撥亂反正。首復母后之位。誅除巨慝。伸雪冤枉。復公舊秩。改窆公以禮。迎公夫人于耽羅。封光山府夫人。否極則泰。剝盡而復。神祗默祐。祖宗陰騭。天彝立矣。人紀續矣。其亦天道之不忒也夫。銘曰。

子諒之性。二厚之質。去畦與畛。宅乎誠一。得福爲恒。而禍之媒。天固有定。世運環回。聖人有作。綱常復續。官復葬禮。睿眷斯篤。行應名法。惟上有命。誌之於幽。詔此來姓。

 

天啓五年乙丑九月日立石

 

 

 

2016.09.24

====================================================================================================================

떨어지지 않은 발길을 돌려 나오면 오래된 노거수 아래에 대리석 비신을 갖춘 비석이 보인다.

심하게 마모되어 글은 보이지 않지만 선조 비인 인현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의 신도비다.

 

김제남 신도비

 

 

金悌男.1562(명종 17)~1613(광해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언(恭彦). 증조부는 영의정 전(詮)이며, 아버지는 증(贈)영의정 오이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4년 의금부도사·공조좌랑을 거쳐, 1596년 연천현감을 지냈다.

 

1597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1601년 정언·헌납·지평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1602년 둘째딸이 선조의 계비(繼妃:인목왕후)가 됨으로써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공격을 받고 처형되었다.

 

1616년에 폐모론이 일어나면서 그 죄가 재론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뒤에 복권되었으며 왕명으로 사당이 세워졌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의민(懿愍)이다.


신도비 귀부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2년에 세운 신도비로 거북이 목을 돌려 비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이채롭다.조선 인조 2년(1624)에 세운 비로, 왕의 명령으로 그의 사당을 지을 때 함께 세워두었다 한다.
 

 

仁穆王后

1584(선조 17)~1632(인조 10).조선 제14대 왕인 선조의 계비(繼妃).

 

영돈녕부사 김제남(金悌男)의 딸이다. 1600년(선조 33)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죽자, 1602년 왕비에 책봉되었다.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자 왕위계승을 둘러싼 문제가 발생했다.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小北)은 당시 세자인 광해군이 서자이며 둘째 아들이라 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대북(大北)은 광해군을 지지하여 당쟁이 확대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이 정권을 잡았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李爾瞻) 등이 반역죄를 씌워 영창대군을 폐서인시킨 뒤 죽였으며 김제남도 사사시켰다. 1617년 삭호(削號)당하고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호(復號)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글씨에 뛰어나 직접 쓴 〈보문경 普門經〉 일부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전한다. 1604년에 소성(昭聖), 1610년 정의(貞懿), 1624년(인조 2) 명렬(明烈)의 존호가 올려졌다. 휘호는 광숙장정(光淑莊定)이다. 능은 양주에 있는 목릉(穆陵)이다.

  

계축일기

인목대비 폐비 사건에 얽힌 궁중 비사를 기록한 글.

1책. 필사본. 지은이는 인목대비 측근의 궁녀로 추정되나 인목대비 또는 정명공주(貞明公主)의 작품이라는 설도 있다. 낙선재본 〈계?M일긔〉와 홍기원본 〈서궁일기〉 2가지가 전하며 이전의 원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목대비는 19세에 선조의 계비가 되어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낳았다. 공빈김씨의 소생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으나 늘 영창대군을 경계했다. 선조가 죽자 광해군이 즉위하였는데, 친형 임해군(臨海君)을 죽이는 등 주변을 의심하며 많은 옥사(獄事)를 일으켰다.
 
계축년(1613, 광해군 5)에 이이첨(李爾瞻)이 서양갑(徐羊甲) 사건에 연루된 박응서(朴應犀)를 꾀어,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역모를 꾀한다고 무고(誣告)하도록 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제남 부자와 영창대군은 죽음을 당하고 인목대비는 경운궁(慶運宮)으로 쫓겨나 폐비가 되었으며, 온갖 고생을 하다가 11년 뒤 인조반정으로 복위되었다는 내용이다.
 

조선 중기 궁중의 풍속과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순 우리말로써 우아한 궁정어와 문체를 구사하였다. 3인칭 시점으로 서술했고,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에 대해서는 극존칭을 사용하였다. 모든 일을 실제 보고 들은 듯이 기록했으며, 대화 부분을 특히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광해군을 규탄하고 인목대비를 옹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숨겨진 의혹을 풀어주는 읽을 거리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예전에 읽었던 "한국 지명의 신비"(?) 글 내용중에 강화도 살창리(殺昌里)라는 지명이 생각난다. 고려 창왕(昌王)과 영창대군(永昌)이 살해된 곳이라 살창리라고 불려지며, 영창대군이 죽은 음력 2월 9일을 전후하여 내리는 비를 '살창우(殺昌雨)라고 한다.

   

경남 합천 묘산 소나무(2006년 12월 촬영)

 

이런저런 사연을 간직한 소나무가 지금도 푸르름을 뽐내며 경남 합천에서 자라고 있다

 

 

 

합천 묘산면의 소나무는 해발 500m 정도 되는 곳에 위치한 화양리 나곡마을의 논 가운데 서 있으며 나이는 5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17.7m, 둘레 6.15m의 크기로 가지는 2.5∼3.3m 높이에서 갈라져 다시 아래로 처지 듯 발달하였는데 그 모습이 매우 독특하고 아름답다.

 

나무 껍질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고 가지가합천 묘산면의 소나무는 해발 500m 정도 되는 곳에 위치한 화양리 나곡마을의 논 가운데 서 있으며 나이는 5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17.7m, 둘레 6.15m의 크기로 가지는 2.5∼3.3m 높이에서 갈라져 다시 아래로 처지 듯 발달하였는데 그 모습이 매우 독특하고 아름답다. 나무 껍질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고 가지가 용처럼 생겼다 하여 구룡목(龜龍木)이라고도 한다.

연안 김씨의 후손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광해군 5년(1613)에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고 역적으로 몰려 3족이 멸하게 되자 김제남의 6촌벌 되는 사람이 도망와서 이 나무 밑에 초가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마을을 지켜주는 나무로 여기고 오랫동안 보호해 왔으며, 민속적·역사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문화재청

 

06.03.13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