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안양시

안양...안양사 귀부. 부도

임병기(선과) 2016. 8. 4.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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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시 지명유래를 가져온 안양사는 신라 효공왕 3년(900년)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을 정벌하러 지나다 삼성산에 오색구름이 채색을 이루자 이를 이상히 여겨 가보던 중 능정이란 스님을 만나 세워진 사찰이로전해진다.  고려조의 문신 김극기의 시를 비롯 여러 수의 글이 전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고려때 최영장군이 7층 전탑塼塔을 세우고 왕이 내시를 시켜 향을 보냈으며 승려 천명이 불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에 중초사지 터에서 발견된 안양사 명문 기와편, 전편 등을 통하여 안양사의 위치와 위상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폐사에 관한 기록과 시기는 전하지 않는다.

 

 

현재의 안양사는 안양사지 뒤편 마애종에서 이어지는 산길을 쉬엄쉬엄 따라가면 된다.

 

 

대웅전 삼존불

 

 

안양사지 부도

탑신, 중대석은 결실되었다.2단의 팔각 하대석 상부에는 탑신괴임처럼 복련이 조식되었고 각 모서리에는 귀꽃으로 장식하였다. 앙련이 투박하게 표현된 상대석은 뒤집혀진 상태이다. 팔각 옥개석은 지붕의 골은 깊고 처마의 반전이 심하다. 모서리에는 선각으로 화문을 조식하였다. 상부에는 1단 괴임위에 보주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결신 되었다. 부도의 주인공은 전하지 않으며, 고려초기의 보소국사 부도라는 글이 검색되지만 구체적인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안양사 앞 골짜기에 산포해 있던 부재를 수습하여 쌓아 놓았다고 한다.

 

 대석

 뒤집힌 상대석

 옥개석

 상륜

 

 

안양사 귀부龜趺

비신과 이수는 결실되고 귀부만 남아 있다. 지대석 위에, 굄대와 귀부는 한 개의 돌이다.민초들의 기자신앙 때문에 훼손된 불상처럼 코가 결실되었다. 볼에는 갈귀를 표시하였다. 등에는 육각형 귀깁문을 촘촘히 새겼고, 꼬리는 옆으로 가지런하게 새겼다. 중앙에는 장방형의 비좌를 두었다. 비좌 측면에 장방형의 액額을 마련하고 운문을 조각하였으며, 상면에는 복련이 조식되어 있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귀부로 추정한다.

 

 

"귀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글을 짓고 명필 이원부가 쓴 비문이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라는 자료가 여러 사이트에 검색된다. 안양시 홈페이지에는 "1131( 9) , 비"로 등재되어 있으며, 문화재청 한국의사지에도 안양사칠층전탑 중수비 귀부로 기술하고 있다.


더군다나 비편의 일부가 실려 있는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도 칠층전탑중수비로 추정하고 있다.

 

李元符  奉  宣書」
吾從成佛已來種種因緣」
矛盾論議紛然使學者亡」
以爲終華嚴如實亦四」
姓高氏東州伊川人也父」
至東始小終大覺而語之」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이원부(李元符)가 삼가 선지(宣旨 : 임금의 명령)를 받들어 글을 적는다. (결락)
내가 성불(成佛 : 석가모니)을 따른 이래로 종종(種種)의 인연(因緣)이 (결락)
모순(矛盾)된 논의(論議)가 분연(紛然)하여, 학자들로 하여금 (결락)
마침내 화엄(華嚴)이 여실(如實)해지게 되었다. (결락)
성(姓) 고(高)씨는 동주(東州)의 이천인(伊川人)이다. 부친께서 (결락)
동쪽에 이르러 처음에는 미미했으나 마침내 크게 깨달으셨다고 말씀하셨다. (결락)

 

위의 비편 내용이 전탑중수비?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새잉적으로는 부도비에 새겨진 화엄, 관향(이천인), 대각 등의 명문으로 추론컨데 부도비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부도와 귀부는 1131년 경에 입적한 고승의 부도와 부도비로 생각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보소국사가 그 주인공인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참고로, 최영장군의 칠층 전탑중수에 관한 기록도 도은 이숭인李崇仁(1349~1392)이 지은 금주안양사탑중신기衿州安養寺塔重新記에 실려 있으나 중수비에 관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7층 석탑은 고려 왕건이 비보묘탑설에 의하여 능정스님과 금주현에 세웠다 탑은 절의 남쪽에 있으며 층마다 기와가 덮여 있고 탑 아래층의 둘레가 열 두 간이다 벽마다 부처님과 보살 천인상이 그려있다 고려 우왕 7년에 안양사 스님 겸이 최영장군에게 무너진 탑을 이야기 하자 최영장군이 같은 해 8월에 기공식을 하고 10월에 낙성식을 하였다 낙성식 때 왕이 내시 박원계를 보내어 향을 내리고 사리 12과와 부처님 치아 사리 1과를 탑 가운데에 모셨다 낙성식에 명의 스님이 불사를 올리고 3000명의 재가 신자가 보시하였다 1382년 3 월에 단청을 입히고 8월에 탑 안의 사방 벽에 약사회와 석가열반회 미타극락회 금강신중경을 그렸다 또 회랑12간 벽에는 십이행년불을 그려 넣었다."

 

 

 

 

 

 


부도의 주인공?

어느날  문득 비신이 나투실 날을 기다려 보자.

 

201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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