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기억이 새롭다. (주)유유산업 공장으로 들어와 사진 좌측에 보이는 경비실(?) 아저씨에게 정중히 양해를 구한 후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을 뵈었었다(답사기를 찾아보니 2009년 3월이었다). 하지만 그 이전인 2007년 안양시에서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목적으로 공장부지를 매입하였으며, 2009년 부터 발굴조사를 시작하였다.
2009년 나의 답사도 당간지주와 석탑을 뵌 후 마애종, 귀부,부도로 발길 돌렸었다.
중초사지 오늘도 그렇게만 알고 들렸었는데 안양사지로 다가온다.
중초사지는 절터의 당간지주에 새겨진 명문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중초사터로 알려졌으며, 경주 황룡사와 관련인 있었던 사찰로 추측한다.
寶曆二年歲次丙午八月朔六辛丑日中初寺東方僧岳一石分二得 보력(寶曆) 2년(826) 세차 병오년 8월 초엿새 신축일에 중초사(中初寺) 동쪽의 승악(僧岳)에서 돌 하나가 갈라져 둘이 되었다. 同月廿八日二徒作初奄 九月一日此處至 丁未年二月卅日了成之 같은 달 28일에 두 무리가 일을 시작하였고, 9월 1일에 이에 이르렀으며, 정미년 2월 30일에 모두 마쳤다.
節州統 皇龍寺 恒昌和上 上和上 眞行法師 貞坐 義說法師 上坐 年嵩法師 절주통(節州統)은 황룡사(皇龍寺)의 항창(恒昌)화상이다. 상화상(上和上)은 진행(眞行)법사이며, 정좌(貞坐)는 의열(義說)법사이다.
당간지주 명문
안양사 가람배치도
그런데 안양사지가 발굴이 되었고,(주)유유산업 공장동을 설계한 건축가 김중업 박물관과 안양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안양사지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답사 이전에 안양시에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 효공왕 4년(900)에 금주(시흥)와 과주(과천)등의 지역을 징벌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게 되었다.
도은집의 금주안양사탑중신기에는 안양사의 창건과정이 신령스러움과 함께 불법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탑이 세워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후에도 안양사는 대각국사국사 의천(1055-1101)의 안양사예능정승통영(安養寺藝能淨僧統影)에도 보이며, 고려말 최영장군이 7층 전탑塼塔을 세우고 왕이 내시를 시켜 향을 보냈으며 승려 천명이 불사를 올렸다고 전하며,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태종 11년(1411년)에 왕께서 충남 온양으로 온천욕을 하러 가던중 안양사에 들렸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문헌상만으로 알려진 안양사는 2008년 4월~2011년까지 4차례 발굴 결과 승방지에서 안양사 명문의 와편, 전탑지와 벽돌이이 출토되어 이곳이 안양사였음이 밝혀졌다. 발굴조사 결과 안양사지의 가람배치는 고대 가람 배치 형식인 남쪽에서 북쪽으로 중문 - 전탑 - 금당 - 강당 - 승방으로 이어짐을 확인되었다.
답사객들이 익히 알고 있겠지만 안양사 명문이 발굴되어 당간지주와 시대를 달리했던 삼층석탑, 마애종의 조성시기가 고려시대 안양사터의 불적임이 밝혀졌다.또한 중초사지 옛터위에 안양사가 세워졌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로서 안양의 지명은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 안양은 극락정토의 세계로 모든 일이 원만구복하여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없는 자유롭고 아늑한 이상향의 세계 의 다른 이름이다.
괘불지주일까?
안양사 남회랑지
중문지
전탑지
금당지
강당지
강당지
안양사 칠층전탑에 대한 고찰...2007년.단국대 김지석
"경기도 안양시에 소재한 안양사는 고려초 태조 왕건이 능정이란 스님을 만나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또한 안양시의 지명유래가 시작된 곳으로 아미타불의 정토신앙이 담긴 안양세계의 이상향을 간직한 사찰이다. 문헌에 의하면 안양사에는 태조 왕건이 건립한 안양사칠층전탑이 있어 일찍부터 많은 선학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특히 안양사칠층전탑은 여주 신륵사다층전탑과 함께 경상도 지역을 벗어나 조성된 고려시대 전탑이다. 아울러 탑에는 회칠과 함께 채색을 하였다는 내용이 있어 주목을 끌게 한다. 종파적으로 안양사는 고려시대 법상종 사찰로 왕실 및 중앙의 지배층과 고려후대 까지 지속적인 연관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안양사는 불교를 건국이념으로 하는 왕건과 능정의 정치적 이해 관계 속에 창건 되었으며 안양사칠층전탑은 비보풍수에 의한 사탑으로 조성되었다.
그리고 석탑이 아닌 전탑으로 조성된 이유는 신라계 승려인 능정의 주도하에 문화적 회귀라고 하는 고려초 조탑에 흐름으로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안양사칠층전탑은 옥개석 낙수면에 기와를 덮어 외형에 있어 안동의 신세동과 동부동의 전탑과 유사성을 지녔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회칠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일군의 모전석탑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으며 문헌상으로도 백탑의 존재가 기록되어 보편적인 조탑 기술에 하나로 평가된다. 따라서 안양사칠층전탑은 회칠을 하고 다양한 채색으로 불보상을 그림으로 경외감과 장엄함을 한층 강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안양사칠층전탑은 1131년 (고려 인종 9년) 또 한 차례의 중수를 거쳐 고려시대 후대에 이르러 최영에 의하여 두 번째 중수를 하게 된다. 최영은 안양사칠층전탑 중수를 성조 즉, 태조의 국가 경영을 우러러 생각하고 탑을 새롭게 하지 않을 경우 성조의 영에 죄를 짓는 것이라 맹세하며 군비를 털어 중수를 할 정도로 깊은 관여를 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고려 말 기울어져가는 국가와 왕실의 권위를 안양사칠층전탑을 통하여 새롭게 재건코자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벽돌
안양사에 전탑이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 알았다. 탑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크게 부끄럽지는 않았지만 영 찜찜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 전탑이 또 있을까?
안양사安養寺...金克己(1150~1204)
보과주교도감궁步過朱橋到紺宮 다리를 건너 단풍 붉게 물든 안양사에 이르니 청유행여축향동淸遊幸與竺鄕同 좋은 구경에 불자라 다행이었네 벽담교교함추월碧潭皎皎涵秋月 푸른 못에는달그림자가 교교히 비치고 홍엽소소향만풍紅葉蕭蕭響晩風 단풍잎엔 쓸쓸히 저녁 바람만 부는구나 사리부증용사객社裏不曾容謝客 結社 내 일찍이 사령운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계변하행송도옹溪邊何幸送陶翁 시냇가에서 도연명을 전송하는게 얼마나 다행한가 상휴계치관귀계相携啓齒寬歸計 서로 이끌고 웃음 띠며 돌아가기 느긋한데 낙경서경반령홍落景西傾半嶺紅 지는 해 서녘에 기우니 산허리 붉게 물들어 가네
2016.07.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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