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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남양주시

남양주...불암사 마애부도

by 임병기(선과) 2015.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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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부도?

호남에는 

순천 선암사의 성윤수좌 사리탑

영남에는

청도 신둔사 . 합천 해인사 원당암. 상주 북장사.창녕 관룡사 용선대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경기도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다

왜?

가난한 절집 살림살이 때문일까?

학자들의 몫인데

이 안되니 멀어져 있다!!!

 

 

 

남양주시청 홈에 실린 불암사 사적을 발췌했다.

봉선사본말사지, 불암사조에는 지증대사(824∼882)가 창건하고 불암사로 명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초에는 도선국사(827∼898)가 중건하였으며 고려 말 조선 초에는 무학대사가 폐허화된 것을 중창했다고 한다. 이 때까지의 불암사에 관한 기록은 지극히 소략하여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계속되는 중건과 함께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천보산불암사사적비를 지은 이덕수에 의하면 조선 초기에 이르러 천보산 남쪽 한자락에 세조 · 성종의 왕릉이 자리하면서 절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원찰이다. 이 때 일현보감 스님이 사세 확장의 서원을 세우고 불상을 개금하고 범패에 이용되는 기물에서부터 요사 · 창고 · 부엌에 이르기까지 마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스님들이 중건의 뜻을 모아 시주를 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거사 각신,정인이 발원하여 시주금을 모아 조석으로 부처님께 재를 지내기도 하였다.

 

1776년(영조 52)에는 서악명관화상이 선당을 창건하였으며, 1782년(정조 6)에는 대웅보전과 극락보전을 중수하고 제월루를 고쳐 지었다.   불암사중수기는 이 때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일현보감 등이 절 안의 전각들을 두루 갖추어 놓았지만 근래에는 절에 주지가 없고 점차 황폐해졌으며 대웅전과 요사에는 비바람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에 서악당 명관이 호남에서 옮겨와 분연히 일어나 분주히 뛰어다니더니 병신년에는 마침내 선당을 건립하였고, 6년 뒤인 임인년에는 서울의 여러 단월들의 시주로 보광전과 극락전을 건립하였다. 이어서 제월루각을 옮겨서 건립하였다. 누각에 단청을 더해 절의 전각들이 모두 새로워졌다. 종이 파괴되어 소리가 나지 않던 것을 고쳐서 새로 만들었다. 서악스님이 다행히 상궁 계월과 신찰을 만나 이루어진 것이다.  

 

1844년(헌종 10) 보봉대사가 대시주의 도움으로 전각과 요사를 중수했고, 누각에 단청을 하였다. 또한 1853년(철종 4)에는 보성스님이 제월루를 중수하였고, 춘봉화상이 향로전을 다시 지었으며, 사찰의 스님들이 의논하여 누각을 보수하니 예전과 같이 찬란하였다고 한다.   1855년에는 혜월스님이 보성과 함께 조정의 내탕금을 하사받아 중수하였으며, 춘봉 · 환응, 성담,· 한경, 춘파, 관해 등 여러 선사가 사재를 출자하여 일을 성사시켰다.1910년에는 풍천 임씨 시주로 동축당,독성각,산신각이 건립되었으며, 1959년에는 만허스님이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마애부도 6기? 7기?

 

 

부도바위 서면

절수구를 갓처럼 새기고 방형사리공을 밀봉한 상태이다..

 

 

1907년 만허당 부도

 

 

안진호대선사. 불기2992년(서기 1965년)

진호석연(震湖錫淵), 본명이 석연(錫淵)이고 본관은 순흥으로 1880년(고종 17)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즉 안진호(安震湖, 1880~1965)는 일제강점기 가장 유명한 승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본산 주지를 역임하거나 역량 있는 말사 주지를 역임하지도 않았고, 또한 불교계의 중심인물로 의제와 담론을 주도한 인물도 아니었다. 물론 안진호와 안석연 및 소백두타(小白頭陀) 또는 만오생(晩悟生)이라는 필명으로 《불교》 등에 60여 건의 글을 발표하기는 하였지만, 그의 존재를 강력하게 각인시킨 것은 불교의례를 집대성한 《석문의범(釋門儀範)》의 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도바위 남면

감실 아레 명문을 새긴  위패형 4기 부도

아니

그 옆에 1기가 더 있는 듯

 

 

청송당 성감선사

 

 

청신녀(재가 여신도)상념

 

 

청신녀 만심

 

 

청신녀 덕원

 

 

맨 좌측

 

부도공을 밀봉하고

그 위에 명문을 새겼다.

위패형 당호마져 사치로 여겼을까?

 

 

 

신통전(1910년)?

칠성각의 다른 이름인 듯. 거의 유례가 없다.

 

 

 

 

 

 

한석봉?

 

 

 

 

 

 

 

대웅전 뒷편 마애삼존불

 

 

 

사적비(1731년)

1731년(영조 7)에 세워진 것으로 총 높이는 305cm, 비신 높이는 210cm이다. 직육면체 형태의 비좌는 지대석을 겸하도록 반쯤은 땅에 묻혀 있으며 마모가 심해 문양을 살필 수 없다. 지붕돌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단순한 팔작지붕의 모양을 하고 있다. 비문은 이덕수(1673~1744)가 지었고 전액은 ‘능가사 사적비’의 글씨를 썼던 조명교(1687~1753)가 썼다.

 

 

해가 짧은 가을

갈 길은 아득한데 담쟁이는 한가히 늦은 볕을 즐긴다.

 

2015.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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