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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남양주시

남양주...흥국사

by 임병기(선과) 2015.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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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사興國寺

나라안의 많은 사찰중에 흥할 興과 나라 國이 들어간 절집은 대부분 왕실과 관련된 가람으로 보면 틀리지 않는다. 수락산 흥국사도 선조의 아바지 덕흥대흥권 원당사찰로 인해 명명된 것으로 전한다. 내가 흥국사를 찾은 목적은 경내의 성임당 부도와 석조약사여래를 뵙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사진 촬영이 매우 어렵다라는 사실을 사전에 인지하여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날도 대웅보전에 보살님들이 진을 치고 계시어 전각내의 문화재는 촬영할 엄두도 못 내고 멀리서 당겨 잡아야 했다. 사전에 조율이 된다면 경내의 많은 옛님을 사진에 담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흥국사는 봉선사의 말사로  599년(신라 진평왕 21) 원광법사가 창건하였으며 처음에는 절 이름을 수락사水落寺라고 하였다. 그 후의 사적은 확인되지 조선초  서거정의  수락사 시가 봉선사본말사지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고 있다.  1568년(선조 1) 선조가 아버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원당을 이곳에 건립하면서 흥덕사興德寺라는 편액을 사액하였으며 1626년(인조 4) 흥덕사를 흥국사興國寺로 바꾸었다.  1790년에는 봉은사,봉선사,용주사,백련사 등과 함께 나라에서 임명하는 관리가 머무르면서 왕실의 안녕을 비는 오규정소(五糾正所) 중 하나로 선정되면서 사격(寺格)이 더욱 높아지기도 했다.

 

1793년(정조 17) 정조대왕이 기허 스님에게 내탕금을 하사하여 전각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지만, 1818년(순조 18) 화재로 대웅전,명부전 등이 소실되었고 만월전과 양로실만이 피해를 면했다. 4년 뒤인 1822년에 다시 기허스님에게 내탕금을 내려 대웅전,시왕전,대방 등이 중수되었으며, 연화경 7축으로 경회를 열어 국가의 복을 기원하였다.

 

 

1856년(철종 7) 청신녀 양씨의 시주로 은봉대덕이 만월전을 새로 짓고 단청을 하였으며, 1878년(고종 15)에는 용암장로가  대웅전과 대방 37칸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1888년에는 제암대덕이  영산전을 건립하였고, 요사채를 중수하여 단청불사를 하였다. 1917년에는 범화스님이 각 전각과 요사채를 중수하고, 기와를 교체하고 단청을 하였다.

 

이와 같은 사세확장에는 선조의 후원이 지대하였는데 그것은 흥국사가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원찰이었기 때문이었다. 봉선사본말사지에 의하면 덕흥군은 중종의 아홉째 아들로 선조는 즉위 후 아버지 덕흥군을 덕흥대원군으로, 어머니 하동 정씨를 하동부대부인으로 추존하였다.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묘를 덕릉德陵으로 추존하고자 하였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동대문 밖에서 궁중의 땔감을 마련하게 하고 땔감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묻되 덕흥대원군의 묘소를 지나왔다고 하면 다시 돌려보내고 덕릉을 지나왔다고 하면 술과 음식으로 환대하며 땔감을 높은 값으로 사들였다. 이후 소문은 빠르게 전해져 궁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덕릉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때부터 흥국사도 자연스럽게 덕절德寺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대방

사찰에 흔치 않은 건물로 대원군이 편액을 내리고  자금을 제공한 경기도 안성의 운수암, 동향의 청원사에도 유존하는 전각이다. 흥국사 대방처럼 H자 전각은 한문의 빌 공 空으로 해석되어 기피하는 건물로 전하기도 하지만 운수암 대방, 밀양 표충사의 무량수각, 도산서원 농운정사에도 채택된 형태로 H를 공부工夫의 工자를 상징한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대방은 정측면 7칸*8칸 규모의 H자형 팔작지붕 건물로 현재 요사와 더불어 설법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3단 장대석 위에  누각과 방사를 모두 갖추고 있다. 정면에는 흥선대원군이 쓴 흥국사興國寺 편액이 걸려 있다. 내부에는 근래까지 만월보전에 봉안했던 팔상탱과 괘불, 천수천안관음보살좌상, 지장탱, 신중탱, 범종 등을 봉안하고 있다.

 

조선후기 흥국사가 불화를 조성하는 불모佛母들의 근거지인 경산화소京山畵所로 불려질 때 여기서 많은 불화를 조성했다고 전한다. 또한 화승을 배출하였고 그 화맥畵脈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흥국사 불화의 특징은 서양화법인 음영법陰影法과 원근법遠近法을 과감하게 도입하고, 수용하여 불화를 새롭게 창출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대웅보전 잡상

지금까지 사찰 추녀마루의 잡상은 밀양 표충사가 유일(?)한 사례로 인지하였었다.

대웅보전은 정측면 3칸*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1818년(순조 18) 화재를 입어 소실되었다가 1821년에 중건된 전각이다.  목조석가삼존불좌상, 감로탱,·지장탱, 칠성도탱,현왕탱,신중탱, 괘불이 보관되어 있다. 또 대웅보전 뒤쪽에는 흥국사법당단청기문(1824년),대웅전중수급채화기(1888년),대웅전단청기(1976년),개금불사기(1977년) 등이 걸려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보살님의 철통방어로  내부는 촬영할 수 없었다.

 

 

대웅보전 목조삼존불

흥국사 대웅보전 내 수미단 위에 화려하게 투각된 목조광배를 갖춘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배치된 목조삼존불좌상이다. 조성발원문이 전하지 않아  조성시기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상호에서 풍기는 인상이나 착의법 등에서 조각승 상정이 1755년(영조 31)에 제작한 양주 회암사 봉안 목조불좌상이나 부천 석왕사 목조보살좌상과 동일하여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대원군 글씨라고 전하지만 낙관을 확인하지 못했다.

 

 

영산전 내부

 

 

영산전 소조 삼존불

소조석가여래삼존좌상.  본존 석가여래상, 좌협시 미륵보살상, 우협시 제화갈라보살상

 

불교중앙박물관 "붉고 푸른 불전 장엄의 세계" 특별전에서 촬영 

 

본존불인 석가여래상은 왼손은 배 부분에 두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손끝을 가지런히 둔 항마촉지인을 취한 자세로 앉아 있다. 머리는 육계와의 경계 없이 둥그스름한 타원형 중간계주만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눈 아래 광대뼈가 강조되었고 눈꼬리가 올라간 작은 눈, 작은 입 등을 표현하여 고요하고 침울한 인상을 풍긴다.

 

착의법은 변형 편단우견식으로 대의를 왼쪽 어깨 위에 살짝 걸치고 왼쪽 팔을 드러내었고 밋밋한 가슴 아래에는 자연스럽게 주름 잡힌 승각기가 보인다. 옷주름들은 간결하면서도 굴곡이 깊어 볼륨감이 있으며 흙의 재질적 특성으로 부드럽게 처리되었는데 특히 무릎 부분의 옷주름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다.

 

 

석가의 좌우측 보살상들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앉아 있는데 좌협시는 왼손을 가슴 부위에, 오른손을 배 부분에 두었고 우협시는 그 반대의 손 모습을 취하였다. 신체비례, 얼굴 표현 등은 본존불상과 유사하다. 정수리에 상투형 머리를 올렸으며 어깨 위의 머리카락은 생략되었다. 불신에는 화형 귀걸이, 수식이 세 줄 드리워진 목걸이, 간결한 팔찌 등을 착용하였다. 착의법은 편삼 위에 대의를 걸친 변형 통견식이나 옷주름 세부 표현에서는 역시 본존불상과 같다.

 

 

단하각

단하丹霞? 사리를 얻기 위하여 목불木佛을 쪼개 땠다는 단하소불丹霞燒佛의 고사로 유명한 중국 육조시대의 단하 천연丹霞天然)선사를 모신 전각으로 생각되지만 정확한 내용은 알수 없다.일반적으로는 독성, 나반존자를 모시는 전각이지만 흥국사에는 산신을 모시고 있다.

 

 

단하각 산신

 

 

만월보전

만월보전은 약사여래를 모신 6각형 전각이다. 1818년(순조 18)의 큰 화재 때 양로실과 함께 화재를 면했으므로 늦어도 1793년(정조 17)또는 그 이전의 건물로 볼 수 있다. 

 

 

 

조선후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호분을 입혔다.

 

 

약사불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온다.

흥국사 약사여래는 서울 정릉골에는 봉국사가 안태고향이라고 한다. 약사여래에게 불공을 올리면 병이 치유치고, 소원이 성취된다는 소무으로 봉국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님들은 1년 내내 잠시도 쉴 겨를이 없어  지친 스님들이  "약사부처님 때문에 우리가 고생이다."라며  투정을 하게 되었다. 다음날 법당 약사여래가 사라지고 안계시었다. 수소문끝에  동구 밖 개천가에 앉아계신 부처님을 발견하게 되었다. 대중이 참회 하면서 옮겨 모시기로 했지만 부처님이 꼼짝 달싹도 하지 않아 참회하면서 여쭈었다.

 

"어느 절로 가시겠습니까?"

"홍천사 입니까?"

"정토사 입니까?"

"명도절(개운사)입니까?"라며  좌대를 움직이려 하였으나 꼼짝하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대중들이 "흥국사로 가시렵니까?" 하였을 때 드디어 부처님의 좌대가 움직여  흥국사에 모셨다고 전한다.

 

 

성임당부도는 경내를 조금 벗어난 동북쪽 낮은 능선 상에 자리하고 있다. 방형 지대석, 팔각 기단, 원형 탑신, 팔각 옥개석, 원형의 상륜부로 팔각원당형 양식을 계승한 원구형 부도이다. 기단부의 연화문과 좌우로 길게 뻗은 안상, 높은 옥개석에는 연주문이 표현되어 있다.   탑신에는 ‘성임당축존지탑(聖任堂竺尊之塔)’이라는 명문으로 부도의 주인공 당호堂號가 성임당聖任堂이며, 법명法名이 축존竺尊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성임당의 행적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아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8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건립된 부도로 전한다.

 

 

기단

 

 

탑신과 상륜부

 

 

성임당축존지탑聖任堂竺尊之塔 명문

 

 

 

만월보전 뒤편의 부도

부도의 주인공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기단은 팔각형으로 밑에서 위쪽으로 각 변이 모여 평면도를 보면 사다리꼴이다.  탑신은 원구형이며, 옥개석은 방형으로 상륜에는 복발, 보륜, 가장 위쪽에는 보주가 있다.

 

 

주차장 부근 부도

주인공은 전하지 않은 조선 후기 부도 팔각 기단, 범종형 탑신, 지붕돌과 상륜이 일석이다.

 

흥국사의 도난 탱화에 관해서는 여러 내용이 오르내리지만 구체적인 사실을 모르기에 여기서는 피한다. 다만 보관중인 탱화를 비롯 모든 문화재에 대하여 촬영가능토록 전향적인 검토가 있으면 좋겠다. 일부 사람들의 무분별한 결례는 문제의 소지가 있지만 대부분 답사객들은 진심으로 우리 문화재를 아끼는 사람들이기에 국립중앙 박물관과 전국의 박물관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사전에 허락을 득한 후 촬영을 허용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5.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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