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남양주시

남양주...묘적사 팔각칠층탑

임병기(선과) 2013. 6. 22.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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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부읍 월문리. 큰 길가에서 번잡한 사하촌 그 길의 끝에 위치한 묘적사.  일주문도 없건만  루대 주차장은 속과 성의 경계처럼 절집 이름만큼이나 신묘하게 고요했다. 이따금 루대 불사에 참여중인 인부들의 공구 소리만이 적막한 중정을 지나 금당 뒤로 사라진다. 그런데 나혼자 절집을 전부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만족감보다는 발걸음마져 사치로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절집경내에 자리한 문무인석. 이제면 묘의 문무인석?

 

무영루

 

일주문이 없는 묘적사의 주 출입문이다. 누하에는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으며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활용되는 이층 루각이다.

 

 

묘적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를 고증할 만한 기록이나 유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원효스님과 요석공주에 관한 이야기가 구전되어 올 뿐이다. 묘적사에 관한 문헌기록으로는 『세종실록(世宗實錄)』과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등이 있으며, 이들 문헌 기록을 통해 볼 때 묘적사는 조선 초기에는 그 사격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또한 대웅전 앞의 팔각칠층석탑 또한 그 시대의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절에서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묘적사는 본래 국왕 직속의 비밀기구가 있던 곳으로, 이곳에 일종의 왕실산하 비밀요원을 훈련시키기 위한 사찰을 짓고 선발된 인원을 승려로 출가시켜 승려교육과 아울러 고도의 군사훈련을 받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집중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두 차례는 잘 막았으나 마지막 한 번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완전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대웅전에서 동쪽으로 약 20m 떨어진 곳에는 이제면이라는 사람의 묘와 묘비가 있어, 이를 통해 묘비가 세워졌던 1720년(숙종 46) 무렵에는 절이 거의 폐허화되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팔각칠층석탑은 기단부 위에 탑신과 상륜을 얹은 것으로 하대석의 면석 각 면에 2구의 안상을 조식하였고 기단은 앙복연화문을 새긴 불좌형식이다. 탑신은 능각마다 우주를 새겼고, 옥개는 하나의 돌로 조성했는데 윗단으로 갈 수록 좁아지게 쌓았으나 약간 기울어져 불안정해 보인다.   옥개석 처마 밑에는 얕은 3단의 받침을 하였으며 처마의 끝은 가파른 곡선이 반전하고 있다. 정상의 상륜부도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본래의 것은 파손되어 따로 대웅전 앞에 보존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세장한 형태의 팔각 석탑으로서 표면에 여러문양을 새겨 넣어 장식적인 효과를 보이고 있으며 인근 수종사 석탑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탑으로 보인다.

 

 

 

 

 

봉발대? 청수대? 승병의 훈련장이 었다면 오히려 야간 훈련시에 불을 밝혔던 노주석이 아닐까?

 

 

탑을 보수하고 남은 부재? 아니면 처음부터 2기 석탑이 조성되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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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굉장이 피로가 엄습한다. 새벽부터 파사성. 파사성 마애불, 용문사, 수종사 등 무리한 일정탓으로 여겨진다. 아직 한 낮이지만 일정을 마무리 하였다. 예전과 달리 요즘에는 오후에는 지치지만 오늘은 더욱 심하게 느껴진다. 과유불급이라 하지 않았던가?

2013.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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