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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김해시

김해...장유화상 사리탑

by 임병기(선과) 2013.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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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암 입구 장유계곡. 늦은 시간인데도  마지막 피서인파로 계곡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주차전쟁은 도심을 방불게한다. 피서가 아니라 오히려 열을 더 받을 것 같다. 고기 굽는 냄새로 차창을 닫아야 했고 복장은 안방인지 비키니를 입은 해수욕장인지 모호한 차림이다. 우리의 피서 문화도 분명 재고되어야 한다. 그건 바로 무리 모두의 책임 아닐까? 장유암 입구를 폐쇄하지 않았을까? 그건 기우였다. 늦은 오후이어서 개방이 되어 차량으로 진입 할  수 있었다.

 

용마루. 용이 꿈틀거리고 있다.

 

"불모산 자락에서 김해평야를 굽어보며 자리하고 있는 장유암은 불교의 남방전래설과 관련이 있는 사찰이다. 사찰에 전하는 가락고찰장유암중수비문駕洛古刹長遊庵重修碑文의 기록에 따르면, 장유암은 서기 48년에 인도 아유타국의 태자이자 승려인 장유화상長遊和尙이 누이 허씨를 따라 이곳으로 와서 최초로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창건 후 수선修繕의 내용은 전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질지왕(451~492) 때 장유화상의 수도처를 재건하고 사리탑을 복원하여 세웠다고 한다.


그 뒤의 연혁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어 알 수가 없다. 다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김해부사 김맹현 등이 1469년(예종 1)에 편찬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불모산 장유사는 선종에  속한다"라고 적고 있어 이 시기에도 법등을 이어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불타버리고 말았으며, 그 뒤 중창하였으나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후 어느 시기엔가 운파ㆍ영담ㆍ만허 등의 스님이 머물며 중건ㆍ중수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당시 주지인 활해상인海上人이 김해에 거주하는 청신녀 구품화의 대시주로 법당과 동서 요사를 중건하고 장유화상사리탑 주변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이 불사는 1931년 봄에 시작하여 1935년 겨울에 낙성을 보았는데, 5년 동안의 중건은 그간 퇴락했던 도량의 면모를 일신케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사리 중건되었으나 광복 후 6.25사변으로 인해 또다시 완전히 소실되는 불운을 겪고 말았다. 그 뒤 수십년이 지나 1982년에 당시 주지인 화엄 스님이 인법당과 칠성각ㆍ염불당ㆍ종각 등을 중건하였다. 근래에는 1994년 보월 스님이 대웅전과 삼성각을 새로 지었으며, 1998년에는 범종각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2년에는 경흥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장유사불교대학을 개설하고 체계적인 신도교육에 매진하고 있다"...전통사찰관광정보

 

 

대웅전 뒷편 장유화상 사리탑

 


장유화상사리탑.  가락국 제8대 왕인 질지왕(재위기간 451~492) 때 장유암을 창건시에 조성했다는 달빛에 물든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사리탑은  고려말이나 조선초의 양식으로 전한다. 사리탑은 방형 지대석 위에 3단의 기단을 두고, 탑신석, 옥개석,  상륜부를 두었다.

 

 

기단 하대석에는 각 면에 안상을 새겼고, 중대석괴임은 넓은 연판을 둘렀고, 그 위에 다시 두터운 중대석을 놓았다. 상대석에는 앙련을 표현했다.

 

 

 탑신석은 팔각으로 아무런 문양이 없으며, 팔각의 옥개석은 귀끝이 뾰족하게 솟아 있다. 상륜부는 복원한 부재로 보인다.

 

 

 

주초석

 

 

맷돌.노주.석탑 옥개석,노반

 

 

2013.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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