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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평창군

평창...오대산 상원사

by 임병기(선과) 2012.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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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대걸이

 

오대산 상원사. 오늘이 3번째 걸음인가? 월정사에서 포행삼아 도보로 와야할 길을 문명의 이기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숲을 돌아볼 여유마져 폭염을 피해 오대산 골골로 피서온 인산인해의 행락객에게 선점을 당해 버렸다. 지난번 처럼 오늘도 긴 여름날의 하루해가 석양에게 자리를 내어줄 시간이 많지 않아 마음이 바쁘다.

 

관대걸이. 세조와 문수동자의 일화에 등장하는 유물이다.

 

“마마, 정신 차리십시오.”
 
잠자리에 든 세조는 악몽을 꾸는지 온몸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옆에 누웠던 왕비가 잠결에 임금의 신음소리를 듣고 일어나 정신 차릴 것을 권하니 잠에서 깨어난 세조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 신열이 있사옵니다. 옥체 미령하옵신지요?”
 
세조는 대답 대신 혼자 입속말을 했다.
 
“음…. 업이로구나, 업이야.”
 
“마마, 무슨 일이신지요. 혹시 나쁜 꿈이라도 꾸셨는지요.”
 
“중전, 심기가 몹시 불편하구려. 방금 꿈에 현덕왕후(단종의 모친, 세조의 형수) 혼백이 나타나 내 몸에 침을 뱉지 않겠소.”
 
“원, 저런….”
 
꿈이야기를 하며 다시 잠자리에 들었으나 세조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린 조카 단종을 업어주던 모습이며, 생각하기조차 꺼려지는 기억들이 자꾸만 뇌리를 맴돌았다. 이튿날 아침이 되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꿈에 현덕왕후가 뱉은 침자리마다 종기가 돋아나고 있는 것이었다. 세조는 아연실색했다. 종기는 차츰 온몸으로 퍼지더니 고름이 나는 등 점점 악화되었고, 명의와 신약 모두 효험이 없었다. 임금은 중전에게 말했다.
 
“백약이 무효이니 내 아무래도 대찰을 찾아 부처님께 기도를 올려야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문수도량인 오대산 상원사가 기도처로는 적합할 듯하옵니다.”
 
왕은 오대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월정사에서 참배를 마치고 상원사로 가던 중 장엄한 산세와 맑은 계곡 물 등 절경에 취한 세조는 불현듯 산간벽수에 목욕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신하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늘 어의를 풀지 않았던 세조는 그날도 주위를 물린 채 혼자 계곡 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즐겼다. 그때, 숲속에서 놀고 있는 조그마한 동자승이 세조의 눈에 띄었다.
 
“이리 와서 내 등 좀 밀어주지 않으련?”
 
동자승이 내려와 등을 다 밀고나자 임금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단단히 부탁의 말을 일렀다.
 
“그대는 어디 가서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
 
“대왕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지 마시오.”
 
이렇게 응수한 동자는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왕은 놀라 주위를 살피다가 자신의 몸을 보니 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게 되었다. 크게 감격한 왕은 환궁하자마자 화공을 불러 자신이 본 문수동자를 그리게 하였다. 기억력을 더듬어 몇 번의 교정을 거친 끝에 실제와 비슷한 동자상이 완성되자 상원사에 봉안토록 하였다.
 
현재 상원사에는 문수동자 화상(畵像)은 없고 얼마 전 다량의 국보가 쏟아져 나온 목각 문수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또한 세조가 문수동자상을 친견했던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갈라지는 큰 길목 10km 지점은 임금이 그곳 나무에 의관을 걸었다 하여 ‘갓걸이’ 또는 ‘관대걸이’라 부르고 있다.

부도전...한암스님.탄허스님.만화스님

 

방한암스님. 법명은 중원(重遠)이며 한암은 법호이다. 성은 방(方)씨이다. 1876년 강원도 화천군에서 태어났다. 1897년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기암 절벽의 바위 하나하나가 부처와 보살의 얼굴을 닮은 것을 보고 감격하여 출가했다. 장안사에서 수도를 시작하였고 신계사 보운강회에서 수도하던 중 지눌의 《수심결(修心訣)》을 읽고 깨달음을 얻은 후 전국의 고승을 찾아 구도의 길에 올랐다.

1899년 정암사 수도암에서 경허(鏡虛)로부터 금강경 사구게를 듣고 도를 깨달았다. 1905년 통도사 내원선원 조실로 추대되어 후학을 지도하였고 1910년 평북 맹산군 우두암(牛頭庵)에 들어가 수행에 정진하였다.

1925년 봉은사 조실을 그만두고오대산 상원사에 들어간 이후 27년 동안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1941년 조계종이 출범하자 초대종정으로 추대되어 4년간 종단을 이끌었다.

한암에 얽힌 일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은 6.25전쟁 때 상원사를 지켜낸 일이다. 1.4후퇴로 국군이 남쪽으로 퇴각하면서 절을 불태우려 하자 법당에 머무른 채 불을 지를 것을 권하였다. 이에 감명을 받은 국군은 문짝만 떼내어 불태운 뒤 절을 떠났다. 그리하여 월정사는 소실되었으나 상원사만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탄허스님. 속명은 김금택(金金宅)이다. 탄허는 법호이며 법명은 택성(宅成)이다. 1913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기호학파 최익현 계통의 이극종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도학에도 상당히 밝았다. 15세부터 도(道)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고승 한암과 서신문답을 주고받은 뒤 1934년 22세의 나이로 상원사에서 출가하였다. 이후 한암의 밑에서 15년 동안 수행하였다.

월정사 조실과 연수원장을 지냈으며, 1964~1971년까지 동국대학교 대학선원 원장을 지냈다. 1967년 조계종 중앙역경원 초대원장이 되어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동양철학에도 해박하여 일본·대만 등 해외에서 열린 동양학세미나에서 화엄학 등을 강의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대만대학교에서 비교종교에 대한 특강을 하여 세계적인 석학으로 추앙받았다. 1983년 월정사 방산굴에서 나이 71세, 법랍 49세로 입적하였다.

만화스님.호는 만화(萬化), 이름은 정쌍룡으로 강원도 간성 용포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선대부 정진록(鄭振錄), 어머니는 최씨이다. 10세 전에 한 스님을 보고 이유없이 기쁨을 느낀 뒤 부모의 허락을 얻어 금강산 건봉사의 금현(錦玹)에게 출가했다. 태허(太虛)에게 구족계를 수지하고 경을 공부했으며, 1872년(고종 9)에 왕실의 기원도량이었던 석왕사의 봉향관(奉香官)으로 임명되어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평안함을 위해 기도했다.
 
그 뒤 건봉사로 돌아와 탱화를 봉안했고, 1874년(고종 11) 승통이 되었으며, 1878(고종 15) 전등사의 총섭(總攝)이 되었다. 그러나 이해 건봉사에 큰 화재가 나 3,183칸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자, 다시 돌아와 중창불사의 도화주(造化主)가 되어 이듬해 대웅전, 관음전 등 1천여 칸의 건물을 중수했다. 그리고 화엄법회를 열어 후학들을 지도하는 한편 계속해서 팔상전(八相殿), 극락전 등을 중건했다.
 
1901(광무 5)년 조정에서 부종수교 전불심인 대각등계존자(扶宗樹敎 傳佛心印 大覺登階尊者)라는 허를 내려 오대산 적멸보궁을 수호하게 했으며, 팔도승풍규전원장(八都僧風糾正院長)과 관동도교정(關東道敎正)의 일을 맡아보게 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이름있는 절을 순례하다가 1919년 건봉사에 돌아와 후학들을 지도했다. 이 해 9월 13일 나이 70세, 법랍 57년으로 입적했다. 다비 후 사리 한 과를 얻었으며, 한영 정호(漢永 鼎鎬)가 비문을 짓고 가선대부 윤희구(尹喜求)가 글씨를 써 건봉사에 비를 세웠다.

 

 

부도전 삼거리? 예전에는 계곡을 따라 진입하여 상원사 중정으로 진입동선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못 보던 계단위로 청풍루가 어깨에 힘을 주고 버티고 내려다 보면서 동선을 강제로 유도한다. 아니 그래도 폭염에 지친 육신인데 청정치 못한 중생 육두 문자가 맴돈다

 

청풍루

 

어쩐지 유가의 느낌이다.

 

백세청풍이면, 지주중류와 더불어 지조의 상징일테고

 

문수전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년)에 보천과 효명 두 왕자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처음엔 진여원이라 칭하였다.그뒤 자장율사가 개산한 뒤로 오대산이 불교 성지로서 그 이름을 알려지고 오류성중(다섯 부류의 성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신앙화되기 시작하고 이때 창건 설화를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전해지고있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는 아우 효명과 더불어 각 일천명을 거느리고 성오평에 이르러 여러 날 놀다가 태화 원년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형 보천태자는 오대산 중대 남쪽 밑 진여원터 아래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이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 남쪽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그곳에서 두분은 예배와 염불을 하면서 수행하다 오만의 보살을 친견한 뒤로 날마다 이른 아침에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한다.이때쯤 신문와의 후계를 두고 나라에서 분쟁이 일자 사람들은 오대산에 찾아와 보천태자에게 왕위를 계승할것을 권하였으나, 이를 마다하여 효명태자에게 왕위 계승을 권하자 이를 수락하여 그가 성덕왕이된다.왕이된 효명태자는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여러 모습으로 몸을 나투시니 이곳에 진여원을 창건하게 되니 지금의 상원사의 전신이되었다.

 

문수전은 1947년 울정사 주지 지암스님이 금강산 마하연을 모방하여 지었다고 전한다.

 

상원사중창 권선문

 

권선문은 세조 10년(1464) 세조의 왕사인 혜각존자 신미 등이 학열, 학조 등과 함께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상원사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지은 글로,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조가 쌀, 무명, 베와 철 등을 보내면서 쓴 글과 함께 월정사에 소장되어 전한다.

각각 한문 원문과 번역으로 되어 있는데, 신미 등이 쓴 글에는 신미, 학열, 학조 등의 수결(지금은 서명)이 있으며, 세조가 보낸 글에는 세조와 세자빈, 왕세자의 수결과 도장이 찍혀 있다. 한글로 번역된 것은 가장 오래된 필사본으로 유명하다.

세조와 상원사 및 신미와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자료이며, 당시의 국문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가장 오래된 한글 서적이면서도 보존 상태가 완벽하여 1996년 11월 28일 보물 제140호에서 국보 제292호가 되었다.

 

                                                                      고양이 상

 

역시 세조와의 일화속의 고양이 석상이다.

 

병을 고친 이듬해 봄에 세조는 다시 그 이적의 성지를 찾았다. 상원사에 도착한 왕은 곧바로 법당으로 들어가 막 예불을 올리려는데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곤룡포 자락을 물고 자꾸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예감이 든 세조는 밖으로 나왔고, 병사들을 풀어 법당 안팎을 샅샅이 뒤지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상을 모신 탁자 밑에 세조를 시해하려는 3명의 자객이 칼을 들고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그들을 끌어내어 참하는 동안 고양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죽을 뻔한 목숨을 구해준 고양이를 위해 세조는 강릉에서 가장 기름진 논 5백 섬지기를 상원사에 내리고, 매년 고양이를 위해 제사를 지내주도록 명했다. 이때부터 절에는 묘답(고양이 논) 또는 묘전(고양이 밭)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궁으로 돌아온 세조는 서울 근교의 여러 사찰에 묘전을 설치하여 고양이를 키웠고, 왕명으로 전국에 고양이를 잡아 죽이는 일이 없도록 했다. 최근까지도 봉은사 밭을 묘전이라 부르는 이유도 이에 기인한다.
 

 

지금도 상원사에 가면 마치 이 전설을 입증하는 듯 문수동자상이 모셔진 청량선원 입구의 계단 좌우에는 돌로 조각한 고양이 석상이 서 있다.
 
고양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세조는 다시 상원사를 찾았다. 자신에게 영험을 베풀어준 도량을 중창하여 성지로서 그 뜻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서였다. 대중스님들과 자리를 같이한 왕은 상원사 중수를 의논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공양시간을 알리는 목탁이 올렸다. 소탈한 세조는 스님들과 둘러앉아 함께 공양을 들 채비를 했다.
 
“마마, 자리를 옮기시지요.”
 
“아니오. 스님들과 함께 공양하는 것이 과인은 오히려 흡족하오.”
 
그때 맨 말석에 앉아 있던 어린 사미승이 발우를 들더니, 세조의 면전을 향해 불쑥 말을 던졌다.
 
“이것아, 공양하시오.”
 
놀란 대중은 모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몸들 바를 몰라 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정작 놀라야 할 세조는 껄껄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연 도인될 그릇이로다.”
 
왕은 그 사미승에게 3품의 직을 내리고, 그 표시로써 친히 전홍대(붉은 천을 감은 허리띠)를 하사하였다. 아마 세조는 지난날 자신의 병을 고쳐준 문수동자를 연상했던 모양이다. 그 후 세간에서는 어린아이들이 귀하게 되라는 징표로 붉은 허리를 졸라매 주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문수보살.문수동자상

 

목조보살좌상. 머리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관(冠)을 쓰고, 목에는 3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고, 몸에는 구슬장식을 늘어뜨리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준다. 양 손에는 꽃봉오리가 달린 연꽃가지를 잡고 있다. 만들어진 시대는 같이 모셔져 있는 문수동자상에서 나온 유물을 통해 조선 초기임을 알 수 있다.

 

 

문수동자좌상. 예배의 대상으로서 조상(彫像)이 된 동자상(童子像)으로는 국내 유일의 유물(遺物)이며, 동자상(童子像) 조상(彫像)의 유래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우견편단(右肩偏袒)에 영락(瓔珞)을 늘어뜨린 보살형(菩薩型) 양식인데, 보살상과 다른 것은 보관(寶冠) 대신 머리를 양쪽으로 묶어 동자의 얼굴을 나타내고 있는 점이다. 납의(衲衣)로 허리띠를 질끈 묶어 동자의 천진성(天眞性)을 표현하고 있다. 얼굴의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며, 볼과 입가에서 동자의 천진성이 잘 나타나 있다.


대좌(臺座)는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데, 동자상으로서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하여 광배(光背)도 마련하지 않았다. 수인(手印)은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의 하품하생인(下品下生印)과 같이 하고 있다. 이 동자상은 고려불상(高麗佛像)의 양식에서 조선(朝鮮) 전기(前期) 양식으로 전개되는 양식적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조선(朝鮮) 전기 조각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오대산(五臺山)은 신라(新羅)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중국(中國)의 오대산문수신앙(五臺山文殊信仰)을 받아들인 이래 문수도량(文殊道場)으로 유명하다. 이같은 전통적인 문수신앙이 조선조(朝鮮朝) 세조(世祖)의 문수신앙을 낳게 하고, 세조(世祖)의 문수신앙 체험이 동기가 되어 문수동자상(文殊童子像)을 제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과 전설(傳說)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문수동자상 복장유물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平昌 上院寺 木彫文殊童子坐像 腹藏遺物)은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목조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에서 1984년 7월 불상의 유래를 밝힐 수 있는 2개의 발원문(發願文)과 조선 전기의 복식, 전적류 등 23점의 복장유물이 발견된 유물이다.

발원문은 불상을 만들게 된 이유와 만든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으며 후대에 보수한 기록도 적어 놓고 있다. 첫번째 발원문은 세조 12년(1466)에 세조의 둘째 딸인 의숙공주와 남편 정현조가 세조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오대산 문수사에 여러 불·보살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크기는 세로 31.5㎝, 가로 24㎝의 낱장으로 되었고, 푸른 비단에 붉은색으로 글씨를 썼다. 또다른 발원문은 1599년에 2구의 문수동자상과 16구의 나한상 등에 금칠을 새로 하고 고쳤다는 내용이다. 크기는 세로 34.6㎝, 가로29.1㎝의 낱장으로 되었고 역시 푸른 비단에 붉은색으로 글씨로 썼다.

전적류는 모두 13종으로 백지묵서제진언, 대방광불화엄경, 오대진언, 묘법연화경 5종, 원각경 2종, 육경합부 3종이 발견되었다. 백지묵서제진언은 불교의 가르침 66가지를 범어로 옮겨 적은 것으로, 두루마리 형태이며 크기는 세로 41.8㎝, 가로 679.3㎝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은 화엄경 60권 가운데 권28에 해당하며 간행 시기는 12∼13세기로 추정된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31.6㎝, 가로 12㎝이다.

오대진언은 다섯가지의 다라니 진언(眞言:부처님의 깨달음을 말한 글)을 범어, 한글, 한자순으로 적고 있다. 성종비인 인수대비의 명으로 당나라에서 원본을 구하여 한글로 음역하고, 성종 16년(1485)에 간행한 것이다. 글자를 하나하나 파서 고정된 틀에 끼우고 닥종이에 찍어낸 활자본으로 크기는 세로 27㎝, 가로 16㎝이다.

묘법연화경 권1-3, 4-7은 2권의 책으로 되었고, 크기는 세로 26.9㎝, 가로 16.8㎝이다. 작은 글자로 아주 정교하게 새겨 고려 정종 1년(1399)에 간행한 것으로 해린(海隣)이 1년에 걸쳐 새긴 것이며 인쇄 상태로 볼 때 판을 새기고 한참 후에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묘법연화경 권1-7은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며 모두 103장으로 되어 있는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24.1㎝, 가로 8.5㎝이다. 태종 4년(1404)에 간행된 목판본으로 표지는 검푸른 색이고 제목은 금색으로 쓰여있다. 묘법연화경 권6-7은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1권의 책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세로 35㎝, 가로 25㎝이다. 세조 때 간행된 을해자본으로 인쇄직후 불상에 넣은 듯 매우 깨끗이 보관되어 있다. 묘법연화경 권1-3은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1권의 책으로 되어있고 크기는 세로 27.6㎝, 가로 16.6㎝이다. 불상에 넣기 전에 읽으면서 달아놓은 토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용중에 복장유물로 넣은 것으로 보인다.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은 세조 11년(1465)에 간행된 목판활자본으로 크기는 세로 27.7㎝, 가로 18.5㎝이다. 세조가 1465년에 원각사를 세우고 난 뒤 효령대군에게 명하여 교정한 원각경을 정란종(鄭蘭宗)이 쓴 것으로 을유자(乙酉字)로 찍은 것이다. 을유자본은 을유년에 만든 활자로 찍은 책을 말하며 그해의 간지를 따서 을유자라고 부르며, 이 책은 현재 전하는 을유자본 가운데 가장 깨끗한 책이다. 또다른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은 권상·중·하 3권이 세로 25.1㎝, 가로 16.5㎝의 하나의 책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전에 강희안이 옮겨 적고 간행했던 간경도감판본을 명종 19년(1564)에 신흥사(臣興寺)에서 다시 새겨 찍어낸 것으로 그 새김이 매우 정교하다.

세로 29.3㎝, 가로 17.3㎝ 크기의 육경합부는 1440년에 영제암에서 판각한 목판을 인수대비가 성종 3년(1472)에 대대적으로 찍어낸 것 가운데 하나이다. 화암사에서 성종 19년(1488)에 다시 새긴 다른 육경합부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크기는 세로 26.6㎝, 가로 15.7㎝이다. 진안(鎭安) 중대사(中臺寺)에서 세조∼명종년간에 간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또다른 육경합부는 크기가 세로 26.4㎝, 가로 16.3㎝인데 상원사 복장유물 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지 않다.

당시 상류계층에서 입었을 것으로 보이는 명주 적삼 1점과 생명주 적삼 1점은 불상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이 공덕을 쌓기 위해 다른 유물들과 같이 넣은 것으로 보인다. 황색 보자기는 불상에 들어갈 유물들을 싸는데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구슬 3개와 사리가 같이 발견되었다.

위의 유물 중 발원문은 상원사문수동자상 및 여러 불·보살의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고, 전적 중 제진언은 조선 전기 필사본으로는 유례가 드문 것이며, 그밖에 활자본과 목판본은 나름대로의 서지학적 특징을 갖고 있다. 또한 복식류는 조선 전기의 의류로 현재까지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세조대의백초회장저고리

출처...문화재청

 

세조대의회장저고리 (世祖代의回裝赤古里). 이 저고리는 깃과 끝동, 섶과 옷고름 등에 짙은 배색을 한 회장저고리이다. 1975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동자상에 금을 입히다가 불상의 뱃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불상이 세조임금이 1466년 상원사를 여러 차례 방문하는 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이 저고리 또한 1460년대에 누군가가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저고리의 크기는 길이 52.4㎝, 품 34㎝이며, 전체적인 모습은 품이 넓어서 소매길이와 저고리길이가 짧게 보일 정도이다.

깃은 네모로 각이 진 목판깃이며, 직선 형태의 소매와 짧고도 좁은 옷고름 등이 조선초기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저고리의 전체적인 구성은 균형이 잘 맞으며, 색상도 전통적인 쪽물을 들인 염색이 지금껏 잘 간직되어 있다. 같은 색깔을 옅고 짙게 하여 교대로 배치한 것은 의복의 배색효과를 잘 살렸는데, 이 점은 우리의 선조가 의생활을 단순히 흰색이나 원색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이 저고리의 뒷 중심선 우측에 ‘장씨소대(長氏小對)’라는 글씨가 있어 저고리의 주인이 세조의 후궁 중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우리나라에 보관되고 있는 저고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조선초기 저고리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구성과 색상 면에서도 의복연구에 활용할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

 

영산전

 

영산전 석탑.

 

7층이었을까?  아니면 9층?

 

저래야만 했을까?

 

화강암의 철분이 핏빛 느낌이다.

 

 

 

고려시대?

 

탑신 각면에는 4분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기단부에는 복련이 곱게 피었고. 용문이 보인다.

 

 

 

괘불대

 

예전에는 이 자리에 종각이 있었는데.

 

하늘빛이 고와서...

 

상원사 동종

 

현존(現存)하는 한국종(韓國鍾)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동종으로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 경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조선(朝鮮) 예종(睿宗) 원년(元年)(1469)에 상원사(上院寺)에 옮겨진 것으로, 한국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범종(梵鍾)이다.

이 종의 맨 위에는 큰 머리에 굳센 발톱의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연꽃과 덩굴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종 몸체의 아래 위에 있는 넓은 띠와 사각형의 유곽은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1∼4구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을 두었다. 네 곳의 유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그 밑으로 마주보는 2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飛天像)을 새겼다. 비천상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를 구슬과 연꽃 무늬로 장식하였다.

이 종은 조각 수법이 뛰어나며 종 몸체의 아래와 위의 끝부분이 안으로 좁혀지는 고풍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한국 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러한 상원사 종에 보이는 음통,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형, 상대·하대, 네 곳에 있는 유곽의 구조적인 특징은 한국종의 전형(典型)이 되어, 양식적인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이후의 모든 종에 계승된다.

 

음통과 유곽

 

우리나라의 종은 모두 36개의 유두를 갖추고 있다. 반면에 상원사 동종은 35개의 유두만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종의 이전과 관련된 설화가 전하고 있다.
 
즉 세조가 자신의 원당인 상원사에 봉안할 종을 구하기 위해 전국을 살피게 하였고, 그 결과 경북 안동의 문루(門樓)에 걸려 있는 종이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안동에서 상원사로 옮기던 중 죽령에 이르렀을 때 3천379근이나 나가는 종이 길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종의 유두 하나를 떼어서 본래 있던 안동으로 보냈더니 다시 움직였다는 이야기이다.

주악비천상

 

혜곡 최순우 선생의 글을 가져 온다.

 

어느해 겨울 눈이 강산처럼 쌓인 달밝은 하룻밤을 오대산 상원사에서 지낸 일이 있었다.

 

새소리 물소리도 그치고 바람도 일지 않는 한밤내내 나는 산소리도  바람소리도 아닌 고요의 소리에 귓전을 씻으면서 새벽 종소리를 기다렸다.

 

웅장한 소리 같으면서도 맑고 고운 첫울림이 오대산 깊은 골짜기와 숲속의 적막을 깨뜨리자 길고 긴 여운이 뒤를 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어찌 생각하면 간절한 마음같기도 한 너무나 고운 소리였다.

 

이렇게 청정한 종소리를 아침 저녁으로 들으면서 이 절의 스님들은 선(禪)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가다듬고 또 어지러워지려는 마음속을 씻어 내는 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찻집에서 바로 산길을 따라 사자암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사자암 입구까지 차량 진입이 가능했다. 내려올 때는 옛추억을 더듬어 소롯길을 택했지만 기억 저편은 가물가물 아무 것도 다가오지 않았다.

 

 

상원사에서 적멸보궁 쪽으로 20분쯤 오르다 보면 만나게 되는 중대 사자암은 비로자나불을 주불(主佛)로 하여 일만의 문수보살이 계시는 곳이다. 자그마한 앞마당에는 방한암 선사가 심었다는 단풍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다.

 

중대사자암은 적멸보궁 향각(香閣)이다. 적멸보궁 참배와 공양물을 올리기 위한 스님이나 신도가 머무는 곳이다. 사실 수호암자라 부르는 게 더 정확하다. 사자암 이름은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영물 사자에서 온 듯했다.
 

 

중대사자암의 처마. 마치 다층석탑 처럼 보인다.

 

 

사자암 비로자나불

 

 

중대 사자암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까지는 20여분 남짓의 호젓한 산길이다.잠시후 길 왼편에 천연수가 솟아오르는 용안수를 지나면 비로봉 정상과 적멸보궁의 갈림길이다. 적멸보궁이 용의 머리 부분이고, 우물이 용의 눈에 해당된다 하여 이름을 용안수라 불리운다고 한다.

 

 적멸보궁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전각으로,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불단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월정사 적멸보궁은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자장보살이 당나라에 가서 문수보살의 계시를 받고 돌아와 세웠다는 전설이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하나이다. 5대 적멸보궁은 경상남도의 통도사, 오대산의 월정사, 설악산의 봉정암, 영월의 법흥사 그리고 정선의 정암사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1층 건물이며,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두 짝의 판자로 만든 문을 달았고, 양쪽 칸에는 아래에는 판자로 만든 벽을 대고 위에는 띠살창을 하고 있어 특이하다.

 

 

적멸보궁도 바뀌었다. 보살님에게 예전에는 유리창을 통해서 적멸보궁을 바라보았는데 금빛 벽지를 설치한 까닭을 여쭈었더니 처음부터 저리했다는 대답이다. 분명 바뀐 이유가 있을텐데.

 

 

진신사리탑. 5층 마애불탑과 사리를 모신 그릇 형상이 앞뒤로 새겨졌다. 자장율사가 봉안한 부처님 정골사리가 저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비는 땅 속에 묻혀 있던 것을 한암 스님이 찾아내 다시 세워 놓았다고 전한다.

 

 

적멸보궁 참배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 새벽 치악산 상원사 참배 그리고 상원사 적멸보궁 참배로 땀을 한 말(?)도 더 흘렸고, 몸은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하산하여 공양간 앞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 측은해 보였는지 어느분이 저녁 공양하고 가라고 부른다. 절집 밥은 늘 꿀맛이지만 상원사 저녁 공양은 내 일생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맛과 양(?)으로 기억될 것 같다.다시 찾을 날이 있을지.여름이건만 오대산 산바람은 청량하고 하늘은 푸르고 높기만 하다. 나의 마음처럼...

 

2012.07.30 

 

*문화재청.월정사.한국전통사찰관광정보. 문화유적총람. 평창군청. Daum,NAVER 백과사전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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