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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평창군

평창...수항리사지석탑

by 임병기(선과) 2012.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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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면 수항리 143-1 수항리 보건소에서 좌회전 "절터교" 다리 건너 좌측에 위치한다. 작년 답사동선에 포함시켰으나 놓쳤던 옛님이어서 더욱 반갑고 설레이었다.

 

문화유적총람 자료를 보자."수다사는 7세기 중엽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유사>,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 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신효거사(信孝居士), 신의(信義), 유연(有緣), 지광국사 해린(海麟)이 활동했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다사(水多寺)는 7세기 중엽에 지었다는 사찰 로 단편적인 기록을 제외하고는 그 자세한 연혁은 알 수 없다. 삼 국유사의 기록에서 유록(有綠)은 9세기 후반 내지 10세기 초반, 지 광국사(智光國師) 해린(海麟)은 11세기 초반 10여년간 이곳에서 활 동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수다사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완성된 단종 2년(1432)경까지 존재하다가 그 이후의 <<동국여 지승람(東國與地勝覽)>>부터 기록이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폐사된 듯하다.

 

현재 절터에는 축대 일부 및 석탑, 그리고 주변에는 기와 조각이 널려 있고 인근 마을에 당간 지주 등이 흩어 져 있다. 또한 1942년 조선 총독부에서 간행된 <<조선보물고적조사 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의하면 석불(石佛)이 대(大)(높이 2 척(尺) 5촌(寸) 입상(立像)), 중(中)(높이 2척(尺) 2촌(寸) 입상(立像)), 소(小)(높이 1척(尺) 9촌(寸) 좌상(坐像))의 삼구(三軀)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사지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명문이 새겨진 촛대 부속구와 금고는 국립춘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에서 발간된 자료에 명기된 삼존불은 한국동란시에 사라져 행방이 묘연하다고 전한다.

 

 

석탑은 한국전쟁에 도괴된 것을 주민들이 탑부재를 수습하여 현재 상태로 복원하였다고 전한다. 어디서 뵌 듯한 석탑 모습 아닌가? 강릉 신복사지 석탑과 비교해보자.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신복사지 석탑...사진/누들스님

 

2층 기단의 3층 탑이다. 현재 복련이 새겨진 초층탑신 받침과 상기단 갑석 중앙 부재는 무엇일까? 신복사지 석탑을 먼저 보면 수항리 석탑은 하기단 갑석과 상기단 면석사이에 받침이 결실되었음 알 수 있다. 따라서 중앙 부재는 상기단 면석 받침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 석탑 특징의 하나인 2~3층 방형 탑신 받침, 옥개석 2개와 탑신석 상륜이 결실된 모습이다.

 

 

기단면석에는 탱주가 조출되었고 탑신석에는 양우주만 표현하였다.

 

옥개석과 탑신석

 

현재 상층 옥개석 받침이 2단, 하층 옥개받침이 3단으로 미루어 사진의 부재는 3단 받침의 2층 옥개석이다. 옥개석 상부의 홈은 사리공으로 보인다. 탑신도 신복사지 석탑 처럼 체감이 급격한 양우주가 뚜렷한 2층 탑신으로 생각된다.

 

 

멀리 보이는 다리가 아름다운 이름의 '절터교'이다. 교각명 선정을 두고 지역이기주의에 편승하여 지자체간에 갈등 조장은 물론 준공마져 지연시켰던 사례를 우리는 보아왔기에 향후 다른 지자체에서는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아울러, 다리 이름을 작명한 사람이 가진  평창의 자연풍광 같은 순수한 심성을 배우고 싶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수항리 민가에 유존한다는 당간지주, 초교에 안치된 석조 부재를 두루 섭렵하고프다. 뿐만 아니라 거주하고 있는 촌로들에게 구전되어오는 설화. 넌픽션을 생생한 육성으로 듣고 싶다. 막걸리 한 주발을 곁드리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구미가 땡기는 님들은 줄을 서시오!!! 줄을...

 2012.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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