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순천시 42

순천...송광사 탑전 승탑(부도). 효봉 영각

탑전(塔殿) 1969년 조계총림 송광사의 초대 방장이셨던 구산스님을 모신 전각입니다. 사모지붕인 구산선문(九山禪門), 적광전, 무상각, 구산스님 부도. 3~4대 방장이었던 회광당 일각 스님 부도, 그리고 근대 석두스님 제자 스님과 조선후기 부도가 있습니다 승탑원 상단에는 조선 후기 부도, 중단에는 구사스님 부도와 탑비, 하단에는 일각 스님 부도와 탑비가 자리합니다 일각스님 부도 회광당 일각대종사지탑 훗날 새로운 부도 유형으로 자리 잡을 것 같습니다 회광당 일각스님 http://www.songgwangsa.org/sub/sub_1_04_010.jsp 구산스님 부도, 탑비 부도 훗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을 것 같습니다 구산 스님 http://www.songgwangsa.org/sub/sub_1_04_..

순천...옥천서원. 사직단. 임청대

임청대길 18 옥천서원. 사직단. 임청대가 한 구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옥천서원(玉川書院) 사진은 내삼문, 옥천사. 묘정비입니다.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옥천서원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일파로 연루된 김굉필이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순천에 이배 되어 죽자, 그 학덕을 기려 1564년(명종 19) 순천부사 이정(李禎)이 처음 창건하여 ‘경현당’이라 하였다. 1565년(명종 20) 김굉필의 신위를 모실 사당을 지으면서 ‘옥천정사(玉川精舍)’라 하였는데, 1568년(선조 1) 순천부사 김계(金啓)의 상소에 의하여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옥천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그 뒤 정유재란 때 불에 탔다가 1604년, 1653년, 171..

순천...팔마비

팔마비 금년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기사를 접하고 답사 동선에 포함시켰습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선정비는 조선시대에 조성되었기에 고려시대에 세운 순천의 팔마비는 가치가 있습니다. "고려 말의 청백리 최석(崔碩)의 송덕을 기리는 기념비이다. 1281년(충렬왕 7) 승평부사(昇平府使) 최석이 비서랑(秘書郞)으로 전직하자 마을 사람들은 예전의 관례에 따라 말 8 필을 기증하였는데, 최 부사는 상경 후 기증받은 말 8 필과 최부사의 암말이 승평부에서 낳은 망아지 1마리를 보태어 9 필을 다시 돌려보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 뒤부터 부사가 오고갈 때의 이런 관폐가 없어졌다. 이에 주민들은 그의 송덕을 기려 비를 세우고 이름을 팔마비라 하였다. 그 뒤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1617년(광해군 9) 승주부..

순천...순천고교 삼층석탑

순천고교 삼층석탑(2009년) https://blog.daum.net/12977705/8722997 단층 기단의 삼층석탑 탑신부의 옥개석과 탑신석이 많이 결실된 상태입니다 기단 중석은 우주와 1기 탱주를 모각하였으며, 감입식 결구입니다. 2매로 구성된 초층탑신석이 이채롭습니다. 지대석 기단 중석, 갑석 갑석에는 부연이 생략 갑석 상부 2단 굄 3단 각형 옥개석 층급받침, 절수구 생략 2 매석의 초층 탑신석 우주가 모각된 2층 탑신석은 본래 부재가 아닌 듯합니다 상륜부 복발, 앙화, 보주가 남아 있습니다 2021.04.09

순천...학구리( 성종 왕자 수견 )태실

태봉 서면 학구리 산 18 학구리 마을회관에서 바라본 전경 학구리 마을회관을 등지고 좌측 100여 미터, 시멘트 다리 건너 태봉 가는 길 좌측 민가 뒤편 또 다른 민가의 좌측 펜스 옆 임도 있음 (밥값 하는 멍멍이 주의) 민가를 지나 바라본 학구리 태봉 태비, 도굴(?) 흔적 때문인지 태함 덮개돌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무심한 세월. 그렇게 흘러갈 테고 태함 전면 태주 명문은 희미하지만 판독 가능합니다. 왕자 수견 태실 王子 壽堅 胎室 수견 壽堅(1,478~1,504) 성종과 숙의 하씨 사이에서 태어난 계성군桂城君 순恂의 자字입니다.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며 중종의 이복형으로 부인은 원주 원씨, 26세에 요절하여 월산대군의 손자 계림군 이류를 양자로 들였다고 합니다. 묘는 어머니 숙의 하씨 묘와 함께 천안에 ..

순천...종칠위 선영배 철비, 군수 신병우 철비

외서복지회관 외서면 월암리 171번지 복지회관 비림 선영배 철비. 신병우 철비 종칠위 선 공 영배 공덕불망비(從七位 宣 公 永培 功德不忘碑) 종칠위(從七位) 일제강점기의 관직 "조선인 관리가 최상위에 오를 수 있는 자리는 대체로 고등관인 군수였다. 종7위 고등관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어렵다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후 능력은 물론 일제에 대한 자발적 충성이 뒤따라야만 임용이 되었다. 고등관이 되기만 하면 그 아래인 ‘판임관 관료’가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으며, 모든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일거에 보장되었다. 고등관과 판임관의 구별은 매우 엄격해 고등관은 ‘사족’ 취급을 받았고, 판임관은 일반 평민과 신분상으로는 차이가 없었다. 고등관은 기차를 타더라도 3등..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