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교 동기 몇몇과 후쿠오카 여행(10.31~11.03) 기록입니다.
본래부터 사진과 별로 친하지 않지만 비 때문에 엉망진창인 사진 몇 장과 안목이 일천하여 간단한 설명을 붙입니다.
후쿠오카는 부산에서 가장 가까운(220KM) 거리에 위치
"후쿠오카현(福岡県ふくおかけん, Fukuoka-ken)은 일본 규슈 북부에 위치한 현이다. 면적은 약 4,980㎢, 인구는 약 511만 명(2020년)이다. 규슈 최대 현이자 중심지이다. 규슈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후쿠오카시와 두 번째로 많은 기타큐슈시가 모두 후쿠오카현에 있다. 혼슈와간몬해협의 해저터널과 교량으로 연결되어 교통의 중심이다. 명실상부한 규슈의 수도와 같은 지역이다.
후쿠시마와 이름이 비슷하여 헷갈리는 사람도 있으나, 복(福) 자가 들어가는 걸 빼면 딱히 관계는 없다. 유사한 관계로는 시가현(滋賀県)과 사가현(佐賀県)이 있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오사카, 도쿄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이 찾는 일본 유수의 관광지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후쿠오카시, 기타큐슈시 등 개별 도시 문서를 참조.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신사로 유명한 다자이후시도 후쿠오카현 소속이다.
후쿠오카현은 과거 율령국 시절 크게 후쿠오카시를 중심으로 하는 치쿠젠노쿠니(筑前国), 키타큐슈시를 중심으로 하는 부젠노쿠니(豊前国)[6], 야나가와시-구루메시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치쿠고노쿠니(筑後国)가 존재했다. 율령국 시절의 영향인지 현대에도 후쿠오카현은 후쿠오카 도시권(치쿠젠), 키타큐슈 도시권(부젠), 구루메 도시권(치쿠고)으로 나뉜다."(나무 위키)
후쿠오카 타워에서 바라본 뷰. 국제 여객선 터미널
여행 내내 흐리고 가는 비가 내렸지만, 귀국 직전에는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승선했던 카멜리아호
위 사진은 귀국 직전 촬영했습니다.
10.31일 저녁 부산항 국제터미널 출항. 11월 01일 아침 하선
비를 뚫고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디자이후 천만궁 도착. 우리나라 사하촌처럼 신사 입구에는 좌우로 상가가 입점해 있었지만 무딘 성정 탓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바삐 발걸음 옮겼습니다.
다자이후역(太宰府驛)
천만궁 도리
우리나라의 홍살문과 같은 상징으로 이해됩니다.
천만궁 표지석
엔쥬오우인(延壽王院) 출입문
천만궁 본전으로 들어가는 도리 측면에 위치
출입금지 구역으로 까치발로 기웃기웃 바라보았습니다.
합각의 문양
엔쥬오우인(延壽王院)
예전에 덴만구 참배객의 숙소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신토(神道)의 세습 신관이 거주하는 곳이다. 세습 신관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후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엔쥬오우인은 외부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네이버 블로그 임종헌의 세상사는 이야기)
도리(鳥居)
우리니라 홍살문과 같은 상징으로 이해되며, 鳥居 명칭은 솟대 꼭대기에 앉아 있는 새(오리)와 의미가 일맥 상통하지 않을는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전역에 설치되었던 일본 신사의 도리와 동일합니다.
일제 강점기 달성공원 신사(사진 출처. Daum)
명치 28년.
1895년에 세웠습니다.
녹나무?
천연기념물
신지이케(心字池)
천만궁 본전을 참배하려면 이코바시(太鼓橋)와 히라바시(平橋), 다이코바시 등 3개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신지이케는 초서(草書) '心'자의 형상으로 만든 연못이라고 한다. 마음을 갈고닦으라는 뜻이리라. 바깥의 다이코바시는 과거, 히라바시는 현재, 안쪽의 다이코바시는 미래를 상징한다. 이는 불교의 윤회설에 근거한 것이다. 과거의 다리 다이코바시를 건넌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속설이 있다. 아치형의 다이코바시는 북다리 또는 홍예교(虹霓橋)라고도 한다. 연못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는 아름드리나무에는 이끼와 일엽초가 자라고 있어 신비한 분위기가 감돈다. (네이버 블로그 임종헌의 세상 사는 이야기)
석등
우리나라에도 일제강점기에 조성한 저런 유형의 석등이 흔하게 남아 있습니다.
광주 이장우 가옥 석등
志賀社
누구를 모신 신사인가 보다는 독특한 목조 건축이 눈에 들어옵니다.
志加大明神
지금까지 포작 위의 지붕만 보았는데, 평난간을 두르고 전각을 세웠습니다.
지붕과 독특한 공포가 궁금하여 귀국 후 검색했더니. 일본의 중요 문화재입니다
"해상 안전을 담당하는 바다의 신 와다츠미(綿津見)를 모시고 있다. 와다츠미는 '와다(바다)'와 '미(신)'을 '츠(관형사)'로 연결한 합성어다. 문 위에는 시가다이묘진(志加大明神)이라고 쓴 판자가 걸려 있다. 시가샤는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 1336~1573) 시대인 1458년에 세워진 규슈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규모는 작지만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네이버 블로그 임종헌의 세상 사는 이야기)
금왕사
천만궁의 말사이군요.
즉, 신사 경내에 여러 신을 함께 모신 것 같습니다.
금줄?
우리나라 금줄과 같이 왼새끼로 꼬았을까?
저 하얀 종이는 우리는 밝음을 상징하여 어두운 곳에 있는 사악한 기운을 차단하는 상징으로 금줄에 끼웁니다.
신사의 금줄은 검색하였더니 고헤이(御幣)라고 하며 우리의 백지와 비슷한 상징으로 추정됩니다
"신전에 올리거나 신관(神官)이 불제에 쓰는 막대기 끝에 흰 종이나 천을 끼운 것"
본전 입구 루문(樓門)
우리나라 서원, 향교의 내삼문 같습니다.
향교와 서원의 외삼문은 오히려 화려화며 내삼문은 소박하게 꾸미는데 신사는 그 반대입니다.
석등
옥개석 귀꽃이 고사리문이며, 상륜은 병 모양입니다.
요즈음 조성한 우리나라의 사찰, 공원, 무덤 등에 흔히 볼 수 있는 동일한 옥개석과 상륜부입니다.
즉, 우리 전통 석등 양식이 있음에도 일본 신사 석등을 모방한 것을 무턱대고 세운 탓입니다.
부산 대각사 석등
천만궁 참배 전 손을 씻는 곳
천만궁 본전
본전은 1591년에 세워졌다.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모모야마 양식의 화려한 건물
지붕에 나무가 자라고 있어 지붕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다자이후텐만구(太宰府天滿宮)
"일본 헤이안 시대 문인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를 ‘학문의 신’으로 모시는 곳이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모시는 텐만구는 일본 곳곳에 있지만 다자이후텐만구가 가장 유명하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묘가 안치된 자리에 얼마 뒤인 919년 다자이후텐만구가 창건되었기 때문이다. 매년 합격이나 학업 성취를 기원하는 많은 이들이 합격 부적을 사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또 1월 1일은 ‘오쇼가츠’라고 하여 새해의 운을 점치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전국에서 약 200만 명의 참배객이 줄을 잇는다. 다자이후텐만구는 매화 명소다. 이곳의 매화는 다른 지역의 매화보다 먼저 피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년 2~3월에는 약 6,000그루의 매화가 만발해 경내를 아름답게 물들인다."(네이버)
"1591년에 건립되어 1915년에 재건된 것이다. 1590년대는 다이묘(大名)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와 그의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 아래에서 정치적 통합을 이룬 쇼쿠호 시대(織豊時代, 1568∼1603) 또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다. 혼덴 입구의 문은 흡사 사무라이(侍)의 투구를 연상케 한다. 이런 문을 카라몬(唐門)이라 하고, 지붕의 곡선 양식을 카라하후(唐破風)라고 한다. 카라하후는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1185~1333)부터 생겨났다고 한다. 혼덴의 지붕은 노송나무(편백나무) 껍질을 이어 붙인 히와다부키(檜皮葺)다. 나라 시대에는 도성의 주요 건물 지붕은 기와, 부속 건물의 지붕은 히와다부키로 했다. 이후 히와다부키가 점차 귀족의 저택이나 진쟈의 지붕에 쓰이게 되었다." (네이버 블로그 임종헌의 세상 사는 이야기)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 845 ~ 903 )
"헤이안시대에 활동한 학자·시인·정치가로서 일본에서 학문의 신[天神]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845년 스가와라[菅原]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증조부 때 하지(土師)에서 스가와라로 성을 고치면서 학문을 가까이하게 되었고 부친은 당대의 유명한 학자였다. 18세 때 관료시험에 합격한 뒤 재능을 인정받아 황족과 귀족들이 그의 문장을 칭송하였다. 886년 지금의 가가와현[香川県]에 해당하는 사누키의 수령이 되었고, 이후 우다[宇多] 천황의 총애를 받아 참의(參義)로 발탁되었으며 국가의 주요 의식과 인사를 담당하는 식부(式部)가 되었다. 또한 미치자네의 딸이 황자의 아내가 되어 그의 권세는 최고에 올랐다. 하지만 901년 정적인 후지와라 도키히라[藤原時平]의 참소로 좌천된 뒤 903년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한 뒤 황족과 귀족들이 잇달아 사망하자 사람들은 한 맺힌 미치자네의 원혼이 복수한 것이라고 믿었고, 그를 덴진[天神]으로 추앙하여 신격화하였다."(두산백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나라 사찰 명부전의 업경대(業鏡臺)처럼 보이는 거울이 있습니다. 거울 뒤로는 뒤쪽으로는 어폐(御幣)가 걸려 있습니다. 검색하였더니? 팔지경(八咫鏡)이라는 글이 보입니다. 팔지경의 의미는 패스합니다.
석등
국내에도 일제강점기에 조성한 동일한 유형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석등
역시 국내에서도 볼 수 있는 유형입니다.
기린상
신성한 동물로 영웅이나 훌륭한 인물을 상징
용의 머리를 가진 천만궁의 기린은 스가와라미치자네(菅原道真)가 가졌던 자부심과 일본 문화에 공헌한 기념으로 1800년 중반에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사슴.
혹 사슴의 몸을 하고 있는 기린상일까요?
천만궁의 해태상은 사진에 담지 못했지만 우리나라 궁궐의 해태상과 같이 화재 예방을 상징하여 조성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진은 구마모토 성에 있는 가등청정을 모신 신사 입구 해태상입니다.
御神牛
천만궁에 모신 일본 학문의 신인 스가와라미치자네(菅原道真)가 903년 죽자 유해를 소달구지로 운구하던 중 소가 엎드려 움직이지 않게 되자, 그 자리에 유해를 매장하였다고 합니다. 905년 그 자리에 사당을 세우고, 919년 천만궁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런 전설 때문에 어사우는 인간의 병마를 치유해 주고, 머리와 뿔을 만지면 시험에 합격한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습니다. 대구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과 같은 상징으로 생각됩니다.
천만궁. 학문의 신을 모신 신사
사전 지식 없이 여행한 까닭에 많은 것을 놓치고 왔습니다. 비가 내리기도 했지만 본전 후원, 여러 전각, 규수 박물관(여기는 시간도 없었지만 입구의 사진 촬영 금지라는 팻말에 발길 돌렸다). 매화, 천연기념물인 나무 등등을 사진에 담지 못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일본에 글을 전한 백제 왕인박사가 생각났으며, 합격 기원 때문인지, 우리나라 교복 자율화 이전의 검은 교복을 입고 줄을 서서 입장하는 고교생들의 행렬을 보고 일본의 조직문화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최근 우리나라에 무분별하게 조성된 고사리문 석등이 신사에 줄지어 있는 석등과 동일한 양식임을 다시 확인하고 묘한 감정이 솟구쳤습니다.
나오는 길
사찰이 눈에 들어와 잠시 둘러보았습니다.
梅木山 光蓮寺. 일주문
범종
우리나라에 많이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동종과 같은 양식입니다.
군산 동국사 범종(1919년)
법당으로 추정되는 전각은 계단만 없으면 군산 동국사, 대구 관음사와 흡사한 구조처럼 느껴졌습니다.
법당에 들어가 참배하였으면 좋았을 텐데,
군산 동국사
202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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