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내고향 성주

성주...성산동 고분군 전시관. 성주의 태실 특별전

임병기(선과) 2024. 11. 10.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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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성산동 고분 전시관

성주의 태실 특별전에 다녀온 사진입니다.

성산동 고분군전시관

https://www.sj.go.kr/goboongoon/main.do

 

성산동 고분군.

https://12977705.tistory.com/8727287

 

성산동 고분관 야외전시장 법수사지 배례석

https://12977705.tistory.com/8727288

성주 성산동 고분군

성주의 태실 특별전

2014.10.21~2025.02.15

태종태실지 석물

태종 태지석. 일제강점기. 서삼릉 태실

 

태종태실지

https://12977705.tistory.com/8724661

세조 태실 가봉비(모형)

세조 아기비, 태석(모형)

단종 아기비(모형)

 

원손 태장

황명 정통육년신유 윤십월이십육일 기축 입석

 

단종태실지

본문에는 경남 사천에도 단종태실이 있는 연유를 알지 못한다고 했지만 아래 인성대군 관련 글을 참고 바랍니다.

https://12977705.tistory.com/8724663

 

경남 사천의 (傳) 단종 태실은 인성대군의 태실입니다.

https://blog.naver.com/bogirang/222223085868?trackingCode=blog_bloghome_searchlist

태종 태항아리(일제강점기 사진)

1927년 이왕직에서 태실을 봉출 할 당시 태함에는 지석 없이 태항아리만 있었다고 합니다.

태종 태 항아리(복제)

태종 태 내항아리(복제)

1927년 사진에는 뚜껑과 받침이 있었습니다.

계양군 태지석(1427~1464). 1439년

 

"이름은 이증(李璔). 자는 현지(顯之). 아버지는 세종이고, 어머니는 신빈김씨(愼嬪金氏)이며, 부인은 좌의정 한확(韓確)의 딸이다. 1434년(세종 16) 계양군에 봉하여졌다. 아버지의 총애가 지극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글씨도 잘 썼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한 뒤 한명회(韓明澮)·한확 등과 함께 수양대군의 측근이 되어, 계유정난을 도왔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책정되었다. 세조의 측근에서 서무의 출납을 맡아 신임을 얻었다. 남을 대접함이 겸손하여 권세를 부리지 않았으나, 주색에 빠져 일찍 죽었다. 시호는 충소(忠昭)이다."(다음백과 사전)

분청사기 연판문 뚜껑. 15세기 전반

세조 태항아리. 15세기 전반

 

문청사기 내항아리

연판문뚜껑(복제)

분청사기 장흥고면 대접(복제)

분청사기 장흥고면 대접(복제)

평원대군 분청사기 연판문 뚜껑. 15세기 전반

 

평원대군(1427~1445)

" 이름은 임(琳), 자는 진지(珍之), 호는 근행당(謹行堂). 세종의 아들로,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이다.

1434년(세종 16) 8세에 평원대군으로 봉군(卒記에는 13세에 봉군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되고, 1437년 종학(宗學)에 입학, 호군(護軍) 홍이용(洪利用)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후 학문에 진력하여 시(詩)·예(禮)·『대학연의(大學衍義)』에 숙달되고, 또 서체(書體)와 사어(射御)에도 능숙하였으나, 1445년 1월 두창(痘瘡: 천연두)으로 죽었다.

 

성품이 겸손하고 효행과 우애가 있었으므로 세종의 아낌을 받았으며,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세종 말년의 신병 등과 함께 세종의 숭불을 촉진시킨 한 원인이 되었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1483년(성종 14) 5월 강녕부부인 홍씨(江寧府夫人洪氏)가 죽자 제안대군 현(齊安大君琄: 예종의 둘째 아들)으로 뒤를 이었다. 처음 시호는 정덕(靖德)이었으나 뒤에 정헌(定憲)으로 추시되었다."(다음 백과)

단종 분청사기 연판문 뚜껑. 15세기 전반

영풍군 분청사기 연판문 뚜껑. 15세기 전반

 

永豊君(1434 - 1457)

" 이름은 이전(李瑔). 세종의 여덟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혜빈 양씨(惠嬪楊氏)이다. 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와 수춘군(壽春君) 이현(李玹)의 동생이다. 부인은 형조참판 박팽년(朴彭年)의 딸이다. 1441년(세종 23) 영풍군에 봉군되어, 1455년(세조 1) 세조의 즉위와 함께 1453년(단종 1) 10월의 계유정변 이래로 정치·군사권을 장악하였다. 궁극적으로는 왕위에 나아가려는 수양대군(首陽大君: 世祖)과 대립하여, 단종과 그 왕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혜빈 양씨·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 등이 제거될 때 이와 관련되어 예안에 유배되었다가 곧 안성에 이배 되었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 등에 의한 단종복위사건을 계기로, 가산과 고신(告身: 관원의 임명 사령장)을 몰수당하고 임실에 안치되었다. 1457년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등의 단종복위기도가 탄로 되면서 죄가 더하여져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을 가시 등으로 울타리를 쳐서 통제하던 형벌)되었다가 살해되었다. 묘는 경기도 고양에 있다. 1712년(숙종 38) 단종의 복위와 함께 관작이 복구되면서 신원(伸寃)되었고, 1743년(영조 19) 정렬(貞烈)의 시호를 추증받았으며, 1791년(정조 15) 호남유생의 상소를 계기로 단종묘정에 배향되었다."(다음 백과)

의창군 분청사기 연판문 뚜껑

 

의창군(1428~1460)

" 세종의 10남이자 서3남으로, 생모는 신빈 김씨이다. 친남매로는 형 계양군과 남동생 밀성군, 익현군영해군, 담양군이 있다. 누이들은 2명인데 유아기 때 요절했다. 1435년(세종 17년) 의창군(義昌君)에 봉해졌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 따르면 1456년(세조 2년)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지리산으로 떠나 암자와 사찰을 전전하면서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조실록》에는 그 이후로도 종친의 한 사람으로써 국가의 공식 행사나## 왕실 행사에 참여한 기록이 여럿 보인다

 

1460년(세조 6년) 3월 28일에[3] 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32세.는 원래 경기도 양주군 금촌면 진안리에 조성되었는데 1900년(광무 4년)에 경기도 수원군 음덕면 원두동으로 옮겼다. 그러다 소유권 문제로 옛 산주와의 갈등이 생겨 1946년 4월에 현재의 자리인 경기도 남양주시 일패동으로 옮겼다."(위키 백과)

의창군 태지석. 1438년

화의군 태항아리

분청사기 연판문 뚜껑. 토기 내항아리. 분청사기 대접

 

화의군(1425~)

" 이름은 이영(李瓔). 자는 양지(良之). 세종의 아홉째 왕자로(왕위계승 서열로 아홉째이나 출생순서로는 여섯째 왕자), 어머니는 영빈 강씨(令嬪姜氏)이다. 박중손(朴仲孫)의 사위다. 1433년(세종 15) 화의군에 봉해지고, 1436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441년 임영대군(臨瀛大君)과 함께 민가 여인에게 남복(男服)을 입혀 궁내로 들이려다가 수문장에게 발각되어 직첩과 과전을 몰수당하였다. 1447년 다시 화의군에 봉해졌으나, 1449년 조관(朝官)의 기첩을 빼앗은 사건으로 다시 직첩이 몰수되었다. 이듬해에 문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화의군에 봉해졌다.

 

1455년(단종 3) 평원대군(平原大君)의 첩 초요경(楚腰輕)과 사통한 사건이 발각되면서 또다시 고신을 몰수당하고 경기도에 부처(付處)되었다가, 곧 방면되었다. 같은 해 세조가 즉위하면서 대간(臺諫)으로부터 금성대군(錦城大君)·혜빈양씨(惠嬪楊氏)와 결탁해 국가의 기틀을 어지럽혔다는 탄핵을 받고 외방에 부처되었다.

 

1456년 사면되었지만, 그 해 상왕(上王: 단종) 복위사건에 가담해 가산을 적몰당하고 고신을 회수당한 뒤 전라도 금산에 안치되었다. 1457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했다가 사사(賜死)되고, 영월에 방출된 노산군(魯山君: 단종)이 교살(絞殺)되자 이에 연루되었다. 1482년(성종 13) 성종의 호의와 파천부원군(坡川府院君) 윤사흔(尹士昕) 등의 찬성으로 외방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1484년에는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유교(遺敎)에 따라 중앙과 지방 등 편리한 곳을 택해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선원록(璿源錄)』에 이름만 오르고 관작이 삭제되었던 것을 1518년(중종 13) 손자 이윤(李綸)의 요청으로 관작이 추복되고 자손도 종친록에 추록되었다. 품행은 문란했지만 절의가 있었고,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일찍이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세종대의 한글창제에도 깊이 관여했으며, 훈민정음처의 감독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791년(정조 15)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구축하면서 단종조의 충절이 인정되어 정단(正壇)에 배식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다음백과)

세조 태지석. 1438년

세조태실 외항아리.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태실.태비.태함

https://cafe.daum.net/moonhawje/MebK/261

 

두서없이 포스팅하였습니다.

기회가 되면 성산동 고분군, 태실 특별전을 관람하시고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세종대왕자태실을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2015년에 쓴 세종대왕자태실 이야기입니다.

https://12977705.tistory.com/8723838

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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