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내고향 성주

성주...창천 보살행 회화나무

임병기(선과) 2025. 3. 12.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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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리 회화나무. 가천면 창천리 1258-15

수령 700년 이상. 수고(樹高) 16m, 둘레 426㎝, 수간(樹間) 18m로 마을 수호신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동제洞祭

전국의 대부분 동제처럼 음기가 가장 강한 매년 정월 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올린다고 합니다.금줄과 소지로 미루어 금년에도 올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제 연원

"연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현재 보살행 회화나무에 올리기 전에는 용두산 소나무 군락지에서 제의를 올렸다. 용두산은 용머리, 용몸뚱이, 용꼬리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제사를 올리는 곳은 소나무 군락지이다.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제관 부부가 제사를 올릴 때 용두산으로 올라가는 호랑이가 앉아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지켜보고, 제를 마치면 돼지머리를 물고 용두산으로 올라갔다고 한다."(디지털 성주문화대전)

예전에는 마을 주민 가운데 제주를 선발하였지만 마을 인구의 감소 등의 사유로 회화나무 동제 추진위원회서 주관하며 제주와 유사를 선발한다고 합니다.

 

제의 절차

제일 3일 전 추진위원회에서는 금줄을 꼬고, 제수 음식을 준비한다. 금줄에는 각 마을에서 받은 소원지를 함께 끼운 뒤 제일 전날 회화나무 주변으로 두른다. 이때 회화나무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제수는 돼지머리, 삼실과, 떡 그리고 맑은술을 준비한다. 막걸리와 감주 등 탁주는 사용하지 않으며 정종과 청주 등 맑은 술을 준비한다. 제일 아침 10시경이 되면 추진위원회와 함께 제관이 회화나무 앞으로 제수를 진설하고 제의를 올릴 준비를 한다.(디지털성주문화대전)

보살행菩薩行

집에 있는 성주군지. 성주군문화유적분포지도. 디지털성주문화대전. 성주향리승람에서도 보살행으로 불리는 단서를 찾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2009년 07월 10일 자 영남일보 '이지용 기자의 노거수 이야기'에 그 까닭이 실려 있습니다.

 

" 왜 보살행 회화나무라고 부를까? 경북도에서 펴낸 '산과 숲, 나무에 얽힌 고향이야기'에 따르면 6·25전쟁 직후까지만 해도 회화나무는 동향(東向)과 남향(南向)의 커다란 가지가 넓은 그늘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의 휴식장소로 이용되었다. 휴식을 취하던 주민들은 여담으로 "가지가 부러지면 큰일 나지"라며 걱정했다고 한다. 동향의 가지 밑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큰길이었고, 남향의 가지 밑에는 점포와 가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지가 부러지면서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1953년 8월, 동향의 가지가 부러졌다. 하지만 한밤중에 부러졌고, 가지가 동쪽으로 떨어지지 않고 방향을 돌려 골목길을 따라 떨어져 인명이나 재산의 피해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誓願)을 한 보살처럼 회화나무가 동네 사람들을 구해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이적(異蹟) 탓인지 동네 주민들이 회화나무를 신성시하고 있다. 나무 옆에서 가게를 하고 있는 도순옥 할머니(64)는 "회화나무 가지를 함부로 꺾지 않고 떨어진 잎이나 가지는 불도 때지 않는다"라고 했다. 꿈에 조상이 나타나 회화나무에게 가보라고 해서 기도하러 오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최근부터는(2007년) 회화나무 앞에서 한 해 동안 마을과 주민들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내고 있다. 원래 마을 뒤 용두산에서 동제를 지냈지만 제당이 허물어지는 등 여러 문제가 생기면서 회화나무에서 지내게 되었다. 김종만 전 성주군의원은 "동제에 쓰일 제물은 마을 공동경비로 해결한다. 마을을 묵묵히 지켜주는 회화나무는 주민에게는 마음의 안식처로 자리 잡고 있다"며 회화나무는 창천리의 상징이라고 했다."

그나저나 지금 행정구역은 가천면伽泉綿 창천리倉泉里이지만, 제가 어릴 때 조부님을 비롯 마을 사람들은 천창泉倉으로 불렀습니다. 지금도 상품을 가득 싣고 천창장을 오가던 신락로의 소달구지와 상인들의 행렬이 눈에 선합니다.

 

왜 어른들은 천창泉倉으로 칭했을까요?

1991년 성주문화원에서 출간한 '성주향리승람星州鄕里勝覽'에 실린 내용입니다.

"1715년(숙종 41년) 목사牧使 윤헌주尹憲柱가 방내坊內의 양곡을 보관키 위해 창고를 세워 천야창泉野倉이라 하여 마을도 천창泉倉으로 했다"

그리고 1996년 간행된 성주군지星州郡誌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泉倉이 창천倉泉으로 바뀐 내력이 실려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창천리가 되었다. 천창泉倉이라는 용어의 음이 일본어인 '센소(戰爭)와 음이 같아 倉泉으로 고쳐 불렀다"

 

즉 어른들이 천창泉倉으로 불렀던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빼앗긴 본래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는지.

지금은 천창장이 예전 명성을 잃었지만 성주 출신 배창환 시인의 시를 통해 영원히 회자될 것입니다.

 

흔들림에 대한 아주 작은 생각

 

배창환

 

추수 끝난 강둑에 무리지어
다 끝나가는 한 생을 마저 살려고
마구 흔들어대는 저 으악새는
어떻게 내 마음을 통째로 뒤흔들지 않고
내 곁을 지나친단 말인가

성주 가천 닷새장 파장에 부는 소슬바람도
대가천 식당 할매가 말아내논 돼지국밥도
정류장 둘레에 퍼질러 앉아
금방 밭에서 뽑아온 무 배추 몇단 놓고
국수 말아먹는 아낙의 등 굽은 가계(家計)도

어찌 나와는 아무 상관없다 지나치리
그 모습에서 감동을 찾아가기도 하고
그 웃음에서 가버린 세월을 되감아오기도 하고
하다 못해 연민의 눈길이라도 욕심껏 퍼붓고 갈 일이니

세상에 저 홀로 흔들리는 것 무엇 있으리

동제洞祭

당산제이며 회화나무는 당산목입니다.

 

작금의 농촌 현실은

농경 사회의 쇠퇴. 인구 감소. 등등의 사유로 우리의 전통 마을문화는 시나브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사라지고, 잊히는 것은 서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학동기 들과 가야산을 다녀오면서 가천 술도가 막걸리에 취해 주저리주저리...

 

2025.02.15